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나러 가겠다고 했다. 어렵지 않게 승낙은 받았지만 막상 약속시간이 가까워지니 왠지 편치가 않았다. 대비주 백만 독讀 원력을 세우고 주말마다 절을 집삼아 정진을 하고 있다하니, 괜한 긴장이 된다. 대비주 독송을 오래 하다보면 신통력은 물론이고 불망념不忘念 경지에 까지 이른다고 하는데, 그와 함께앉아 취재랍시고 하고있는 내 모습은 과연 어떻게 비춰질까?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는 이끌림에 따라갈 수밖에 없는, 흔치않은 경험의 소유자라면 그의 삶이남의 일 같지만은 않을 것이다. 해인사 백련암을 처음 오르면서 초행길 같지가 않아 자꾸만 뒤돌아보고 주변을 살폈다는 도륜道輪 이해영 불자, 그는 영남대학교 상경대학 경영학부 교수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해인사 산내암자 길상암으로 대불련 수련회를 갔다. 삼 천배를 하면 가야산 호랑이 성철스님을 친견할 수 있다는 소문에 밤새워 삼천배를 끝냈다.
-겨우 대학 1학년이었는데 그동안 절을 자주 하셨나보지요. 1080배도 아니고 단숨에 그 삼 천배를 ...
“막내고모 결혼식에도 불참하고 따라간 수련회인데다 성철스님을 뵐 수 있다는 기대로 처음 하는 삼 천배였지만, 힘든 줄 모르고 했지요. 그 때야 마음이 문제지 무엇이든 한다는 마음만 있다면 못할게 없는 나이 아니겠어요?”
하긴 혈기 왕성한 20살이니 짧은 여름밤이라 해도 삼 천배정도야 하려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하룻밤이 아닌가. 그건 그렇고, 길상암에서 성철스님을 뵈
러가는 산길이 그렇게 낯익을 수가 없고 마치 어제나 그제 다녀간 길 같더란다. 그렇게 해서 성철스님께서 내려주신 화두는‘마삼근麻三斤’이었다.
77학번인 그의 대학시절은 혼란스러움의 연속이었다. 그는 매년 방학이면 공부를 핑계로 절집에서 지냈는데, 남들이 하는 고시공부는 뒷전이고 화두를 잡고 앉았거나 능엄경을 읽고 금강경 사경을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해인사 큰절법당 바깥에서 성철스님의 결제법문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는데, 갑자기 그때를 회상하던 그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나며 탄성이 튀어나온다.
“ 와!! 정말 그때 일어난 환희심, 구도심은 말로 설명할수가 없어요. 당장 지족암으로 올라가 일타스님 붙잡고 나도 저렇게 살고 싶으니 출가하겠다고 했지요”
-부처님 인연을 참 일찍 지으셨군요?-
“그 얘기 하자면 또 깁니다. 그래도 제가 복이 많은 거죠. 출가하겠다는 제 말에 일타스님께서너는 세상에서 할일이 많다하시며 글씨를 한 폭 써 주시고 나중에 각시 주라고 하셨지요.”
10.26사태로 휴학 중일 때는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스님을 뵈었고, 송광사에서는 구산스님을, 그리고 미국에서는 고성스님과의 인연 등 출가의 길대신 선지식 친견이 이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도‘마삼근’을 놓지 못하고, 주중에는 공부에 매달리고 일요일이면 빠지지 않고 워싱턴 DC근처 한국 절을 찾으며 5년 만에 메릴랜드 주립대학에서 국가정책학으로 박사 1호가 되었다.
귀국하자마자 해인사 동안거 해제일에 맞춰 가야산으로 달려가면서 공부 끝난 수좌스님을 자동차로 모실 수 있기를 소망했다. 마침 바랑지고 나오는 세분의 스님을 태우고 대구로 나오는 길에\'이 시대 최고의 도인스님은 누구십니까?’물었더니 근일스님을 찾아가라 하더란다. 그 길로 고운사로 내쳐 달려가 근일스님께 삼배올린 후 오늘날까지 매일아침 佛, 法,僧, 三寶께 삼배를, 그리고 근일스님의 강녕康寧을 위해 3배 올리는 것을 빠뜨리지 않고 있다.
