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하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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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김옥영
2008년 10월 320호
버스는 막 초여름에 접어든 규슈의 푸른 들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버스는 후쿠오카에서 나가사키로 가는 중이었지요. 버스에는 일행의 통역을 맡은 미치코라는 일본 여성이 한분 동승하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나가사키에 도착하기 전에 인근에 도자기로 유명한 아리타 마을이 있으니 잠시 둘러보겠다고 안내를 했습니다.
아리타는 일본에서 자기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명성 높은 아리타 도자기를 생산하는 마을입니다. 그러나 그 일본 최고 도자기는 조선에서 기원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끌려온 이삼평이라는 도공에 의해 아리타 도자기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겁니다. 때문에 아리타에는 도조 이삼평을 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있습니다. 후손들은 해마다 그를 위해 제를 올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삼평의 이야기를 하다가 미치코 씨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스스로 수습하지 못하여 한참을 쩔쩔맸습니다.
나중에 그 분에게 왜 그렇게 울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분은 민망해하며‘당시 낯선 타국에 끌려온 이삼평의 처지를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났다’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착잡한 것은 그 때 버스 안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울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모두 한국인들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이삼평을 위해 우는 일본인과 울지 않는 한국인
이 차이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을 공감하는 능력의 차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공감이란 다른 사람의 상황과 그의 심정을 자기 것처럼 실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선천적으로 저절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기술처럼 연마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공감하는 능력은 많은 시련과 고통을 거치면서 얻어지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인간이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은 마술처럼 상대를 투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험에 비추어 유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맞아본 사람만이‘매맞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고, 그 경험으로 다른 매맞는 사람의 아픔을 ‘실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많은 고통을 경험한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보다 풍부한 공감의 능력을 갖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인간과 삶에 대한 폭넓은 경험이 필요조건이라면, 타인에 대해 열린 마음과 관심,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쉽게 반응할 수 있는 민감한 영혼은 충분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치코 씨는 한국인과 결혼했다고 합니다.
고국을 떠나 일본에 자리 잡은 남편의 심정을 미루어, 아득한 그 옛날 얼굴도 모를 한 조선 도공의 아픔을 미루어 짐작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어쩌면 그분 자신에게 그렇게 고독하고 괴로운 타향의 경험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그래서 그 분은 울었고 우리는 울지 않았습니다. 그 분에게 이삼평은 살아있는 인간이었고, 버스 안의 한국인들에게 이삼평은 그저 오래된 옛날이야기 속의 박제 같은 인물이었던 겁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왕비 마리 앙트와넷은“빵을 달라”고 외치는 굶주린 파리 민중들에게“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그에겐 민중의 배고픔에 공감할 경험이 없었던 것입니다.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간은 소통의 통로가 아니라 암담한 철벽이 될 뿐입니다.
방송은 이러한 공감의 능력을 가장 많이 요구하고 있는 분야 중의 하나입니다. 동시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느끼는 것, 원하는 것에 공감하지 못하면, 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방송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이 필요한 것이 어디 방송뿐이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우리 사회 모든 분야를 건강하게 만드는 필수적인 요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타인, 혹은 다른 집단에 대한 공감이 불가능한 채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감정과 이해관계에만 집착한다면, 그 사회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양산하게 됩니다.
예수와 석가가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분들이 인간의 조건에‘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위대한 연민(예수는 그것을‘사랑’이라 했고 석가는 그것을‘자비’라 불렀던)은 한없이 나약한 인간에 대한 이해 없이 나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야말로 가장 커다란‘공감’의 능력을 요구하는 분야일 것입니다.
진정으로 그분들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최근 들어 불교계를 분노하게 한‘종교차별’같 은 일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분명합니다.
일본인과 한국인이라는 장벽, 400여년이란 긴 세월의 장벽, 그 옛날 도공과 오늘의 통역자라는 장벽을 뛰어넘어 미치코 씨가 이삼평에게 공감할 때, 공감하지 못하는 우리가 부끄러웠습니다. 공감하는 능력을 잃어가는 우리 사회가 안타깝기도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집단과 집단 사이에 점점 더 많은 장벽을 세우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입니다. 아무 설명 없이도 웃음과 눈물을 기꺼이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감의 능력, 그것이 그 견고한 벽들을 무너뜨릴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