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일주문을 지나 원당암으로 가는 길, 도로를 따라 내려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세월의 이끼를 가득 덮은 큰 바위 하나가 있다. 그 형상이 가야산 어느 길목에서나 만날 수있는 자연석 그대인 까닭에 내력을 알고 일부러 찾지 않으면 스쳐 지나가기 마련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혜암대종사가 지난 10여년 전, 인파스님을 추모하는 마음에서 바위에 ‘인파당 사리탑’ 이라고 글씨를 새겨놓음으로서 승가에서만 내려왔던 비사秘史를 비로서 세상과 나누게 되었다.일단 크기에서 인파스님의 사리탑은 해인사 어느 사리탑들과도 비교될 수없을 만큼 그 규모가 가장 큰 것이다. 도인의 부도탑을 두고 세상의 잣대로 크다 작다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어리석음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그런 기준만이라도 전제해야 오가는 속가 사람들의 눈길이 하나라도 더 가고 그로인해 인파 스님이 살다가신 선사로서의 그 아름다운 삶이 법에 목마른 우리들에게 가르침으로 남게 되는 바, 조심스런 마음으로 인파스님의 다비식에 얽힌 일화를 소개해 본다.
인파당 스님은 조선 개화기 시대 스님으로 백련암에 주석하시다 지난 1846년, 열반에 드신 큰스님이다. 평소 도덕이 고매하고 학문과 시에 능통하시어 생존시, 많은 스님들로부터 백낙천의 후신이라는 칭송까지 받았던 분으로 공부 또한 깊어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해인사에서 나신 도인 중 한분이라 존경받고 있다.
스님이 입적하시자 많은 제자들이 모여 다비식을 치뤘다. 살아계시면서도 이미 깨달음이 깊은 도인으로 여러 가지 이적을 보여주신 터라 제자 스님들은 다비식 후에 보여질 인파스님의 사리에 대해 만만치 않은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다비한 자리를 아무리 뒤져도 사리는 한 과도 나오질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큰스님들에 대한 평가가 입적 후 남기신 사리의 수와 빛을 발하는 정도 등 눈에 보여지는 것들로 인해 다시 한번 재론되는 바, 스님을 모셨던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여간 당혹스런 일이 아니었다. 도인 스님의 다비식이었고 잔뜩 기대를 갖고 치러낸 다비식이건만 사리 하나 나오질 않았으니 제자들의 허탈감이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날 밤, 제자들이 모여 그간의 스님 행장을 놓고 갑론을박 서로의 잣대를 들이대며 돌아가신 큰스님에 대한 평가를 놓고 시비분별심에 빠져 있을 즈음, 다비식이 있었던 마당에 오색 빛 한줄기가 나타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산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놀란 제자들이 그 빛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니 바로 지금의 자리인 원당암 근처 큰 바위 위였다.
그 상황이 하도 괴이하여 바위를 올라가보니 그곳에 인파스님의 사리가 놓여 있었다. 비로서 제자들은 사리가 있네 없네 하며 일시적이나마 눈 앞에 보여지는 것에 빠져 마음을 혼란시켰던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돌아가시면서까지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시고자 다시 사리로 모습을 나타내시어 분별심을 없게 해주신 스승의 제자 사랑과 생존시의 큰 업적에도 불구하고 죽음 앞에 다시 조용한 자연으로 돌아가 흔적없이 바람처럼 묻히고자 했던 도인 스님의 깊은 뜻을 기리고자 제자들은 그 자리 그대로인 큰 바위 위에 구멍을 파고 스승의 사리를 모셨다. 그리고 150년이 지난 10여년 전, 인파 도인의 자연과 더불어 하나는 삶에 대한 큰 가르침이 흐른 세월만큼 희미해져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신 혜암대종사가 비로서 스님의 이름 한 자를 새겨 다시 흔적을 남기시니 공부가 모자란 후대는 다시 한번 인파당 스님의 큰 뜻을 새기게 되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그대로인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인파대사의 마음에 반하는 빚을 지었으니 스승을 팔아 공부인으로 거듭나겠다는 제자들의 아름다운 욕심인 바, 후대가 어렵게 빚을 진 그 마음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