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버스가 사람을 쏟아놓으면 10번지 상권을 대표하는 신新부락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 보이소, 식당 찾으십니까”,“ 산채정식 드시고 가이소.”, “ 숙소는 정했습니꺼...”,“깨끗한 방 있습니더” .....
상가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식당과 여관, 업종이 단촐하고 메뉴도 너나없이 한가지로 산채정식 일변이니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관광객들의 입장에서는 이 곳 산골 개성에 맞게 인심이 좋아보이거나 뭔가 순박할 것같은 사람들을 따라가게 마련이다.
자칭타칭 호객꾼으로 한평생을 보냈다는 올해 나이 일흔 셋, 김경애 할머니.
역시 산채정식을 주메뉴로하는 식당 주인으로 장기는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다.
“ 삼성식당 가이소. 예∼ ”
애교있는 경상도 특유의 사투리에 가녀린 몸매, 맑고 여린 목소리까지...
눈감고 들으면 갓 시집 온 새댁의 모습을 연상할 정도로 늙지않은 말투와 목소리 덕에 할머니는 요즘도 손님들에게 인기가 좋다.
“ 몸이 불편해서 밥도 못나르고 오래 서있질 못하지.
주방 일도 못하지. 식당하면서, 사람 구실 할라면 밖에 나가 히끼해야지. 손님들 데려오는 일이 내 일이야.
...여태 그렇게 살았지 뭐.”
삐끼를 히끼라고 발음하며 속 좋게 웃어 보이지만 말 속에는 회한이 묻어있다.
팔남매 중간이라는 할머니. 어려서 앓은 골수염으로 다리를 심하게 저는 탓에 다른 형제들처럼 대처로 나가 공부할 기회조차 놓쳤다. 할머니의 최종 학력은 해인초등학교 3회 졸업생. 인근에 중학교가 없으니 불편한 몸으로 먼 길 통학이 어려워 학업은 그 쯤에서 포기를 해야했다. 결국 주어진 일은 어머니가 하는 식당 일을 도와 외지에서 공부하는 형제들의 학비며 생활비를 대는 일이었다. 살기가 다 팍팍했던 시절, 형제가 많다보니 나가는 돈도 많고 모녀가 부지런히 벌어도 형제들이 커가는 동안은 늘 쫓기는 살림이라 힘든 기억밖에 없다.
가지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던가.
위로 결혼하면 아래로는 대학을 가고 아래로 학교를 마칠 쯤이면 살림나간 형제들 입에서 못산다 소리가 들려오고 결국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도시에서 혼자 살기 힘들다며 올망졸망한 어린 조카들을 앞세워 마을로 들어오면 가엾은 마음에 냉큼 안게 되었다.
쳇바퀴 돌 듯 다시 시작된 뒷바라지 삶. 조카들 학비며 생활비까지 모녀가 식당 하나를 언덕삼아 또 다시 아이들을 키워내다보니 어느새 머리는 반 백, 처녀가슴, 외로울 새도 없이 허겁지겁 세월이 갔다. 어느새 장성한 조카들의 혼사가 오가고 그대로 장모 역할에 이젠 손주까지 생겨 할머니 소리까지 듣는 칠순고개를 넘어섰으니 처녀 한평생 치고는 별 낭만도 없고 참으로 어이없게 보낸 세월이다. 그래도 돌 볼 사람없어 편해진 지금보다는 아이들을 키웠을 때가 제일 재미있었다는 김경애 할머니. 여기저기 온통 이모를 엄마처럼 찾는 조카들 덕에 이 곳 가야산 자락에서는 김경애라는 이름보다 이모보살이라는 말로 그 녀의 이름을 대신하고 있다.
“ 아이고 돈이 제일 지겨워. 평생을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 엄마하고 나하고 번다고 벌어도 어쩜 그렇게 맨날 돈 통이 비는지...고생이 끝이 없지. 그래도 잘 살았어.
애들이 모두 다 잘 컸거든.. 내가 키운게 아니라 아이들이 착해서 절로 큰거야. 엄마도 옆에 계셨고..난 옆에만 있었지 별로 한 게 없어.”
