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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봉미산 신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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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풍광과 진경 - 이호신 1995년 09월 163호
절을 찾아가는 일은 뭇 기행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시공을 초월한 종교와 역사의 숨결이
있으니 그렇고, 그윽한 풍광과 함께 자연에 의지한 인간의 슬기가 응집된 터전으로 자리하고 있기에 더 그렇다. 이합집산인 도심 생활공간의 무계획적이고 물신주의에 의해 파생된 생활공간을 생각할 때 절을 찾는 마음은 다시금 되돌아 보아야 할 자연과의 조화에 대한 궁극의 지침으로 다가온다. 지난 유월 지방 자치 선거의 막바지 열기가 온통 세상을 뒤덮고 있을 때 개인 일로 이천을 거쳐 초여름 강변에 떠있는 여주 신륵사를 찾았다. 남한강의 상류인 여강 驪江에서 마암馬岩 바위의 영월루迎月樓에서 내려보는 신륵사의 전경은 숲에 싸여 있으나 봉미산 산세와 강안의 승경이 길손을 이끈다.
설레는 마음으로 여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신륵사 안내길로 들어서자 새로 넓힌 주차장과 기념품 상가 앞 숙소에는 평일 낮인데도 뽕짝 소음이 앞을 흐려 기분이 언찮다. 절의 환경이 유락지로 둔갑해 가는 시간의 증거는 일주문 오른편 강가에 보트장이 버젓이 들어와 한여름 성수기를 맞아 즐비한 것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암 운영을 위해서, 또는 절의 문턱을 낮추려고 그도 아니면 지역 공원의 휴식처로서 개방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더 깊은 청산이 그리워짐은 한번풀린 물꼬를 되돌리는 것만큼이나 난감하기 때문이다.
박거나 버려냄 이 아닌, ‘지킴과 되살림의 지혜’ 는 결국 절집안의 의지가 무엇보다 먼저이다. 몇 해 전에는 보이지 않던 일주문이 지나치게 크고 둔중하다 싶은데, 또 바로 옆엔 매표소가 있다. 밀집모자에 걸망을 지고 먹물 가사를 날리며 세속의 바람을 끊어 내던 산문의 모습이 내내 그리워진다.
그 아쉬움도 잠시, 참나무와 느티나무 고목이 강바람에 깃을 날리는 길을 따라 목마른 사
랍이 샘을 찾듯 강가로 다가가서 바위위의 육각정 강월헌부터 찾았다. 같이간 두 화우畵友와 함께 땀을 씻으며 기운을 돋우는데 눈 아래의 삼층 석탑과 정자 앞으로 펼쳐지는 경안에 벌써 손끝이 마려워서 화첩부터 펼쳤다.
먼저 눈에 띄는 다층전탑은 ‘벽절(璧寺)로 상징될 만한 탑으로 중국이나 고구려의 영향이 물씬 풍기는데, 다가가서 살펴보는 전돌의 당초 문앙이 빼어나게 아름다워 한참을 서성거리고서야 절 안으로 걸음을 떼었다. 절을 중수한 김병기 공덕비를 지나 신륵사 편액이 있는 구룡루 다음으로 범종각, 적묵당, 신검당과 그 뜨락에 밝아오는 다층석탑과 극락보전이 이 절의 중심이다. 낮은 계단을 올라 명부전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의 조각에 눈을 주다가 산기슭에 있는 두 기의 부도로 눈길을 옮겼다. 수려한 향나무 고목 뒤의 조사당에는 지공화상, 나옹화상, 무학 대사의 영정이 그림이 아닌 사진으로 대체되어 아쉬웠다. 그런데 어쩐지 무학과 나옹의 그림이 엇비슷한 느낌이다. 조사당 뒷길로는 봉미산을 오르는 계단이 이어지며 소나무 군락이 시작되는데 언덕 위에는 나옹 화상의 석종형 사리탑과 장명등, 그리고 사리 석종기가 비바람의 부침 속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고즈너기 길손을 반긴다. 이 곳이 정녕 오대산 정기가 봉미산 주맥까지 달려와 여강에 꼬리를 담그는 명당이란 말인가 소나무 숲이 울창한 탓에 주변을 살피기 어려우나 지세의 느낌만은 오롯했다. 무엇보다 풍수지리에 정통했던 무학 대사의 스승인 나옹의 묘자리이니 어련하겠는가 절의 발목을 적시는 여강이 임수이고 강건너 마암이 안산이 될 터이다. 내려오는데 극락보전 뒷단에 칠성각과 경내를 지나 다시 전탑에 오르자 탑뒤로 이색李播이 그의 부친의 뜻을 따라 대장경을 인출했다는 대장각 기비와 비각이 들어왔다. 강바람이 일렁이는 강훨헌에서 밑그림을 정리하는데, 정자 위가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 시끌법석해졌다. 그 옛날
영릉원찰이 신륵사였음에 오늘날 민초들의 발원이 이 곳에서 각별하게 상기되어 오는 것은 어찌된 까닭일까.

강바람이 일렁이는 강월헌에는 밑그림을 정리하는데, 정자 위가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 시끌법석해졌다. 그 옛날 영릉원찰이 신륵사였음에 오늘날 민초들의 발원이 이 곳에서 각별하게 상기되어 오는 것은 어찌된 까닭일까. 강월헌 옆의 삼층석탑은 나옹 화상을 다비한 곳이다. 본디 경북 영해 출신인 나옹은 만년에 회암사를 떠나 이 곳 신륵사에 이르러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전하는 신륵사 그림은 지우재 정수영 (之又齊 鄭遂榮;1743~1831)의 것이 있다(1796년작). 기행과 탑승으로 시, 서, 화에 몰두하며 일생을 보낸 그의 그림에는 봉미산 아래 가람의 진경이 들어와 앉았다. 후대에 세운 강월헌 정자는 없고 산자락 중앙 아래 극락보전 뒤의 솔 숲에서는 나옹화상의 석종, 석종비, 석등이 잠겨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울 객지에서 스무닷새나 함께 한 그림 벗이 이천으로 내려간 탓에 미루어온 방문 틈에 여주 신륵사를 찾았고, 그의 차를 이용한 덕에 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고마운 친구는 기독교신자인데 그가 나를 인도하였으니 내게 있어 신륵사 풍광은 산이 아닌 강의 절처럼 역설의 바람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