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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세 번, 행자 세 번 / 법 준 스님 ┃ 해인사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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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박경희 2008년 10월 320호
법준스님 몇 해동안 별 말없이 착실하게 출근하던 막내아들이 어느날 아침, 불쑥 또 다시 출가하겠다며 아침 인사를 대신했다. 칠순을 앞 둔 어머니는 차마 내 뜻을 받아들일 수없어 끝내 돌아앉았고 나는 어머니의 굽은 등을 향해 마지막 절을 올렸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얼마 안된 시간이라 몸도 마음도 약해졌던 어머니. 그러나 더 늦으면 영영 공부할 기회조차 놓칠 것 같은 불안감에 눈에 흙이 들어가도 중만은 안된다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섰다. 내가 출가를 이유로 집을 나선 것이 처음이 아니다보니 어머니도 더 이상 말릴 엄두를 못내셨다. 어쩌면 예전처럼 당신을 대신해 아들을 야단치고 마음을 꺾어 놓을 남편조차 없는 현실 앞에 당신의 마음을 포기한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날 어머니는 그렇듯 돌아앉아 나를 보내셨다.
훗날 들은 얘기지만 어머니는 그 날 일로 얼굴이 돌아가는 고통을 겪으셨고 형님들은 현실에 무책임한 나를 원망하며 집안에 스님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수치라는 생각으로 오랜 시간 마음 문을 닫고 사셨다고 한다. 그 때만해도 연세드신 분들은 기복신앙 이상으로 불교를 알지 못했고 당연 절집에 대한 이해도 깊지 못했다. 더구나 어머니가 다니던 작은 암자에서 실제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는 스님을 모신터라 절은 그저 고아나 가난한 집 자손들이 입 하나 덜라고 들어와 스님이 되는 곳 쯤으로 생각하고 계셨던 터였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웬만큼 체면을 지키며 여유있게 살아가는 집안에서 스님이 나온다는 것은 당시로선 커다란 수치였다. 실제 아버님 생전에는 이런 생각들이 너무 완고해 이십대 중반, 나의 첫 출가는 실패로 끝났었다.
나이 스물여덟. 이렇듯 가족들의 절망을 딛고 나는 그 길로 지리산 벽송사로 향했다. 세 번째 출가였다. 당시 나와 같이 들어 온 행자들은 두명만 빼고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비슷한 늦깎기 행자들이었다. 저마다 간절함이 있어 나이들어 찾아든 절집이기에 힘든 행자생활이지만 잘들 참아냈다. 나 또한 긴장감이 더해서인지 어려운 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지났다.
예나 지금이나 행자 생활은 하심과 인욕 수행을 기본으로 한다. 대부분 행자들은 오후 잠시하는 두시간 정도의 초발심자경문 강의를 빼놓고는 대부분 잡다한 허드렛일로 하루를 보내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니 절실하게 불타는 마음으로 출가를 결심했던 사람들에게 잡일 분주한 행자실의 모습은 늘 성에 안차고 공부욕심으로 급한 마음에 조급증만 늘어나기 마련이다. 더구나 대학까지 나오고 어느 정도 불교 공부며 선수행의 맛까지 알고 출가한 늦깍기 행자들의 경우 행자실의 낡은 규칙과 단순 반복되는 일상은 심각한 끄달림을 갖게 해 자칫 공부 길로 들어서기도 전에 맥이 빠지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나 또한 그런 마음때문에 두 번째 출가를 실패하고 산문을 나갔고 이후 나의 경솔함에 대해 참회가 깊었던 터라 세 번째 행자시절은 비교적 시비분별심을 내려놓고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보낼 수있었다. 행자 생활이란 것이 단순하고 무의미하게 시간만 보내는 것 같아도 돌아보면 그 시간 속에서 수행자로서 기본 자세인 보시와 인욕을 배우고 이를 통해 훗날 용맹정진하며 대중생활을 해나가는데 필요한 기본 근기를 심어주니 모든 것은 지나봐야 그 소중함을 아는 듯싶다.
