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앞에 사연없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60고개 바라보며 그런대로 참 잘 살아냈다는 해인사 사랑과 희망봉사단’단장 김태경씨(58세).어린시절부터 고교 밴드부를 시작으로 음악 인생을 시작했던 그는 한때 대구를 중심으로 한 서부 경남권 나이트 클럽과 룸쌀롱에서 꽤나 인기를 끌던 유명 밴드 단원이었다.
“지금은 이빨빠진 호랑이가 다 됐지만 그때는 인기도 좋았어요. 머리도 안빠지고 제법 곱상했으니까요. 내 음악 듣는다고 일부러 업소를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았다니까.”
그렇게 호황을 누리던 그가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 자락에 터를 잡게된 것은 순전히 이곳 치인리의 인심 때문이다.
“ 당시 좋았지요. 요즘은 웰빙 바람이 불고 또 자가 운전자들이 많다보니 맥주 한두잔 정도로 끝나지만 옛날에는 놀러오면 밤새 술을 먹는 손님들이 많았거든요. 대구 밤무대서 한달 버는 돈보다 여기와서 며칠 버는 돈이 더 컸으니까 말 다했지. 게다가 대부분 돈이 돌면 동네 인심이 사
나워지기 마련인데 여기 사람들은 절 밑에 살아서 그런지 인심도 좋더라고.”
새마을 운동과 무역으로 보릿고개를 넘기고 우리 경제가 호황으로 들어서기 시작했을 무렵인 지난 70년대, 사람들의 지갑에 여유가 생기고 농한기다 단풍 철이다 철따라 관광지를 찾는 행락객들도 많아졌다.더구나 해인사는 워낙 큰절이다보니 전국규모의 행사가 많아 명찰대찰을 도는 순례객들까지 붐벼서 당시 사하촌의 밤은 늘 불야성을 이루었고 신부락으로 불리는 상가는 흥청거리는 관광객들로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산골 오지에서의 밤시간이 낯설어서였을까. 밤을 여흥으로 보내는 사람들도 유난히 많았던 곳이 또한 가야산 자락이었다.
그렇게 취객들의 흥을 돋구는 노래 반주자로 때론 가수로 대구와 가야산을 바삐 오가기를 몇해. 행락철로 바쁠 때는 며칠씩 여관 잠을 자며 이 곳 사람들과 어울리니 어느새 정이 들었다. 그렇게서 옮기게 된삶 터. 때마침 갓 결혼해 아내가 첫 아이를 임신한 것도 대구를 떠나 인심좋은 이곳에서 생활의 안정을 찾는 이유가 됐다.
80년대 초 가야산에 들어 온 그는 이 곳의 나이트클럽을 인수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게되었다.연일 쏟아지는 관광객들이 풀어놓는 돈도 돈이지만 시간이 제한된 남의 무대에서 못다 부른노래들을 맘껏 부를 수 있었다.
“ 난 원래 술 한잔도 잘 못해요. 그런 사람이 그저 음악이 좋아 내가 설 무대 하나 갖겠다는 욕심으로 유흥업소를 하게 된 거지요. 한 때는 내 음악을 듣겠다고 이곳까지 찾아오는 팬들도 꽤있었는데.....”
그러나 무대인의 인기는 물거품같다고 했던가. 나이가 들면서 그의 무대도 빛을 다하고 그저 평범한 시골 아저씨로 노래방 주인으로 나이가 들어갔다. 업친데 덥친격으로 오십고개를 바라보며찾아온 IMF 한파는 가야산까지 파고들어 그나마 노래방도 외지 손님보다는 동네 식구들로 자리가 채워지기 일쑤였다.
“ 돈버는 재미도 없어지고 나를 찾는 사람도 없어지니까 무대에 서도 흥이 없어지는거라. 그러다가 우연히 뜻맞는 동지를 만났지 ”
같은 동네서 여관업을 하며 이웃하고 지내던 최해만씨(55. 대웅장 운영). 젊어 한 때 가수가 꿈이었다는 그는 음반까지 내려고 도시로 뛰어다니다 이제는 꿈을 접은 음악인이었다. 한 때 경남노래자랑에서 금상까지 수상한 실력을 갖췄으니 노래하는 낙을 감추고 사는 것이 힘들긴 둘 다 마찬가지였다. 이런 두 사람이 우연히 밴드를 만들자는데 합의를 봤다. 노래도 하고 봉사도하는 밴드 봉사단을 만들자는 것. 둘은 아내들의 눈치를 봐가며 천만원이나 되는 은행 빚까지 얻었다. 악기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물론 중고 악기지만 건반에 드럼에 기타며 앰프까지 제법 구색이 맞춰졌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가수였다.
