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천년 역사의 호국기도도량 도선사(서울.우이동). 그러나‘108산사 순례’라는 새로운 신행활동을 시작하면서 21세기 포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이렇듯 부처님 법을 가지고 거리로 나선 이는 다름아닌 도선사 주지, 선묵 혜자 스님(세납 57세. 법납 45년). 말 그대로 이 시대 대표적인 운수납자雲水衲子이다.------------------------------------------------------
천년고찰 기도도량으로 조용했던 산사에 매 주말마다 떠들썩한 순례객들이 모여든다. 저마다 손
에 든 것은 쌀 한되, 쵸코파이 한 상자. 조금있다 만나게 될 낯선 산사의 새로운 부처님께 올릴 공양미와 인근 지역 군인들에게 나눠 줄 보시물이다.
이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신도들 스스로 절로 준비하는 정성담긴 마음의 선물이 돼버렸다.
“육바라밀의 으뜸이 바로 보시행입니다. 먼저 나눠줄줄 아는 이가 행복의 주인입니다. 그게 중생제도고 바로 부처님 법입니다. 모든 것이 인연법이라 서로의 삶을 주고받는 가운데 작은 지혜들이 모여가고 그 지혜들이 결국 실천되어 사회로 회향될 때 올곧은 불국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일까. 처음 108명이 108산사를 찾아가 108배를 올리자는 기도 중심의 단순한 신행활동이 요즘은 기도를 마치고 돌아서는 시간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됐다. 이제 순례단의 목표는 산사에서 기도를 마치고 가장 가까운 마을을 찾아가 108선행으로 108공덕을 짓자 라는 보다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슬로건으로 바뀌었다. 특히 최근에는 108효행상을 신설하면서 인근 마을 효자 효부들을 발굴해 격려해주는 등 전국적인 칭찬 문화를 만들어가는데 앞장서고 있다. 사찰 중심의 신행문화가 도농을 이어주는 사회운동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알게한다.
“우리 순례단 하나하나가 이제는 스스로가 전법사요 포교사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불교는 꼭 공부하고 뼈깍는 수행을 해야 알 수있는 것이고 꼭 시간을 내서 법당에 앉아야만 부처님 법을 배울 수있다는 생각에서 해방되니까 일단 신도들의 마음부터 편해졌어요.”
신도들은 전국의 부처님 전을 찾는 성지순례단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월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 자연과 벗하는 여행객이 된다. 순례단의 대개는 주부들이다. 혼자서는 집 나설 명분도 없고 엄두가 나지않아 고작해야 동네 한바퀴돌고 삼삼오오 모이는 자리, 수다 한판으로 끝냈던 여가 생활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제법 규모가 큰 신행단체의 일원으로서 여행을 하면서 낯선 삶들을 들여다보고 선행도 짓고 남을 칭찬도 해주는 등 제법 진지한 사회 활동가로 개인의 영역을 넓혀가다보니 체험이 늘고 그만큼 생각도 많아졌다.
“ 처음에는 스님이 하자니까 시작했던 일들인데 이제는 반대로 이거하자 저거하자 신도님들이 쏟아내는 아이디어가 많아져서 오히려 내가 바빠졌어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말이 일 바쁜 재벌 회장이나 하는 말인 줄알았는데 이제는 우리 신도님들 입에서도 술술나오니 모두가 기획 전문가입니다. (웃음) ”
순례를 마치고 서울에 도착하면 집으로 가는 길에 어차피 시장을 들러 저녁거리를 사야하고 그게
또 일이 되어 잘 쉬었던 마음들이 다시 바빠진다는 불편들이 호소되고 이를 대신할 대안들을 스스로 찾아냈다. 도시 시장의 대부분 물건들이 중국산이고 농약뿌린 재배 야채들 일색이니 차라리 지역경제도 살릴 겸 무공해 먹거리도 식탁에 올릴 겸 산사주변의 신토불이 지방 농산물을 사주는 행사를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즉설주왈.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바로 실행하여 사회적 의미로 만들어 가는게 5천명 넘는 순례단 단장 혜자 스님의 실천력. 그로인해 송광사를 찾을 때는 지자체 주선으로 순천농협과 푸짐한 먹거리 장터를벌일 수있었다. 또 최근에는 환경지킴이를 자처하며 순례단 스스로 종이컵 안쓰기 운동을 벌여 순례 중에도 늘 자기 컵을 사용하는 실
천을 하고 있다.