당시 벽송사는 깊은 산중에 있어 농사도 직접 짓고 나무도 해가며 살림을 살던 곳이었다. 그 많은 일이 대부분 행자들에게 떨어진다. 끝도 없이 고된 일. 땔감을 위해 나무 짐을 지느라 어깨에 든 피멍은 마를 날이 없었고 가스레인지도 겨우 한 대가 있어 수시로 40킬로가 넘는 가스통을 지고 산길을 타야했다. 대중들이 일년 먹을 한 해 양식 농사도 고스란히 행자들의 몫이다. 하루는 물길이 막혀 아래 논에 물이 닿질 않았다. 맨 몸으로 논두렁을 헤치고 들어가 구멍을 내는 일을 맡았다. 자칫 막힌 물꼬가 한꺼번에 터지면 다칠 위험도 있는 상황이었다. 처음 해 본 일이기도 했고 수로 속 어둠이 무섭기도 했다. 그래도 이 과정을 지나야 그나마 부처님 법이라도 제대로 만난다는 생각에 뭐든 가리지않고 일을 해나갔다. 행자과정을 잘 마치고 선방에 앉을 생각만하면 오히려 신심이 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수계식을 얼마 안
남기고 함께 고생하던 행자 하나가 내쫓김을 당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인 배행자였다. 고아로 자란 탓인지 마음도 여리고 외로움도 깊던 행자였다. 힘들 때마다 몰래 마을로 내려와 혼자 술을 마시곤 하는 그의 행동이 결국 문제가 됐다. 그 후 난 무사히 수계를 받고 곧바로 봉암사 선방에 꼬박 3년 방부를 들였고 그 행자는 벽송사로 재출가를 해서 다시 행자생활을 시작하다 역시 술 때문에 또 다시 절을 나가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 업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계율을 어겼으니 경책이 마땅할 수있겠으나 힘든 시절 같이 고생한 행자이다보니 그 이의 일은 지금도 가끔 떠올라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제 법납 22년. 수계를 받은 이후 초발심 그대로 지금껏 선방으로만 돌던 내가 최근 해인사 원주실로 내려왔다. 원주란 행자들을 교육하며 절 살림을 챙겨야하는 자리다보니 아무래도 행자들 속내까지 하나하나 신경이 쓰인다. 더구나 산문을 들락거리며 행자 생활만도 무려 세차례나 치러냈던 나이기에 내 앞의 행자들이 나처럼 힘든 과정을 겪을까싶어 때론 익숙치도 않은 잔소리를 해대며 불필요한 정을 쏟게된다.
최근 내 앞에 행자 한명이 산문을 나갔다. 출가 전부터 불교 공부에 심취해있어 경전에 대한 이해도 깊고 출가심 또한 남달랐던 행자였다. 공교롭게 극심한 집안 반대에 부딪친 사연하며 견성성불에 대한 의지하며 모든 출가 배경이 나와 비슷해 남다른 정을 주곤 했었다. 그 행자 또한 나를 출가 은사로 삼고 싶다는 말을 전해오면서 나를 기쁘게했던 행자였다.
나갔다는 소리에 처음에는 인간적 섭섭함과 안타까움이 들더니 그 갈등 속에 스치는 순간 한 생각이 있었다. 바로 그 옛날 내 모습이었다. 아하.. 소리가 절로나는 깨달음이 생기고 잠시 잊었던 두차례 실패한 출가내력에 대해 깊은 참회를 할 수있었다.
나의 첫 번째 출가는 제대를 마친 그 해 이뤄졌다.
지금의 임행자처럼 입대 전 나는 이미 대학생 불교 동아리를 통해 불교 경전에 대한 많은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군대에서도 사병법우회 회장으로 군법당을 드나들며 반은 군종병처럼 지내다보니 신심에 불이 붙고 불교에 대한 깊이도 더해졌다. 나의 출가 결심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들께 출가 결심을 말씀드렸다. 당연히 커다란 반대에 부딪쳤고 나는 어쩔 수없이 몰래 집을 빠져와야했다.
첫 출가 인연은 해인사였다. 대학도 채 마치기 전에 제대 하자마자 머리를 깍고 스님이 되겠다고 찾아들었으니 그 때의 절박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제대로 된 불교 공부를 원없이 해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를 의지하며 행자시절을 보내고 있을 즈음, 새벽 어두운 법당 앞에서 느닷없이 부모님과 마주치게 되었다. 새벽 예불을 위해 행자들끼리 모여 차수(손을 가지런히 모아 배 앞에 놓고 움직여야하는 행자 예절 중 하나)를 하고 줄을 지어 법당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어떻게 아셨는지 내가 지나는 길목에서 부모님은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어둠이지만 나와 어머니의 눈이 마주쳤다. 철렁 내려앉는 나의 절망감과 찰나지만 내 마음을 파고들던 간절했던 어머니의 눈빛, 그리고 아버지의 노기 띈 표정들이 한 순간 빠르게 느껴지면서 난 더 이상 움직일 수없었다. 그리고 조용히 대열에서 빠져나왔다. 무섭게 나를 노려보시던 아버지
는 어느 틈엔가 벌써 저만치 앞장서서 산을 내려가고 계셨다. 한 겨울 산 중 눈밭이라 걷기도 힘든 그 길을 오직 아들을 찾겠다고 올라오신 부모님들이었다. 달도 기울어 어둠이 짙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발소리만으로도 마음을 읽어내릴 수있었다. 소리없이 뒤를 따라 산을 내려오는 나는 공부와 부모님, 두가지 다 거역할 수없는 절망과 처절함에 마음 둘 곳이 없었다.
그 날밤 산길은 왜 그리도 길었는지..돌아보면 그 당시 첫 출가는 생각만큼 간절함이 덜했던 듯싶어 두고 두고 부끄러움이 되었다. 공부를 하겠다고 떠났으면서도 부모를 따라 다시 산을 내려가던 그때의 못난 내 뒷모습이 오래도록 맘에 지폈다. 부모를 거역하고 집을 떠난 나는 누구이고 부모를 따라 일단 떠난 집으로 다시 들어간 나는 또 누구인지....그때의 참담함은 내 선택을 스스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남았다. 그리고 이어 삶은 누구도 대신할 수없는 것이라는 삶의 자기 결정권에 대한 새로운 각성에 눈을 뜨면서 언젠가는 꼭 다시 제대로 된 출가를 해야겠다는 결심만을 굳혔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이후 못다한 출가 수행자의 삶을 대신이라도 하듯 더욱 깊게 경전에 빠져들었다.
