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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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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 혜묵 1990년 11월 105호
얼마전,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의가 주최한 청문회에서 페르샤만 사태에 대한 우리나라의 군비분담과 병력파견을 거론했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그분들께서는 6.25 참전문제를 들먹이면서ꡒ한국 정부와 국민들은 지난 40여 년간 자유를 누려온 데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한다ꡓ고 했다 한다. 망극한 자유.
ꡒ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ꡓ 북한이 빠진 올림픽 판이 벌어지는 동안 방송이 쏟아내는 이런 유행가들을 들으며 시큰둥했던 사람들. 어쨌거나 한강에는 유람선이 떠다닌다. 이 유람선의 자유를 만끽하고 수호하기 위하여, 그 자유를 베푼 분들에 감사를 표하기 위하여, 먼 나라 땅에서 미국이 벌이는 성스러운 자유의 십자군 전쟁에 피와 땀을 걸고 동참해야 한다는 현실. 이 시대 지고의 이념이 된 자유.
내가 다녔던 학교의 교훈인 ꡒ진리와 자유ꡓ, ꡒ너희가 내 밀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장 31~32절).ꡓ 미국 개신교회의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답게 당당한 미국식 자유주의를 선양해내던 거룩한 교훈. 그것은 젊은이들이 모인 곳에서는 쉽게 들을 수 있던 ꡒ오! 자유… 나는 자유하리라ꡓ는 얼치기 되놈식 한국어 같은 노래의 낭만과 더불어 우리의 이상으로 골수에 와 박혔었다.
미국은 그들의 ꡐ하나님ꡑ을 섬기기 위하여 조국을 떠났던 신정주의자(神政主義者)들의 역사로 첫 페이지를 열었다. ꡒ나에게 조국으로부터 떠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은 신이었다. 나의 부친으로 하여금 나를 떠나게 해 주신 것도 신이었다.ꡓ 그들은 자기들 신앙에 따라 자유로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신성환 사회를 건설하려 하였다(앙드레 모로아의 『美國史』P42).
미국 독립혁명의 이론가 토마스 제퍼슨은 ꡒ우리에게 생명을 주산 하나님은 동시에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ꡓ는 그들에게 자명한 것으로 여겨졌던 원리를 기초로 하여 ꡒ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인간에게는 그의 창조자로부터 부여된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 그것은 생명․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이다ꡓ라는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다. 존 록크의 사상으로 포장된 미국의 건국이념. 진리, 자유. 그들의 ꡒ진리이신 하나님을 기초로 한 자유ꡓ로 시작한 제퍼슨의 자유의 제국(Empire of Liberty), 미국의 이상은 그러나, 그들의 충직한 손발 흑인 노예들에게는 100년이 지난 후에야 문서화될 수 있었고, 그 땅의 진정한 소유자 인디언들은 이제 진리이신 하나님의 땅에서, 비좁고 메마른 보호구역 안에서 술과 마약에 찌들어 멸종되어 가고 있다.
그러할진대, 아득한 태평양 건너 노란 야만국에 미친 진리와 자유의 다사로운 복음이 이제 우리를 ꡐ유람선의 자유ꡑ 정도로 시큰둥하게 만들고, 그 고결한 이념을 수호하기 위해 자유의 신전에 바쳐야 할 군비분담금과 병력파견에 우리가 경악해 마지 않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ꡒ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ꡓ 어떤 사람들이 번역한 것인지는 몰라도 이 번역된 성경구문은 묘한 모순을 담고 있다. 이 모순은 다른 언어, 판이한 역사와 문화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ꡐ그들의 하나님ꡑ이 ꡐ우리들의 하나님ꡑ으로 옮겨지기 어려운, 그들의 진리가 우리에게도 진리로 보편화 될 수 없는 한계를 보여준다. 즉, 진리는 하나님을 기초로 하는 것이요, 자유는 진리로 말미암는다는 것인데, 자유(自由)라는 한자어는 ꡒ자신으로 말미암는다, 자기로부터 비롯한다.ꡓ는 뜻일 터이니 하나님으로부터 진리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이미 자유일 수가(그것은 他由요, 神由요, 直由는 될지언정)없다는 것이다. 진리가 하나로 정해져 있다면 각 개체는 진리에 종속될 것이므로 자유일 수 없고, 모두가 각기 자유롭다면 이들에게 존재와 당위의 근거를 제공하는 외적 실체로서의 진리는 허무한 것이 된다.
