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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기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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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심을 일구는 이야기 - 이영일 1995년 09월 163호
근기란 사람의 그릇 됨을 뜻하는 것이다. 극기가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극복해 나가는 힘이라면 , 근기는 어쩌면 미리미리 대처해서 저만큼 눈앞에 보이는 어려움에 빠지지 않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8월초에 해인사 수련대회에 참가했다. 방송국 일에 날마다 쫓기듯이 매달려 살던 다섯 명의 동료와 함께 한여름에 땀을 비오듯이 흘리며 보낸 가야산에서의 사박 오일은 팍팍하고 힘든 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싱그럽고 가슴 뿌듯한 나날이었다.

하루의 일정은, 새벽 예불을 시작으로 하여 암자순례, 참선과 강의 , 백팔배와 발우 공양 등으로 이어졌는데 , 무서운(?) 스님들의 숨가뿐 진행으로 백삼십 명쯤되는 참가자들은 대부분이 가야산 밖의 일은 미처 떠올릴 겨를도 없었다.
절을 한번 할 때마다 반야심경글자를 하나씩 하나씩 써 넣는 사경 시간에는 그 옛날에 팔만대장경을 판각해 모시던 선조들의 불심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만했고, 부모은중경을
독송할 때는 많은 법우들의 울먹이는 소리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발우 공양 할 때에 잘못하여 같은 조에 속한 법우들과 함께 퇴수물을 세 번이나 마신 것도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고, 바람 한 점 없이 더운 날에 모든 참가자가 동참한 가야산 정상 등정이며 , 천팔십배 참회기도도 참으로 오랜만이어서 다리가 후들거리고 힘들었지만 수련대회를 마치고 절문을 나서는 감회는 차라리 법열이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안타까웠던 것은, 무슨 까닭에선지 동참했던 법우들 가운데 몇 사람이 중도에서 수련을 포기한 채로 하산한 일이다. 마음 굳게 먹고 스스로 참가한 수련대회인만큼 조금 힘이 들더라도 끝까지 함께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발길을 돌리면서도 못내 가시지 않았다.

현대 사회는 생활이 편리해진 탓인지 어려움을 이겨내는 끈기 같은 것을 자꾸 허약하게 만들어 가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요즘 신입사원교육이나 어린이의 과외 활동에 일종의 극기 훈련 같은 것을 많이 집어넣기도 한다. 극기 훈련은 글자 그대로 자기 지신을 이기는 훈련이다. 작은 장애나 유혹에도 쉽게 포기하거나 무너지는 의지를 강하게 만들어내는 단련 과정인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어려움을 겪을 때만 이것을 괴롭게 익힐 뿐, 미리 준비하는 데는 소홀히 하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갑자기 어려운 일을 당하면 어찌할바를 몰라 당황하고 허둥대기가 일쑤이다.
극기훈련이란 자기 의지를 극대화하는 일종의 담금질이다. “에잇, 담배 하나 끊지 못하면서
무엇올 하겠나.” 이런 마음으로 담배 끊기는 곧잘 많은 어른들에게 의지의 시험대가 되곤
하지만, 결국 ‘의지의 한국인ꡑ이 되지 못한 채로 몇 번의 시도와 실패만을 되풀이해서 경험하고 마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이다.
일제의 온갖 협박과 회유에도 굽히지 않고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만해 한용운 스님 , 십 년 동안 장좌불와하며 투철하게 정진한 성철 큰스님 같은 분들을 생각하면 그 굳은 의지가 그렇게 높아 보일 수가 없다.

불교에서는 근기根機를 중시한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사람됨이 나무의 뿌리와 같다면 성품은 뿌리가 자리를 잡는 기틀이 된다. 삶의 내용이나 수행의 정도는 이 근기 여하에 따라 많은 부분이 규정된다. 열반경에서는 하근기 가운데에서도 근기가 낮은 중생은 부처님조차도 제도하기 어렵다고 했다. 곧 근기란 사람의 그릇 됨을 뜻하는 것이다. 극기가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극복해 나가는 힘이라면, 근기는 어쩌면 미리미리 대처해서
저만큼 눈앞에 보이는 어려움에 빠지지 않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타고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터이고, 또한 그 타고남이란 사람마다 저마다의 모습으로 다른 것 또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세세생생의 가꿈으로 형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도나 수련은 곧 그것을 가꾸는 일일 것이다.
근기에는 하근기 , 중근기 , 상근기가 있다. 불교 식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지혜와 자비의 크기를 말한다. 극기가 근성과 통한다면 근기는 그릇이라 할 수 있다. 비가 아무리 많이 오더라도 일백 리터의 그릇과 일천 리터의 그릇에 담기는 빗물의 양은 이미 정해져 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대로, 생긴 대로 사느냐, 아니면 자기의 그릇을 키우는 훈련에 자신을 꾸준히 던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극기와 근기의 훈련은 그래서 자기의 의지와 그릇을 극대화시키는 훈련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자기를 이기고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자가 최고의 승자이며
슬기로운 사람이 라고.

내 자신을 돌아볼 때마다 근기의 저열함을 느끼게 된다. 기회가 닿는 대로 수련대회에 자주
참가하고 싶다. 그리고 이번 해인사 수련대회 도중에 하산한 법우들을 뒷날 어느 산사에선가 다시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