둘은 저녁마다 태경씨의 노래방 카운터를 지키고 앉아 놀러 온 인근 주민들의 노랫 소리에 귀를 기울 이며 나름대로 점수를 매겨갔다. 그러다가 합격점에 이르면 급한 마음에 손님 방을 찾아들기를 수 십번.이렇게 발굴된 가수들과 함께 드디어 지난 2003년 12월, ‘해인사 사랑과 희망봉사단’이라는 이름으로 7인조 밴드가 결성됐다. 건반과 대표가수 겸 노래 지도는 해만씨가 맡고 리드기타와 드럼은 태경씨가 맡았다. 여자 가수도 구색을 맞춰 이미자 노래를 구성지게 잘하는 진주보살 우득복 씨 (전직 간호사 출신. 해인사 종합접수실 천도제 접수 근무)를 비롯해서 흥겨
운 디스코 뽕짝을 잘하는 전연순씨(해인사 홍보관 판매팀장). 민요가수인 예순 한 살의 산책로 보살님부터 노래방을 운영하는 처녀보살. 미용실하는 여사장님까지 해인사 자락에 등을 대고 사는 사하촌과 인근 가야면에 명가수들이 죄다 모였다. 너나없이 음악이 좋아 함께 한 사람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퇴근 길은 자연스레 연습시간이 되었다. 연습장은 해만씨가 운영하는 식당 한 켠이다. 방음시설도 없는 연습실에서 손님들이 다가고 없는 밤을 이용하다보니 고된 일과를 마치고 잠을 청하는 동네사람들에게는 여간 고통이 아니었다. 그래도 평소 쌓인 정이 있어 고맙게 참아주는 인내가 또한 정겨웠다.
2004년 4월28일. 해인사 성보박물관 앞 뜰에서 역사적인 첫 공연을 가졌다. 관객은 가야산으로 봄나들 이를 나온 행락객들. 거리 공연이었지만 지금도 그때의 뿌듯함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없었다. 그로부터 542년. 지금까지 80회가 넘는 자선 공연을 했다. 한센병 요양원을 비롯해서 거창 양로원, 장애인 복지관 등 해인사 주변 무의탁 복지시설과 요양병원은 죄다 한번 이상 찾아가 신명나는 노래로 시린 가슴을 안았다.
\"치매 노인들이 모인 요양원을 방문 할 때였어요. 저마다 무표정하게 앉아있는 분들 앞이라 반응이 없으니 공연하기가 참 힘들었지요. 근데 한참을 노래하다 아래를 보니까 죽은 듯 앉아있는 노인들의 발가락이 리듬을 타고 움직이 더라구요. 그때 울컥한 마음이라니..”태경씨 옆에서 말을 거드는 가수 해만씨다.
“ 노인들이 맘이 약해지니까 건강 염려증이 생겨서 자꾸 아프다고 호소하잖아요. 근데 우리가 한번 왔다가면 한달간은 아프다는 사람이 없데요.”태경씨의 자랑도 만만치 않다.
“ 봉사를 한다고 가긴 갔지만 처음 한센병 환자들을 위문하러 갔을 때는 같이 어울리는 게 쉽지 않았어요. 또 그분들도 워낙 닫힌 마음이어서인지 음악이 흘러도 힐끗 쳐다보고 지날 뿐 다가오질 않더라구요. 그러나 이제는 누구보다 신을 내며 함께 노래부르고 춤을 춥니다. 몇차례 만
나면서 한 식구가 됐어요”노래 잘한다는 소리에는 그저 수줍게 웃기만 했던 가수 우득복씨도
봉사갔던 얘기를 하니 금새 끼여들며 신을낸다. 이제는 공연 얘기보다 관객들의 반응에 더 많이 신명이 난다는 단원들. 부르고 싶은 노래도 맘껏 부르고 그 어느 무대보다 뜨거운 관객들의 사랑이 있으니 단원들 모두 공연은 힘들기보다 오히려 큰 기쁨이라고 했다.
지난 10월 14일. 또 다른 자선공연이 있었다. 지난 95년 고국을 찾아 영구 귀국해 온사할린 강제 징집자 출신 노인들을 모시고 경로 위안 잔치가 있던 날. 해만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대웅장 식당을 행사장으로 내놨고, 해인사 주지 선각스님은 격려금을 내려 주셨다. 치인리 10번지의 몇
몇 사하촌 사람들은 후원회를 만들어 경비를 추렴했고 음식도 함께 만들었다. 음악으로 함께하는 해인사와 사하촌 사람들. 그 시작을 만든 것은 태경씨와 해만씨의 음악 열정. 누가봐도 흐뭇한 제2의 무대 인생이 된 셈이다.
