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치하에서 불교 대중화와 현대화를 통해 민족정신을 지켜내고자 했던 용성龍城 큰스님의 정신이 살아있는 서울 대각사大覺寺.스님은 해인사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인사가 채끝나기도 전에 어서 앉으라며 당신 가까이 오라하신다. 어찌나 반갑게 맞으시는지 해인사에 대한 추억담을 듣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 내가 해인사에서 10년을 살았지..아마 64년도부터 일거야..”
열여덟 어린나이, 학교를 채 마치기도 전에 절집에 들어와 고암대종사를 은사로 스님이 되었다. 부처님 법이 뭔지 알지 못했지만 절에 가면 큰사람이 된다는 어느 탁발승의 지나가는 말을 듣고 무작정 찾아간 곳이 해인사였다.
“ 나보고 스님상이라며 대사가 되면 크게 된다는거여..그래서 다른 스님네들처럼 우는 어머니 뒤로하고 머리를 깎았지. 근데 지금보니까 내가 그 스님에게 속은거여..”
말로는 속았다지만 호탕하게 웃으며 전해주시는 해인사 시절은 스님에게 가장 큰 자부심인 듯했다.
“ 아무 것도 생각이 안나. 그저 이 시기 내가 행복하다. 부처님 경전을 보게되니까..하고 한 자라도 더 알고싶은 마음에 글자 하나하나 옥편을 뒤져가며 공부했지. 한창 공부할 때는 하루에 한자漢字를 270자에서 300자까지 외웠어. 하루 4-5시간 이상 자 본적도 없고.. 공부머리가 따로 없거든 누가 더 집중하는가 안하는가의 문제여..”
노력하면 모두가 한 머리라고는 하지만 스님의 이력은 지금도 강원 학인스님들 사이에서 회자될 정도로 학업 능력이 뛰어났다. 워낙 집중력이 좋고 암기가 빠르다보니 나중에는 한번보면 그대로 사진을 찍듯 글자가 보였다고한다.
“ 한번 읽으면 책장을 덮어도 그대로 글자가 보여. 그래서 나중에 그랬잖아. 몇페이지 나에게 물어봐라. 그 사람은 책을 들고 나는 읽었지. 한번 딱보면 책이 눈에 베껴지는거여. 처음엔‘에이 거짓말’하며 안믿는거여. 그래서 어제 본 것을 그냥 줄줄 읽었지..그랬더니‘어어 진짜네..’하며 믿더라고..”이런 스님의 기이한 공부 행각은 어른 스님들께 전해졌고 당시 강주스님로 계셨던 지금의 총무원장 지관스님께 별도의 시험을 보게되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학업 수행능력평가같은 시험이었다. 결과는 합격. 강원 공부에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는 어른 스님들의 판단에 따라 스님은 1년을 월반하고 3년만에 강원을 졸업할 수있었다. 이는 지금도 해인사 강원 역사에 남는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 막 외운다고 되는게 아니여. 그냥 집중해서 한두번보면 그냥 외워지는거여. 그걸 굳이 표현하자면 환영같은거지. 환희각이라고도하고. 그런 나를 보고 어떤 사람은 식이 맑아서 그렇다고도 하지만 내 생각에는 집중력이야. 뭐든 하면 집중해야 돼. 옆에서 따귀를 때려도 물을 부어도 상관없어야 해. 요즘 입시생들 공부한다고 라디오 틀어놓고 음악들으며 밤새워 공부하잖아. 소용없어.
그게 공부가 되나..무조건 딱 한가지만 해야돼”
스님은 뭐든지 한번 시작하면 깊게 빠져버린다고 했다. 그림도 그랬다. 한때 그림에 심취하여 몇 년을 그림만 그리러 다니신 적이 있다고한다.
“ 한번은 제주도로 스케치를 하러갔어. 중문폭포에서 화선지를 펴놓고 수묵화를 그리는거야. 그런데 바람이 불어서 종이가 확 날아갔거든. 종이를 잡으려 시선을 따라가니 앞이 캄캄한거야. 저 너머 다리 위로는 버스가 불을 켜고 지나고..근데 나는 낮부터 그림을 그렸거든 해가 있던 그 기분으로 계속 그림을 그렸던거지. 실제는 밤인데 나는 밤이 아니거야. 모두 내 경험인데 환영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고 모두 집중력이야 빠져버리는 것말야”
이런 스님의 집중력은 참선할 때도 여과없이 드러나 지금도 한번 삼매에 들면 먹든 말든 큰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옛 선사들의 일화 속에나 있을 법한 얘기를 스님의 체험담으로 다시 듣고보니 우리 불교가 가진 수행 방법에 다시 한번 큰 자부심이 생겼다. 이처럼 일찍이 공부에 밝은 스님으로 인정받으면서 제자를 아끼는 큰스님들의 사랑도 이어졌다. 해인사에서 10년을 살면서 출가은사 고암스님을 비롯해서 자운스님 박한영스님, 성철스님, 지월스님, 미타스님 그리고 지금 총무원장으로 계시는 지관스님까지 왠만한 큰스님들은 죄다 모시고 살았다. 돌아보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라고 한다.