대부분 독학으로 이어지다보니 채워지지않는 그 무언가가 마음 한구석을 눌렀다. 그러던 중 육조단경을 공부해나가면서 나는 오직 참선 수행만이 나의 공부를 완성시켜줄 것이란 확신에 빠지게 되었다. 부처님 법이란 것이 결국 견성성불하자는 것이 아니던가. 생각이 이쯤 미치자 애써 잠재우던 나의 출가심은 다시 불이 붙고 이를 채우고자 산내 암자를 돌며 큰스님들 에게 법문을 듣고 개인적으로 경전을 배우는 시간들을 갖게 되었다. 또 거리를 지날 때는 걸망든 누더기 스님이라도 만나는 날이면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말 한마디 붙여보고 싶어 괜히 뒤를 따르고 주변을 맴돌았다. 어쩌다 길이라도 물어봐주면 그게 신이 나서 가던 길까지 접고 앞장서서 길안내를 도맡곤했다. 나도 저런 걸망을 매고 자유롭게 주류산천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에 스님들의 모습 하나하나가 그리부러울 수없었다. 각자의 마음에 들어있는 부처가 다
제각각이라고 하는 말이 있듯, 내 마음에 들어오신 부처님은 어쩌면 대자유인의 모습 그 자체가 아니었나 싶다. 출가는 전생연이라고 하지않던가. 그 스님들의 모습 속에 내 모습이 있는 듯 익숙한 반가움에 그리 따를 수 있었던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
대학을 졸업하고 막 직장 생활을 시작할 무렵 두 번째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이번엔 어느 누구도 나를 막아 설 수없을 만큼 제대로 된 공부를 해보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때 찾아간 곳이 청암사 수도암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큰스님들이 계신다해도 선방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가르침이 어렵고 어디나 행자 생활은 고되기 마련이다. 수도암에서도 허드렛일은 물론이고 원주실일까지 해내야하니 늘 공부는 저만치고 마음만 급해갔다. 행자 때는 누구나 하나라도 주워들을 욕심에 선방을 기웃거리게 된다. 그러다 아는 것을 만나면 그 기쁨에 재빨리 아는 척하며 스님들 사이에 끼여보지만 그건 큰 실수가 된다. 행자가 아는 척한다고 미운 털 박히기가 일쑤이니 고달픔 하나를 더 벌 뿐이다. 한번은 선방 앞을 지나는데 스님들이 “저게 뭐지..” 하며 선방에 걸린 증도가를 놓고 새기지를 못하고 있었다. 나는 행자라도 다 아는 걸 스님네들이
모르네 싶어 얼른 그 글을 새겨버렸다. 그 일로 아는 척하는 행자로 낙인이 찍혀 두고두고 괴롭힘을 당한 적도 있다. 지난 행자생활을 돌아보면 나는 나대로 스님들이 너무 무식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공부를 올곧게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를 잃었으니 결국 내 스스로 다시 산문을 내려오고마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돌아보면 모든게 내 허물로 남게되는 행자시절의 실패 내력이다. 최근 절을 나간 임행자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공부를 가르쳐주기는 커녕 고작 허드렛 일이나 시키고 아는 것을 나누고자하면 행자가 버릇없다 타박하기 일쑤고 .. 이런 환경에서는 마음먹은 공부를 하기 힘들다는 생각에서 그 역시도 다른 절을 찾아 떠났으니 그때 내 모습이나 지금 임행자의 모습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돌아보면 내 공부 욕심에 눈이 어두워 하심하지 못하고 인욕하지 않아 오늘날까지 현실을 불편하게 만드는 계기로 남았으니 이는 오래두고 나의 아상을 경책하는 공부 재료가 되어 지금까지 보이지않는 스승으로 그 시간을 기억하게한다.
이렇 듯 발심을 하고도 행자 옷을 세 번씩이나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며 어렵사리 공부인 대열에 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아직 견성했다는 한 소식을 접하기가 어려우니 사람 몸을 빌어도 부처님 법 만나기가 어렵고 법을 만나도 일도(一道)하기 더욱 어렵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무슨 뜻인 줄 이제야 조금 알 듯싶다.
더구나 견성성불하여 그 기쁨을 전하겠다던 출가 당시의 굳은 결심은 변함없지만 이를 받아주실 어머니는 이미 운명을 달리해 내 곁에 없으니 인간사 몸은 늘 마음을 기다려주질 못한다. 금년 정월, 어머니는 수를 다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49재를 치러내며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린 듯 그리 울었다. 그리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22년 전, 그리 모질게 떠났건만 아들이 아직도 한 소식을 전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과 죄스러움의 눈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