성스러운 복음을 모순이니 어쩌니 말장난으로 희롱하려 드는 것은 어차피 내가 ꡐ그 하나님ꡑ의ꡐ참제자ꡑ이지 못한 이유일테지만, 이 시대의 얼치가 자유주의자들에게도 미국 국회의원들의 강변 앞에서 명석판명한 순수이념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뿌리조차 뒤섞여버린 서로 다른 역사에 엉성하게 다리를 걸치고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옛 글을 상고해보면 유감스럽게도 진리나 자유라는 개념어는 순전히 불교적인 전통에서 형성되고 씌어졌던 것이다(설혹 불교권 밖의 문헌들이 이와 유사한 개념들을 담고 있다 하여도 그것들은 대개 불교적 사고방식과 연관을 갖는다). 단적으로 말해 진리란 연기법을 기초로 한 공의 이치를 뜻하는데, 과거의 브라만이니 아트만이니 하는 고정불변의 원리, 실체를 부정하고 모든 존재는 상의상관(相依相關)하여 자성(自性)이 공한 것이 바로 참다운 원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하여 이 공의 연기법을 깨달은 부처님은 외적인 실체의 고정적인 환상들에서 해탈하여 ꡐ스스로 말미암을 수 있는ꡑ 대자유(大自由), 대자재인(大自在人)이 된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진리는 허공과 같이 잡을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은 각자의 환경과 욕망에 따라 어지러이 고정된 형상으로 집착하여 이것들이 얽히고 얽혀
하나의 고통스런 중생계를 연출해내는 것인데, 이로 인해 거짓으로 지어낸 인연들에 얽혀 자유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ꡐ진리와 자유ꡑ는 ꡒ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ꡓ는 말의 본래 의도와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을 터임에도, 어느틈엔가 복음으로 둔갑하여 그들 하나님의 진리를 대표하면서 제국주의자들의 더러운 전쟁에 우리를 끌고 들어가는 명분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길을 다니다 보면 잘난체 좋아하는 사람들이 종종 ꡐ불교가 종교냐 아니냐ꡑ는 시비를 걸며 종교의 3대 구성요소가 어쩌니 하면서 엉성한 이론들을 전개하는 것을 보게 된다. 종교라는 개념이 그야말로 100% 불교권에서만 쓰던 전문용어라는 사실을 모르는 그들은 religion의 속없는 번역어인 종교라는 껍데기만을 들고 서구 종교학자들의 속다른 이론을 또다시 번역하여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다. 종교란 개념이 불교라는 거대한 삶과 역사의 체계를 구성하는 한 부분에 불과할진대, ꡐ불교가 종교냐 아니냐ꡑ는 말은 ꡐ동물이 코끼리냐, 아니냐ꡑ는 말처럼 무의미한 허튼소리가 될뿐이다.
아무튼, 이같은 전도된 몽상들이 빚어내는 혼란이 ꡐ그들 하나님의 뜻ꡑ인지 어쩐지는 몰라도 바다 동쪽 한구석에서 스스로의 역사를 꾸리며 살아온 우리 민족에게는 그야말로 ꡐ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내는ꡑ 경우 없는 경우라 하겠다.
급속한 서구화의 가벼운 에피소드라고 넘겨버릴 수도 있는 이러한 번역과정에서의 뒤바뀜은 우리에게 던져진 두 겹으로 이지러진 색안경의 편차를 느끼게 해준다.
그 하나는 ꡐ진리와 자유ꡑ의 고유한 의미가 제거되어 재생불능의 망각 속으로 잠겨들었듯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지탱해 오던 우리의 이념들을 거의 완전히 방기해 버렸다는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대세가 정해졌다하여 그외의 유산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는 것이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 듯이 우리의 역사를 이끌어오던 자랑스런 가르침들을 망각속에 내던져 두는 것 또한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의 과거를 우리가 부정하고 서구의 껍데기를 둘러썼다하여 우리가 서구인의 선진적인 삶을 보장받을 수 있겠는가. 개꼬리 삼 년되어도 황모가 되지는 않는다. 세계사의 흐름에서 소외되어 나라를 빼앗기고 양대이념의 갈림길에서 우왕좌왕하다가 ꡐ거저얻은 광복과 분단의 현실, 그리고 자유수호와 민족해방의 두겹으로 찬란했던 동족상잔, 독일이 통일하고 공산당을 해체하는 탈냉전의 신사고에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역사에 대한 색안경을 끼고서 또다시 통일이 굴러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것인가. (우리는 우리가 이어온 삶과 역사를 기초로 세계에 대한 해석을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른 하나는 ꡐ진리와 자유ꡑ라는 고유의 언어형식에 전혀 다른 역사를 가진 새로운 의미가 치환되어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우리의 삶에 생소한 것으로 억지로 교육되고 주입된 것이다. 저들에게는 자명한 것이 우리에게는 그 짧은 역사에 맞춰 애매한 채로 남는다. 우리의 역사와 그들의 역사의 외형적인 뒤섞임 속에서 역사를 읽는 신세대는 두 가지 의미를 오가며 현기증을 느낄 뿐이다. 천부인권의 자명한 진리가 흑인노예나 가난뱅이 백인들에게는 당연스레 적용될 수 없었듯이, 이념의 제조자 미국 의원나리의 자유와 침략자 후세인의 자유는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유럽의 자본가들이 봉건귀족을 향하여 던졌던 자유의 칼날이 소련이 시도한다는 자유시장경제체제와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껍데기 언어형식을 빌어 머리속에 쑤셔넣었다고 하여 자명하게 느낄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소한 이념들의 색안경에 우리를 길들이기 위해 악을 쓰는 일이 아니다. 그 이지러진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우리의 생생한 육안을 되찾아야 한다.
길가에 걸려진 자유수호의 현수막(또는 그 정반대라도 마찬가지 이지만)을 볼 때마다 거창한 명분 뒤에서 사악하고 어리석은 피비린내를 느끼게 되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페르샤만에서의 자유와 우루과이라운드의 시장자유화, 이 두 가지 자유를 위해 무엇인가를 자꾸 빼앗기면서 점차로 자유에의 위기감만 높아가는 까닭일까.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눈으로 우리가 누려야 할 자유를 정의 내릴 수 있다면 감히 말하고 싶다. 자유는 누가 보장해주고 수호해주는 것이 아니라고. 누군가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도, 아무것도 그의 자유를 속박할 수 없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