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의 바닷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까지 방황을 참 많이 했다. 젊음의 몸살이었을 것이다. 젊은 날의 고뇌 속에 방황하다가 종지부를 찍은 것이 출가였다.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절집에 대한 상식은 물론 수행이라는 단어조차 들어보지도 못했고 그렇게 무서운 느낌이 절에 대한 첫 인상이었는데도 아침 공양을 하면서 수좌스님에게 이렇게 여쭈었으니 말이다.“스님, 출가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실은, 스님들의 잿빛 승복을 대하자 아려한 그리움 같은 것이 피어올라왔었다. 필시 전생사였을 것이다. 행자과정을 마치고 강원에 가면 된다고 하길래, 어디로 가서 행자생활을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하는 거였다.“해인사가 좋은데, 대흥사에서 한번 해보고 마음이 결정되면 그리로 가면 좋겠네요.”그렇게 난생 처음 머물렀던 절에 눌러앉아 다음날 삭발했다.
35년 전, 스물세 살 되던 해의 일이다.
노스님 한분에게 초발심자경문을 배우고 시봉하면서 지내자니 세간에 살면서 느꼈던 그 복잡한 갈등이 눈녹듯 사라져갔다. 부모님에 대한 반항, 이성간의 갈등 등, 그 혹독하게만 느껴졌던 젊은 날의 방황이 자신도 모르게 사라져갔고 그렇게 마음이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예불드리고 일하고 공부하면서 그러한 갈등들이 신앙심으로 변해갔다.
세상에 대한 고뇌와 방황이 쉬어지자 새로운 세계가 보였다. 차츰 물소리가 좋아지고 도량이 푸근하게 다가왔다. 아름다운 산세도 마음으로 물결쳐 들어왔다. 출가란 참 좋은 길이로구나를 느끼기 시작하며 출가의 문을 활짝 열었다.
삭발한 첫날, 행자복을 입고 공양간에 들어가니 나의 도반이요 지금은 다도의 대가가 된 용운스님이 행자로 있으면서 공양주를 하고 있었다. 사흘이 지나자 그는 부엌 일을 나에게 넘겨주고 종무소 소임을 보러 갔다. 공양주를 물려받아 밥을 짓는데 도무지 잘 되지 않았다. 불을 때서 밥짓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줄 처음 알았다. 눌은 밥, 태운 밥, 진밥이 번갈아 큰방으로 들어가자 급기야 대중스님들에게 불려갔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밥을 그렇게 지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하려면 집으로 돌아가시오.”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났다. 반찬을 만들어주던 보살님 한분에게 밥짓는 법을 비로소 물었더니 이렇게 가르쳐주었다.
“행자님, 솥에 손을 넣어 밥물을 맞춰보세요. 물이손가락 이쯤 오게 맞추면 밥이 잘 될겁니다.”
아는 게 힘이라고 보살님이 가르쳐준대로 밥물을 맞추고 불을 때자 금방 밥이 고슬고슬 알맞게 잘 되는 것 아닌가. 보리와 쌀이 반반씩 섞인 밥을 먹던 시절, 나의 밥짓는 솜씨는 날로 발전해갔다.
고춧가루가 없어서 김치는 백김치로 담가먹었고 깍두기는 소금에 절였다가 고추가루를 조금 넣고 버무려 먹었는데도 참 맛있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자취를 한 경험이 있어서 반찬은 잘 만들었다. 어머니의 손맛을 닮아서 솜씨가 좋고 음식도 뚝딱 잘 했다. 당시 반찬이라곤 된장을 풀어서 끓인 시래기국과 김치, 깍두기가 전부였으나 스님들께서 아주 잘 드셨던 기억이 난다.