그날 밤 폭포수같이 쏟아진 스님의 가르침은 그를 한 달에 한번 철야정진하게 했고 공부의 끈을 이어가게 했다. 그의 생동감 넘치는 표현과 화법에 나는 그의 삶을 열정이라는 바코드로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 남보다 앞서겠다고 죽어라 공부에만 매달리는 우등생이 아니라 이제는 자신의 내면을 따스하게 품어낼줄 아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다.
누구나 살면서 자신을 놓아버리고 싶을 만큼 힘든시기는 있기 마련이다. 그 역시도 깨달음을 향한 구도심과 학문에 대한 열정은 여전했지만 보따리장사라 불리는 시간강사 시절을 어렵게 보냈다. 모든게 성에 차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대비주 백만 독을 하리라는 원력을 그때부터 세우셨나요?-
“그렇죠.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로 해서 방황의 시기가 있어서 우연히 경산 환성사를 찾았는데, 그곳 산내암자인 성전암에서 십육나한님을 만났습니다. 나한전도 제게 낯설지가 않았죠, 영주 성혈사에 근일스님께서 주석하시는 동안 성혈사를 드나들며 나한님을 자주 만났으니까요. 그런데 무슨 인연인지 성전암에서 기도하시던 스님께서 하루 백독의 대비주 독송을 권하셨고 공부도 안 되던참이라 그냥 따라했지요. 사실 처음에는 대비주를 외지도 못했습니다만 한 독 한 독 하는 동안 나만의 삶을 살아왔구나 하는 참회의 눈물을 흘렸고 그해 여름방학 내내 성전암 나한님 곁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경산 환성사 성전암은 자동차가 올라가지 못한다. 환성사에서부터 산길을 따라 숨 가쁘게 한참을 걸었는데도 앞으로 500m라는 이정표가 거짓말을 하는듯하다. 왜 이다지 멀게 느껴질까? 초행길이어서인지 더욱 조바심이 났다.
숨을 고르고 그를 따라 법당으로 들어가 나한님께 예를 올리고 고개를 드는데 <공양물은 금방 내립니다. 다람쥐 때문에..> 라는 안내가 보인다. 큭! 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만큼 인적이 드물다.
하루 평균 내방객이 1.1명이라며 웃는 그의 모습에서 조용해서 오히려 좋다는 내색을 읽을 수 있다.
공양물을 지게로 져서 옮기면 우선 법당과 산신각 청소를 하고 우물을 친다. 그리고는 밥을 지어 공양을 올리고 나면 대비주와 법화경 독송을 하는데 밤이 되면 쏟아지는 별들을 보며 천복을 받았음이 틀림없다고 행복해 한단다. <제 아무리 잘난 영화래 봤자/별다섯 개가 고작인데/우리들 머리위엔 수 천 수만의 별이 떴다>라는 시 한 구절이 문득 스쳐간다.
-성전암에서의 1박2일은 일상을 떠난 평화로움이기도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고 집중하는 치열한 시간이기도 할 것 같은데 일상생활에 지혜랄까요? 도움을 주나요?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하고, 겸손과 하심을 그리고 보살도 실천마음을 일어나게 하고, 무엇보다 자비심이 생겨난 거지요. 이 모든 것이 부처님 빽 입니다.”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이라 했던가? 도견 이해영 교수는 지금서 있는 그 자리에서 굳이 불교를 불교라 이름하지 않아도 불교적 삶을 살아갈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불교라 이름붙이면 멀어질 뿐이란다. 자신이 맡아 가르치는 아이들의 수업에 최선을다하는 것이 불교이며, 입고있는 옷이 단정하여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 것도 불교이며, 지금까지 배운 것을 착실히 실천해가는 것도 불교라고.
이렇게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과연 뱃속 저 아래에서부터 뭉클뭉클 올라오는 마음의 탄식을 들어본 적이 언제였던가를 더듬어 본다. 손놓고 우는 것밖엔 방법이 없는 애통한 시간은 제 마음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폐허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시간이라지만 또한 그 시간은 마음 밭을 일궈내는 깊은 기도의 시간이기도 하리라. 어쩌면 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렇게 애통해보기도 하고 참회의 눈물을 흘려보기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고 나면 나도 그처럼 말할 수 있겠지.‘하늘이 내린 복에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라고.
사진·글 최현태
최현태님은 현재 대구 BBS-R, \'무명을 밝히고\'의 진행자인 아나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