“ 내가 뭐 할 줄아는게 있나 그저 공부하는 것밖에 없지. 더구나 속가에서 살면서 너무 가난해서 공부에 한이 맺혔거든. 1년에 4번내는 등록금을 못내는거야. 공부는 하고 싶고...어린마음에 상처가 오죽했겠어. 눈치가 뻔한데 부모에게는 말도 못하고.. 그러다 절에 들어오니 큰스님들이 죄다 공부는 때가 있다시며 입을 거 먹을 거 학비까지 다 챙겨주시고 오직 스님네는 공부만하면 된다는거야. 스님이 된게 얼마나 자랑스럽고 행복한지..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야. 그게 해인사에서 지낸 기억이지. 그땐 정말 공부만 하면 모든게 되는 줄 알았는데....”
공부하던 해인사 시절 얘기를 하시며 한참을 아이들처럼 행복해하시더니 요즘 얘기를 여쭙겠다고 하자 말꼬리를 흐리시며 금새 착잡한 표정으로 돌아오신다. 시국과 관련하여 시끄러운 현실에 맘이 편치 않으신 요즘인 듯싶었다. 먼저 스님의 근황을 여쭸다.
“ 잘 먹고 잘 살지 ”라는 짧은 말로 대답하시며 심란한 마음을 함께 전해주셨다.
“ 그저 중은 공부하는게 제일인데.. 특별한 세상을 만들겠다. 불교를 잘되게 해야겠다. 이렇게 뭐든 만들겠다 하는 생각을 내는 순간부터 살기가 팍팍해지거든. 해인사 암자 소식이나 듣고 가야산의 냇가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를 들으면서 살면 세상이 가카부타 말이 없을텐데..근데 포교의 원을 세웠으니 돌아갈 수도없고 또 지옥 중생도 구제하겠다고 지옥 불구덩이까지도 가겠다는게 스님네들 아닌가. 지옥은 둘째치고 내 옆사람도 구제 못하면 되겠어? ”
최근 한쪽으로 기우는 생각들로 시비분별심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우려를 보이시는 말씀이다.
“ 법화경에 보면 일체 중생은 다 불자佛子라. 장로 대통령도 중생이고 막말하는 목사도 불쌍한 중생인게야. 또 아들 자자. 놈 자자. 중생은 다 부처님 자식이고 스스로가 부처인 사람이니 대통령도 목사도 일체 중생이니 불자라, 부처님 자식인거지. 그리고 모든 중생은 다 전법 대상이고 포교 대상인거야. 모든 걸 전체 속에서 봐야 해.
이번 불교도대회는 불교의 세를 보여주는 측면에서는 잘한거지만 이로인해 우리 스스로 분열하거나 잠시 잠깐 기독교가 세를 가진다고 지레 겁먹고 할 건 없어. 포교를 포기할 순없는거지. 그리고 실제 불교가 1700년을 이어오면서 여러가지를 경험 했을 거아냐. 그렇게 한순간에 휩쓸려 나가 떨어지는 건 불교가 아니야. ”
스스로를 여당도 야당도 아닌 불교당이라고 말씀하시며 세간에 떠도는 말많은 사람들의 편가르는 이야기를 한마디로 일축하시고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으로 시류 한담을 마무리 하셨다.
요즘 스님이 마음두고 계시는 최대 관심사는 대각사를 용성 큰스님을 기리는 민족성지로 만드는 일이다. 용성 큰스님이 민족운동 33인 중 한 분이기도 하지만 나라를 뺏긴 암울한 시기에 한글 경전을 만들어 한글을 통해 민족정신을 이어가게 하면서도 또한 불법을 전하는 방편으로 한글을 삼으니 용성 큰스님의 지혜와 대덕심은 과히 우리의 호국불교의 자부심이기 때문이다.
“ 내가 고암 큰스님 모시고 있으면서 들은 얘기지. 대각사가 3.1만세운동의 총 본부였어. 당시 나라를 구하겠다고 모여서 얘기할 장소가 어디있겠어. 요리집이고 다방이고 죄다
일본 순사들이 깔려있는데..절밖에 없지 그래서 3.1운동에 가담하는 민족주의자들이 대각사로 모이게 된거야. 당시 용성 스님이 쉰 셋, 천도교 손병희선생이 예순 셋. 제일 연장자였거든. 그래서 손병희 선생을 대표로 하고 기미 선언문을 작성하는 책임을 맡겼는데 나온 원고를 보니까 약한거라. 그래서 만해스님이 이를 첨가한다고 공약 삼장을 써서 의지를 더 강하게 보충하게 된거지..”