“ 내가 신도님들과 이리 큰 원력을 낼 수있게 된 것은 모두가 은사스님 덕입니다.실천이 되지않으면 수행도 소용없다셨지요. 당신 스스로도 종단 개혁을 주도하셨던 분이고 우리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자이기도 하셨구요. 엄하면서도 신도님들에게나 제자들에게는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한없이 이해하고 베풀어주시던 큰 어른이셨습니다. ”
스승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가르침은 베풀면서 살라는 말이었다.
혜자스님의 은사는 열반하신 청담 큰스님(1902-1971). 혜자스님이 열네살 코흘리개 어린아이로 출가할 당시 스승은 종단 큰 어른으로서 오늘날 조계종의 기강이 되는 비구 중심의 지엄한 종지와 청정수행의 종풍을 만들어내신 대덕大德 큰스님이셨다. 세납으로도 이미 환갑을 넘어 일상의 삶을 바라보는 눈조차 넉넉하게 갖고 계신 푸근한 분이기도 했다. 항일운동을 하던 중 만해선사와 용성스님의 얘기를 듣게되고 그로인해 불교를 알게 되면서 불법에 눈을 뜨게 되셨다는 스승 청담스님은 출가 연의이유가 되었던 자기실천을 평생 수행으로 삼다가 열반에 드셨다.
“ 스님 계신 도선사로 출가하겠다고 왔을 때가 내 나이 열네살인데 큰스님은 이미 환갑을 넘기셨거든. 속가로 치면 내가 손주뻘이지요. 더구나 작은댁 배에서 태어나 에미 정도 모르고 그저 엄한 큰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니 눈칫밥으로 커 온 티가 역력하지. 눈에는 또 세상 원망이 가득하지. 아무리 내가 감춘다해도 그 두루 깨우치신 큰스님 눈에 어린 내가 어떻게 보이셨겠어요. 그저 부처님 전 아니면 이 세상 아무 곳도 내 한 몸 편히 누울곳이 없다는 것을 아신거지. ”
세상 천덕꾸러기로 태어나 원망심으로 가득찼던 어린 아이가 큰스님을 만나 부처님 법을 배우면서 사랑받는 아이로 커갈 수있었다. 어딜 가도 꼭 옆에 데리고 다니셨던 큰스님. 그러나 공부하는데 만큼은 늘 엄격하셨다.
“ 곤히 자는 어린애를 깨우시는 마음이 오죽 힘드셨겠어요. 그런데도 꼭 당신이 깨워서 법당에 앉히셨어요. 중이 시주밥 먹으면서 공부안하면 안된다고 새벽예불만은 꼭 하게 하셨지요. 나무도 하고 밥도 짓고.. 지금 생각하면 중으로 한평생을 살아가는 지혜와 습관을 다 당신 손으로 길들여 놓고 돌아가신거라 ”
사람들은 혜자스님을 보고 ‘천생 중’이란 표현으로 삶을 자리매김 해준다. 스님에게는 이 말이 한없이 고맙고 한편 경책이 된다. 다시 태어나도 출가승이 되고싶다는 혜자스님.
철들면서부터는 어떻게하는 것이 제대로 된 중노릇인지, 내가 부처님 법을 제대로 배우고 있는 것인지 늘 앉은자리가 불안했었다. 이를 스승은 또한 말없이 알게 하셨다.
“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계실 땐데 내가 시자를 보고 있었거든요. 한 노보살이 스님 드시라고 떡을 들고 오신거야. 큰스님이 일을 보시길래 그냥 놓고 돌아가시게 했지요. 그리고 다른 일을 보고 오니까 탁자 위에 빈 접시만 있는거라. 직원들이 웬 떡이냐고 먹어버린거지. 이거 낭패다 싶어 고민하다가 떡이 왔다는 말씀을 못드렸어요. 근데 며칠 후 그 노보살이 스님을 찾아오셨어 그리고는 시자스님께 전해드린 떡은 잘 드셨냐고 인사를 건내더라고. 난 말도 못하고 당황스러웠지. 근데 스님이 내 얼굴과 노보살님 얼굴 한번 보시더니 대뜸‘아하, 꿀떡입디다.’하시며 잘먹었다는 인사를 하시는 거예요. 어찌나 감사하고 민망하던지.... ”
노보살님은 너무나 흡족해하며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 날의 일은 혜자스님에게 두고두고 마음 법문이 되었다. 물론 제자의 불편함을 너그럽게 품어주시는 스승의 넉넉한 마음때문이기도 했지만 보시지도 못한 떡에 대해 크게 잘먹었다고 감사해하며 칭찬까지 하신 것은 오직 노보살님의 마음을 편케 해드리려는 순간의 방편이자 최고의 지혜였다. 그것은 늘 베풀면서 살라는 말씀의 여법한 실천이시기도 했다. 남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마음. 바로 중생제도 아니겠는가. 그때 깨달은 마음은 지금도 스님으로서 신도들을 대할 때 커다란 힘이 된다.