별로 한 게 없다지만 졸인 마음은 하루도 편치 않은 세월이었다. 엄마를 부르는 대신 이모 소리로 에미 품을 대신했던 어린 조카들. 철없는 마음에 행여 에미없는 외로움으로 마음 다칠까, 자신들을 친정에 맡기고 소식까지 뜸한 에미를 원망할까..조마조마 지켜보며 남다르게 끼고돌던 것을 생각하면 그저 감사할 뿐이다. 모두가 부처님 앞에 의지했던 지난 세월 덕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태어났다는 경애씨가 이 곳에 들어 온 것은 일곱 살이 되던 해였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 일제 식민지 시절. 나라잃은 설움에 일본살이가 점점 힘들어지고 전쟁까지 극심해지자 어머니는 어린 8남매를 데리고 친정인 이 곳 해인사로 돌아왔다. 당시 경애씨의 외할아버지는 대처승으로 해인사 주지를 맡고 있었다. 일본이 민족정신을 대표하던 한국불교를 말살시키고자 대처승 제도를 새로 만들고 총독부에서 주지까지 임명하는 문화말살정책을 펼 때이니 큰 절인 해인사의 주지는 대처승이 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 때 임명직 주지를 맡았던 분이 변설호 스님. 바로 경애씨의 외할아버지다. 암울했던 시대적인 현실을 알 리없는 어린 경애씨는 그
저 외할아버지가 큰 절 주지라는 것만이 자랑스러울 따름이었다.
경애씨네 가족이 새로운 삶터를 꾸린 곳은 지금의 홍제암 근처, 용탑선원 자리로 예전 사하촌은 그 곳에 있었다. 큰 절 해인사가 바로 옆이니 절 마당은 어린 경애씨와 형제들의 놀이터가 됐다. 외할아버지는 비록 대처승으로 친일주지를 살고 있어도 한학과 불경에 조예가 깊고 부처님을 모시는 마음이 크다보니 주변 스님네들에게 그리 크게 인심을 잃지않고 사셨던 듯싶다. 어쨌든 한동안 경애씨네는 큰 어려움 없이 어느 정도 풍족하게 보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해인사 안에 있던 사명대사 비까지 부수겠다고 할 정도로 일제만행이 극에 달하자 그것만은 협조할 수 없다며 할아버지는 버티셨다. 그 일로 할아버지는 주지 직에서 물러나고 일본 형사들에게 심한 고문까지 받았다.
“ 당시 사명당 대사비가 해인사 절 안에 있었거든. 순사들이 와서 그걸 뽑아냈던거야. 할아버지가 이를 반대했고..물론 반대한다고 포기할 순사들이 아니니 결국 반항하는 할아버지를 마당으로 끌고와 칼로 마구 찔렀어..나중에 들은 얘긴데 쓰러진 할아버지 몸을 보니까 칼자국인지 총자국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몸에 열한군데나 구멍이 났더래. 다들 죽을 거랬는데 살았지. 관세음보살님이 살려주신거야..”
다들 죽는다고 초상 치룰 준비를 하고 있을 정도로 할아버지는 중태였다고한다. 그래도 산목숨이라 대구 도립병원으로 옮겨 희망없는 수술을 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기적처럼 다시 살아나셨다.
“ 할아버지가 그러는데 병원에서 수술을 하는데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데. 그리고는 다친 상처를 어루만져주시며.. 너는 살아야한다..그렇게 몇 번을 말하더래....그
래서 살아 돌아왔다니까. 부처님이 살려주신거지..그래서 우리 식구들은 지금도 꼭 기도를 다녀, 큰절가서 부처님 인사하고 희랑대 올라가서 기도하고 약수암가서 또 인사하고..그렇게 돌고 내려오는게 순서야..”
어쨌든 할아버지는 그 후로 77세까지 건강하게 사시다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없는 해인사에서의 삶은 고향이 아니라 타향살이보다 더 힘든 시간이었다. 해방 전에는 일제에 동조하지않고 버텼다는 이유로 형사들이 수시 드나들었고 해방이 되고 불교개혁이 시작되면서 부터는 친일한 주지 집안이라고 세상 냉대가 또한 심했다. 결국 친일파라 손가락질하는 분위기에 견디다 못한 할아버지와 변씨네 자손인 외가 식구들은 하나 둘 마을을 빠져나갔고 서울로 미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어머니는 꿋꿋히 이곳을 떠나지 않고 8남매를 혼자 키워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돌아 온 이듬해 쯤이니까 이미 해방되기 전에 집을 나가 소식이 없었으니 가족들에게는 이미 잊혀진 사람이었다. 그나마 의지처였던 할아버지조차 없으니 모든 생계는 어머니의 몫이 됐다.
게다가 경애씨마저 골수염에 걸려 걷지를 못하니 어머니는 아픈 경애씨를 업고 다니며 형제들 학비를 벌랴, 병원비를 대랴..숨가쁜 생활고에 연속이었다.