“ 처음에는 노는니 뭐하나 노래도 하고 좋은일도 하자 그저 막연하게 시작했는데 이제는 정말 음악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노래를 듣고 아픈 분들, 외로운 분들이 저렇게 좋아하고 때론 의사 선생님보다 더 좋은 치료라고 하니 큰 보람이지요. ”
음악 봉사를 하고부터는 부르는 곳없어도 갈 곳이 많아졌다. 양로원, 고아원, 요양병원...그러다보니 요즘 다시 밖으로 나도는 시간이 많아져 집 안일에 소홀해졌다는 태경씨
.더구나 지난 5개월 전부터 거동이 불편해지신 어머니를 모시고 살다보니 마음이 영 편치않다.
“ 아픈 노인들 위로하며 다니는 사람이 아픈 내 어머니를 자꾸 혼자 놔두고 다녀야하니 모순 아닙니까. 때론 내가 잘하고 있는건가 자꾸 뒤가 돌아 보여요. ”
그러다보니 자연 아내의 눈치도 보게됐다. 태경씨의 아내는 해인사에서 기와불사를 맡고있는 김영자 보살님(52). 하루종일 밖에서 떨며 절 일을 보고 내려와 다시 아픈 시어머니를 모신다는게 쉽지않지만 아내는 싫다 내색없이 묵묵히 집안 살림을 맡아준다.
“ 고맙지. 혼자서 변도 못가릴 정도로 아픈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데도 불평 한마디를 안해요. 또 내가 봉사 다닌다고 집을 비워도 일절 말이 없고. 나이들어 돌아보니 내가 이나마 흥을 잊지않고 산 것은 다 집사람 덕인 것같아요.”
그러나 영자씨는 영자씨대로 남편에게 큰 고마움이 많다.
“ 몇 년전 내가 당뇨로 거의 죽다 살았거든요. 병원에서 죽는 날까지 받을 정도였고 몸무게는 36키로를 나가니 뼈가죽만 남아 너무 챙피해서 목욕탕도 못갔어요. 근데 하루도 마다않고 여관잡아 목욕시키는 것까지 내 병수발을 애들 아빠가 다 했어요. 덕분에 이제는 나도 건강을 되찾았
으니 그간 아프다고 소홀했던 며느리 노릇 좀 해야 않겠어요. ”
시집와서 지금까지 먹고사느라고 바빠 못챙기다가 불과 다섯달 전부터 수발드는 며느리라며 한사코취재를 거절하는 영자씨를 달래 마주 앉아 남편 태경씨 얘기를 들었다.
“ 내 남편 다른 것은 몰라도 마음 하나는 착한 사람이예요. 옛날부터 남 어려운 것보면 자기 주머니에 있는 마지막 차비까지 다 털어주고 집에 걸어 오는 사람이지요. 살림하는 여자 입장에서는 그리 좋지는 않지만 워낙 착한 천성 탓인데 또 그거 하나보고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하며 여지껏 살았는데 이제와서 뭐라고 하겠어요. 다 자기 업이지요. 난 또 내 업대로 사는거고.. ”
대구로 놀러왔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란 소리에 맘이 쏠려 결혼까지 하게됐다는 아내 영자씨. 그녀 역시도봉사다니는 남편이 싫지만은 않다.
“ 인생 뭐있나요. 부모도 못막은 음악인데 내가 뭔 수로 막아서요. 또 한 평생 그렇게 무대가 좋아 살아 온 사람 이고 또 많지 않아도 그걸로 한때는 딸 셋을 다키웠는데요... 이젠 남 돕고 산다는데 그나마 다행이지요 각자 즐겁게 살면 돼요.”
말로는 오십 넘은 부부인연 이제는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라고는 하지만 태경씨나 영자씨나 서로 착한 사람들이라고 믿어주는 부부애가 또한 곱다. 어쩜이런 믿음이 오늘의 아름다운 밴드 해인사 사랑과희망봉사단’을 만든 힘이 아니겠는가 싶다.
죽어가는 몸을 다시 일으켜 건강을 되찾게 해 준 남편에 대한 고마움을 간직한 아내. 아내 아니라도 힘든 사람 앞에서는 오금을 못편다는 남편 태경씨. 또 태경씨를 형님이라 따르는 동네
음악 짝궁 해만씨까지. 태경씨의 육십인생 이만하면 행복 만점. 아름다운 황혼이다.
취재 . 글 나눔我 사진 우영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