이렇게 시작된 3.1만세운동으로 모두감옥에 들어가게 됐지만 어떻게든 다 빠져나오고 맨 마지막에 나 온 것이 두분 스님, 바로 용성 큰스님과 만해스님이었다고 한다.
“ 역사 책에서 보면 만세운동하다가 다 들어갔다로 끝나잖아. 근데 그게 아니야. 고문에 못이긴 다른 사람들은 중간에 다 변절해서 나왔고 최린이 같은 사람은 이런 일인 줄모르고 참가했다고 발뺌하고 모두 살 궁리니 중간에 일찍 나왔어. 근데 딱 두사람만 만기 출소자인거야. 바로 용성 큰스님하고 한용운 선사지. 그래서 출소 후 최린을 길거리에서 만나면 한용운 선사가 외면하고 어쩌다말을 걸면 어허 최린이 죽은 줄 알았는데..하며 인간 취급을 안했데요. 변절자라고..써 있는 진실이 다 맞는게 아니야. 민족운동에서는 우리 불교를 빼놓을 수가 없지.”
대각사 앞으로 나있는 길이 옛날 고종 황제가 다니던 어도라는 고증도 들려주셨다. 나라를 뺏긴 임금이 무슨 낯으로 바깥 출입을 할 수있는가하며 낙선재에서 나오지않고 칩거하던 고종황제가 유일하게 마실나오는 곳 또한 대각사였다고 한다. 또한 현대사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는 김구 선생도 계를 받은 스님이었다고 한다.
“ 김구선생과 한용운선생이 둘이 동년배라. 똑 같이 스님이고 ..김구 선생도 마곡사에서 계를 받았거든. 법명이 원종圓鐘이라. 원종스님인데 나라를 구하겠다는 불같은 신념을 가진 분이지.
김구 선생이 용성스님을 뵈니 스님이 그러셨데. 너는 나라를 구해라 만해와 나는 후원을 할 것이다 하고..고향인 해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라고 보내셨다고 하지. 그래서 3.1운동할 때 김구선생이 해주에 있었어..”
여러 큰스님들을 오래 모신 덕에 전해들은 이야기만도 서재 하나 정도가 된다고 하신다. 특히 다시 전해듣는 장산스님의 이야기 민족불교사는 역사책에서도 볼 수없었던 귀한 내용들로 구술로나마 전해 들을 수있어 무척이나 감사했다. 그리고 불자로서 우리 불교에 대한 자긍심 하나를 더 할 수있었다.
용성龍城 큰스님(1864∼1940).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개혁운동가이자 일
제 치하,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3.1운동에도 참여했던 우리 불교계의 거
목, 용성 큰스님(1864∼1940). 100권이 넘
는 한문 경전을 우리말로 국역하여 누구
나 읽을 수있는 한글 경전을 손수 만드셨
고 불교계 처음으로 찬불가를 만들어 보
급하고 일요 불교학교를 만들어 전법과
포교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하셨던 분이
다. 또‘생산하지 못하는 종교는 흡혈적
종교요, 사기적 종교’라고 말하며 ‘禪
農一致를 주장하여 직접 농장을 경영해
자립하는 사찰 경제에 대한 중요성을 실
천하셨고 한국 민족정신의 뿌리를 불교정
신으로 인식한 일제가 불교를 황폐화시키
고자 대처승들을 주지로 만들 때 이에 항
거하여 1926년 <승려의 대처식육帶妻食肉
금지 견백서>를 만들고 ‘3천년 전통을
가진 불교에 비구승比丘僧(독자적으로 불
도를 닦는 스님)만이 법맥으로 면면할 따
름이요, 대처-육식을 하는 염치없는 무리
들이 없노라’ 하는 말씀을 남기심으로
서 오늘날의 청정법신으로 거듭나는 수
행 풍토와 법맥을 이어오는데 커다란 기
여를 하셨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의 근간
을 이루는 정신이 용성스님으로부터 다시
시작되어 <용성문중>으로 내려오니 <덕숭
문중>과 함께 우리 불교계의 법맥을 잇는
양대 산맥으로 추앙받고 있다. 동산東山,
동헌東軒, 자운慈雲, 고암古庵 등 한국 불
교계에 족적을 남긴 큰스님들을 직제자로
배출한 불교계 큰스님이시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