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공예실에는 화려한 빛깔에 그 모양도 아름다운 삼채 자기화반 옥화와 새모양 칠보촛대가있다. 부처님께 꽃 공양과 등 공양을 하는 장엄물莊嚴物의 하나로써 옥과 칠보를 가지고 만든 것이다.옥화는 삼채자기화반 위에 놓여 있는데 꽃잎은 물론 술까지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중국풍을 지니고 있으나『해인사지海印寺誌』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명종明宗 15년에 옥을 갈아서 가화假花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칠보촛대는 2마리의 새가 한 쌍으로 기암괴석을 밟고 서 있는 모습으로 머리에는 화반을 이루고있다. 『해인사지』에 의하면 선조宣祖가 사명대사에게 하사한 것이라 한다.
삼채자기화반 옥화와 새모양 칠보촛대는 모두 사명대사의 유품으로 해인사海印寺에 전해내려 오고 있는 귀중한 성보聖寶이다.
이렇듯 해인사에는 사명대사와 관련된 성보들이 많다.
대개가 당대 임금으로부터 받은 하사품들로 당시 국가적으로 사명대사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 알수있다.
해인사의 산내 암자 중 하나인 홍제암도 사명대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찰이다.
홍제암은 광해군光海君 6년 혜구대사慧球大師가 사명대사의 초상을 모시기 위해 건립하였다. 홍제암이라는 이름은 사명대사 입적 후 광해군이 내린‘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는 시호에서따온 것으로 현재 보물 13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명대사 유정惟政은 12세에 출가하여 1561년(명종 16년) 승과에 합격하고 직지사直指寺 주지에이른 당대 해인사 큰스님 으로 청허淸虛 휴정休靜 스님의 제자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임진왜란 때 의승군義僧軍을 이끌고 왜적을 물리친 스님으로 더 많이 알려져있다.
선조 27년 4월 사명대사는 울산 서생포西生浦에 있던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진중으로 들어갔다. 왜적의 군사들이 몇 리에 걸쳐 줄지어 섰고 창과 칼이 숲을 이룬 속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없이 자연스럽게 담소談笑하였다.
“당신네 나라에 보배가 많지요?”라는 청정의 물음에 사명대사는 서슴없이 우리나라에는 별달리 보배가 없고 오로지 장군의 머리를 보배로 여긴다”고 대답했다. 의아해 하며 \"그게 무슨 말이냐\"라는 청정의 반문에 대사는“우리나라에서는 1천근의 황금과 1만 호의 식읍食邑을 현상금으
로 내걸고 장군의 머리를 구하니 보배가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콧대 높은 청정도 한풀기가 꺾여 크게 웃고 말았다. 이 일화를 통해 사명대사의 성품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선조 28년, 52세의 사명대사는 상소문을 올린 뒤 의승병을 해산하고 가야산으로 들어왔다. 선조 37년,일본 관백關白 원가강源家康이 정권을 장악하고 나서 우리나라에 수신사修信使를 보내줄 것을 요구해왔을 때 임금은 사명대사에게 교지를 내려“일본으로 가서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오라”고 당부하였다. 이에 스님은 일본 도성都城으로 들어가 관백 덕천가강을 만나 화친和親을 맺은 뒤 일본에 잡혀갔던 동포 3천여 명을 데리고 이듬해 귀국하여 임금에게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은 대사에게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를 가하고 3대를 추종했으나 대사는 도로 해인사로 들어왔다. 선조 40년 2월 임금의 승하 소식을 듣고 급히 상경하여 배곡拜哭하고 난 후 병이 악화되어 해인사로 들어와 요양하다가 광해군 2년 해인사 홍제암에서 입적하였다.
입적 후 스님을 모시는 부도와 일대기를 기록한 석장비를 남겼으니 광해군 4년『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비문을 적은것으로 이 또한 보물 1301호로 지정돼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