“ 절에 오기 전에 내 앞의 부처님들부터 잘모시라고 신도님들에게 당부합니다. 집안에는 남편 부처님, 딸 부처님, 시어머니 부처님..죄다 부처님이라 생각하고 정성을 다하면 그게 바로 복짓는 일이라고 말하지요. 내 앞에 사람들이 웃어야 내 마음도 편한거니까요. 그게 마음 보시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인욕이 제일이지요. ”
인욕수행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힘을 기른다는 것을 지난 세월을 통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스님이다. 또 원망심이 얼마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지도 너무 잘 알고 있다. 절에 들어와 살면서도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한 원망심을 내려놓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 일찍이 세상에 지친 열네살 어린아이에게 내려주신 이름이 지혜 혜惠자 자비로울 자慈 자예요. 마음 心자가 두 개나 들어간 의미있는 이름이지요. 이름 받을 때는 그저 공부 열심히하고 착하게 살라고 지어주신지 알았는데 요즘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마음에 담긴 업장을 소멸해주시는 이름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 옛말에 사람은 이름 값을 하고 산다지 않습니까. 맺히고 엉킨 마음을 자비행으로 풀어내서 눈밝은 공부인이 되라는 무언의 가르침이 곧 내 이름 두 자라고 생각합니다. ”
이제‘108 산사순례단’이 펼치는 야단법석은 2년째를 맞았다. 이 운수행각은 스님에게는 중생제도요 신도들에게는 자비행이다. 그러나 힘든 고행이라기보다 모두가 즐기는 행복한 야단법석이다. 회가 거듭될 수록 입소문이 나면서 이제 사람도 늘고 지나가는 자리 새로운 미담도 늘어났다.
“ 규모가 날로 커지면서 다들 어깨가 무거워지지만 마음만은 늘 처음 그대로입니다. 한달에 한번이라도 훌쩍 떠나 자연 앞에 설 수있으니 나도 좋고, 부처님 만나 신심 돋구고 무공해 반찬도 사고, 지역사람들 사는 모습보니 자연스런 국토순례요, 같이 어우러지며 좋은 것은 좋다 칭찬도 해주고 보시도 해주니 그 발걸음 하나하나가 다 자비행이요 보시공덕입니다. 또 집에 돌아와서는 자연 앞에서 쉬면서 복도 짓고 왔으니 하루 잘보냈다하며 스스로에게 흐뭇해하고..행복이 별거 있나요 마음이 흐뭇한게 행복이지요. ”
2006년 8월. 108명의 성지순례단을 이끌고 중국 법문사를 방문해 세계 9대불가사의 중 하나인 부처님 지골사리指骨舍利를 친견할 기회를 갖고 돌아오는 길,스치는 한 생각이 있어 108산사 성지순례단을 만들었다. 다음 달 9월 발대식을 갖고 첫 출발을 같이 한신도수는 1200여명. 2년간 수십차례 여러 곳 산사를 돌면서 늘어난 신도수는 무려 5천여명을 넘어섰다. 조용한 산사에 그 많은 인원이 합장을 하며 부처님 전으로 들어서는 모습은 늘 장관을 연출한다. 여러 마음이 함께 모여 하나의 불을 밝히는 순간이다. 부처님 앞에서 매월 새롭게 다져진 마음은 돌아오는 길, 늘 나눔으로 회향한다. 108산사 찾아가는 길은 설레임과 웃음이요 오는 길은 흐뭇한 미담이다. 일심광명불一心光明佛. 바로 부처님 마음인 것이다.
삶을 복을 짓는 밭이라하여 복전福田이라 했다. 복은 콩심는데 콩나고 팥 심는데 팥이 나듯 뿌린만큼 거두는게 제 이치다. 108산사순례를 통해 뿌린 복씨들이 복력이 되어 중생제도의 원력으로 올곧게 세상에 퍼질 수있도록 함께 발원해 본다.
글 박경희
취재·사진 우영철
선묵 혜자스님은 65년 청담스님을 은사로 삼각산 도선사에서 출가했다. 이후 통도사 강원을 거쳐 선방을 돌며 수선안거를 했으며 동국대 불교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 사서실장을 거쳐 현재 소청심사위원장을 맡고 계신다.
사회적으로는 청담학원 이사장, 혜명 복지원 이사장, 인드라만 생명공동체대표,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 공동대표, 풍경소리 대표, 불교신문 대표이사 등 많은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