“울 엄마가 참 대단했어. 원래는 말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욕도 잘하고 화도 잘내고 쌈도 잘하고 ..나중에는 동네 사람들이 다 여장부라고 불렀어. 나도 엄마가
얼마나 무서웠는지..엄마한테는 꼼짝 못하지. 그런데도 정이 깊어 어려운 집 애들보면 꼭 데려다가 밥먹여 보내곤 했어. 언니가 두고간 우리 조카들도 있는데 그것
도 모자라서 남의 애들까지 데려다 키웠거든. 어떨땐 집에 아이들이 열명도 넘었다니까.. 난 엄마 반도 못따라가지. 남들은 내가 조카들을 키웠다지만 다 엄마 그늘이
있었으니 한거야. ”
경애씨네가 해인사 자락에서 그래도 밥술이나 뜨면서 자리를 잡게된 것은 6.25를 지나 다시 세상이 안정되고 성철 스님이 해인사 주지를 사시면서부터였다.
“할아버지가 떠나기 전까지 한동안은 백련암에 계셨거든. 그러니 성철스님과도 인연이 깊지. 특히 스님이 아이들을 예뻐하시니 우리 동생이며 나도 가끔씩 스님 시봉도 들고 심부름도 했어. 우리 형제들이 커가는 걸 다 지켜보신거지..”
경애씨네 형제들에게 애정이 각별하셨던 성철 스님은 어느날 어머니를 불러 조그만 식당 자리 하나를 내주셨다. 커가는 아이들 뒷바라지에 힘들어하는 어머니가 안스러우셨던 모양이다. 해인사 자락에 처음으로 내 것이라는 것을 가져보며 자리를 잡기 시작한 시간이었다. 형제들은 공부하러 다 나가고 경애씨와 막내동생, 그리고 어머니가 식당을 꾸려갔다. 그때 사하촌은 지금의 박물관 자리인 옛날 해인 초등학교 옆에 있었다. 다리 불편한 경애씨는 관광객들을 잡으러 거리로 나가 삐기를 하고 어머니는 주방을 맡아 음식을 내고 동생은 손님 시중을 들었다. 식당이 자리를 잡아갈 무렵 가야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지금의 신부락으로 다시 사하촌이 집단 이주를 하게 됐다. 그때 주지하시던 자운 큰스님이 또 다시 나서서 지금의 자리인 몫좋고 넓직한 터를 잡아주셨다.
조카들까지 더 얹혀진 빡빡한 살림살이를 걱정하셨던 탓이다. 경애씨는 지금도 두 스님의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그 덕에 8남매와 조카들까지 키워냈으니 모두가 부처님 뜨락에서만이 가능했던 일이라 믿는다. 또 몇해 전 구순을 넘기고 돌아가신 어머니는 큰스님이 입적하시듯 그리 조용히 앉아서 편히 눈을 감으셨다. 이를 본 이웃들은 업소멸을 제대로 한 고생이라며 이젠 생불이 되셨을 거라고 했다. 한 세기를 가까이 살아내면서 급변했던 한국사의 질곡을 한 여인의 인생으로 받아내셨던 어머니. 이런 어머니를 가장 가까이 지켜보면서 경애씨 또한 사하촌에 몇 안되는 살아있는 역사가 돼 버렸다. 형제들과 조카들을 키워내면서 처녀 한평생을 해인사와 함께 보낸 이모 보살, 김경애씨. 어쩌면 경애씨는 나를 태워 남을 살리는 보살행으로 전생 업을 받아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 배아파 낳은 자식보다 더 깊은 정이 있어 왠만한 집 효자들보다 이모 생각을 더 한다는 조카들. 시린 마음 보듬어 준 고마움이 또한 깊어서일까. 몇몇 조카들은 마을을 쉽게 떠나질 못하고 신부락에서 같이 이우솨며 산다. 이모보살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식당을, 조카들은 수퍼와 여관을 그리고 해인사 경내 매점까지.. 돌아가신 어머니와 이모보살이 일궈 논 해인사 아래 사하촌, 치인리 10번지는 이제 경애씨 가족들의 대물림 삶 터가 되어 제법 풍성한 대가족 한자리가 되었다. 이제는 넉넉해진 마음. 지금도 관광객들이 오면 삐끼를 해보지만 예전처럼 그리 절박하진 않다. 다만 한때 가슴 졸이며 돈 한푼이 아쉬워서 외쳤던“ 삼성식당 가입시더 예∼”하는 그 소리가 이제는 흘러간 옛 노래처럼 그립고 그 소리를 듣고 지금도 소박한 시골 아낙의 밥상을 기대하며 자신을 따라주는 손님들이 정겨워 마실삼아 오늘도 거리로 나서본다.
“ 삼성식당 가입시더.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