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사터에 남아있는 낭혜 화상 백월 보광탑비명 朗慧和尙白月 寶光塔碑銘은 신라때의 비석으로는 가장 크다. 국보 제8호로 지정된 고운의 사산비명의 하나로 귀중한 비이다.
낭혜 화상의 백월보광탑비와, 실제 크기로 본 탑비의 글, 이 비는 진성왕 4년 890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최치원이 왕명을 받아 글을 짓고 그리고 최인연이 역시 왕명을 받아 글씨를 썼다. 당나라 때에 크게 유행한 구양순체와 저수량 풍이 짙다.
낭혜 화상의 법호는 무염無染이고 속성은 김씨이다. 무열왕이 그의 8대조로서 , 애장왕 원년인 800년에 태어나 진성왕2년인 888년에 여든 아홉살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낭혜 화상은 스물한살 무렵에 당나라에 가서 화엄華嚴을 배워 마흔다섯에 귀국했다. 문성왕, 헌강왕 때의 국사였으며 , 성주산 선문의 개조 開祖로서 선풍을 크게 떨친 고승으로 유학과 문장에도 능하였다. 문하門下에서 승량, 보신, 심광과 같은 명승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는 지금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성주사 사적비편에 실린 글씨이다. 이 또한 통일신라 때 쓰여진 것으로 구체歐體에 안풍 顔風이 가미된 듯하다.
만수산 준령에 자리잡은 무량사는 신라 문무왕 때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사찰의 첫 관문인 일주문 앞에는 이우以愚 김찬균金瓚均의 글씨인 “만수산무량사萬壽山 無量寺ꡓ와 그 뒤의 “광명문光明門ꡑ 현액이 독특한 해행체로 걸려 있다. 한편, 사천왕문에는 역시 같은 이우 김찬균의 솜씨로 쓴 “천왕문天王門ꡑ 현액이 걸려 있다.
“극락전 極樂殿 현액은 누구의 글씨인지는 모르겠으나 조선 시대인 18세기 중건 때에 쓰인 것으로 보아서 석봉체이기가 쉽다. 아래에 소개된 , 극락전의 주련柱聯은 이우가 행서체로 쓴 것이다. 서경적인 분위기와 중생 구제의 뜻을 표현하고 있는 글 내용이 극락전과 잘 어울린다. 극락전 앞에 둥근달, 옥호 금색 허공 비추네 . 사람의 한생각 명호라 하고, 경각에 뚜렷한 무량공 이루니 , 사십팔 년 동안 뭇 중생 제도하길 원하여 , 구품함령으로 피안에 오르네 .
極樂堂前滿月容
玉毫金色照虛空
若人一念稱名號
벚刻圓成無量功
四十八願度衆生
九品含靈登彼岸
“명부전 冥府殿”의 현액은 황산곡풍의 행서가 활기가 넘치면서도 단정하고, 행서체의 “우화궁雨花宮” 현액과 예서체의 주련이 함께 걸려 있으나 어딘가 모르게 예서풍의 작품이 조금 단조로움을 느끼게 한다. 가뭄에도 불구하고 울창한 숲을이룬 주변 숲속에는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조선 시대의 생육신 가운데 한 분이며 문장이 빼어난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부도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