당시 대흥사엔 스무 분쯤 되는 스님들이 주석하고 계셨는데 비교적 젊은 스님들이 많았다. 기도하면 도를 통한다고 해서 누가 기도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법당에 들어가 기도를 열심히 했던 기억도 행자시절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그렇듯 마음이 편안한 가운데 행자시절을 보냈으나 유일한 역경계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사미스님들이었다. 스무 살을 넘긴 행자에게 열다섯, 열일곱 살의 어린 사미스님들의 시집살이는 의외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 밥을 잘 못한다, 옷은 왜 그렇게 입느냐, 반찬 만드는 게 어찌 그러냐 ’하면서 사사건건 간섭을 하는데 어찌나 속상한지‘ 아이구, 행자생활 얼른 끝내고 반드시 계를 받아야겠다 ’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린선배 스님들의 질책으로 인해 수행자의 중요한 덕목인 인욕을 배웠다는 생각이 든다. 행자생활을 마치고 계를 받고 해인사 강원으로 갔는데 치문반부터 시집살이가 보통 아니었다. 규율이
얼마나 엄한지 군대보다 더 심했다. 단체기합으로 죽비를 30대까지 맞은 날이 많았으니 대흥사 어린 사미스님들의 시집살이는 명함도 못내밀 정도였다.
그 시절 참 가난했다. 김치가 부족해서 마을로 김치탁발을 나가기도 했고 이불이 없어 좌복을 덮고 자다가 집에 들러 이불 한 채를 얻어오기도 했다.
행자시절을 보낼 때 대흥사 암자에 청화스님이 공부하고 계셨는데 모두 도인이라들 말했다.‘아무도 만나주지 않고 쌀가루 세 되만 가지고 한 철을 난다’는 소문을 들으면서 어떤 분인지 그렇게 궁금할 수가 없었다. 뒷날 청화스님께서 태안사에 가 계실 때 스님 밑에서 한철을 났다. 젊은 시절 한창 공부할 때 고행을 하는 분에게서만이 느낄 수 있는 깊은 눈빛을 보면서 발심을 했던 것도 행자시절을 대흥사에서 보낸 공덕 중 하나이리라.
수행자는 화두로 생명을 삼아야 한다. 죽더라도 화두를 잡고 죽어야 하며 화두를 뚫는 것이 종문의 이익이다. 출가해서 수십 년을 참선수행이라는 외길을 걸으면서 참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공부엔 흡족하지 못하다.
공부한다고 심한 에고이스트 노릇을 오래한 것 같다. 성격이 급하며 단순하고 융통성 없이 고집이 세어서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을 것이다. 공부해서 마음이 조금 열리고 나니 도반들에게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다. 꼬장꼬장하게 굴며 마음이 좁았던 나를 가까이 했던 사람들, 도반 . 부모형제,신도분들 등 나와 인연된 모든 사람들에게 상처준 것에 깊이 참회하고 있다.
생전에 은혜를 많이 주셨던 서옹선사께서는‘참사람 운동’을 전개하시다 돌아가셨다. 모든 인류가 부처가 되어서 너와 내가 없는 평화로운 삶을 살자는 것이 참사람 운동이다. 산승이 서울이라는 도시 한가운데 살고 있어서인지 종종‘언제 산으로 돌아갈거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산에 있든 도시에 있든 시장통에 있든 정진에 물러섬이 없으면 장소가 무슨 문제 되겠는가. 도시에 살면서 선사께서 이루고자 했던 참사람 운동도 하고 내 자신의 공부도 점검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 9월 말, 이곳 법천사에서‘달마관심론達磨觀心論’강좌를 열었다. 서울에 살고 있는 인연에 따라서 참사람이 되는 공부를 함께 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한평생 수좌로 살아온 최소의 양심이라고 생각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하고자 한다면 어떤 법을 닦아야 가장 간단하면서도 중요하겠습니까? 제자 혜가 스님의 물음에 달마스님이 이렇게 답한다.
“오직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일체의 현상을 모두 포섭하므로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을 관하는 것이 화두다. 우리의 본성인 고향을 찾아가려면 화두를 들고 공부해야한다. 공부하는
그 사람이 참사람이다.
취재· 글 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