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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운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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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5년 09월 163호
제방 선원을 두루 다닌 스님들로부터 실상사는 터가 양양하여 수행하기 좋거니와, 머물수록 마음이 안정되고 떠나기 싫은 곳이라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그러나 그 수승한 기운을 몸으로 느끼는 경지는 아득하기만 하여 이 곳을 찾을 적마다 애가 탄다. 그저 사천왕문 앞에서 보면, 왼편의 수청산, 삼봉산 따위의 산무리와 오른편의 삼정봉, 그리고 조산朝山격인 천왕산의 배치가 그럴 수 없이 뚜렷하고도 안정되어 있으니 명찰의 기미를 가늠만 해 볼 뿐이다.
때마침 하안거 해제 날이자 백중날이었다. 칠월 보름날인 우란분절은 산문에서는 큰 명절의 하나요, 아귀도에 떨어져 있는 어머니를 구하고자 잔치를 벌였던 목련존자의 뜻을 기리어 덩달아 여염에서도 망혼일로 삼고 있는 날이다. 그래서 법당 안팎이 사부대중으로 붐비리라
은연중에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때마침 구산선문 사찰들을 순례하다가 실상사에 들른 해인사 학인 스님들 일행이 아니었으면 절은 쓸쓸할 뻔하였다. 지난해 십일월부터 이 곳에서 주지 일을 보고 있는 운산 스님은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허물이라는 듯이 멋적은 표정을 지으셨다.
“신도 카드가 팔구백 장쯤 된다지만 그건 치켜들 것도 없는 것이고, 매달 약사재일 정기 법회에 참석하는 신도는 남원이나 인월 등 인근에서 사는 분이 스무명 남짓, 그리고 선우도량을 후원하는 전주 분들이 한 마흔 명, 보태 봐야 백 명이 채 안 됩니다. 전라도 지역의 낙후성도 그 까닭이 없잖을 것이고...ꡑ

그러나 이런 식의 물량적 겉보기는 질타 받아야 옳다. 실상사는 신라 하대의 구산 선문 가운데 최초로 문을 열어 선교 양종의 분수령을 이룬 유서 깊은 절이고, 지난 90년에 ꡒ올바른 승가상의 확립ꡓ과 ꡒ승풍 진작”을 기치로 내걸고 창립된, 지난해 개혁회의를 통하여 종단 개혁의 이념적 근거를 제시한 단체인 선우도량의 근본 도량이다. 그리고 강원 체제로서는 나라안에서 유일하게 총무원의 지원을 받는 화엄 학림이 있는 곳이라는 것만으로도 그렇다.
ꡒ화엄 학림은 지난 하안거 결제일에 총무원 교육원장 등 일흔 분쯤의 스님들이 모인 가운데 개원식을 치렀는데 , 오늘 해제와 함께 한 달 동안 방학에 들어갔습니다. 「화엄경」을
교재로 강사급 스님들이 참여하는 논강제 수업인데, 연관 스님이 본강으로 마무리한 다음 컴퓨터에 입력시킵니다. 본생과 청강생 등 열 분쯤이 참여하고 계십니다.”

이런 스님들의 장엄을 받고 있는 운산스님이 골몰하고 있는 것은 “소프트 웨어ꡓ가 아닌 ꡒ하드 웨어ꡓ 곧 실상사의 중창 불사에 관한 일이다.
야트막한 댓개비울을 친 요사채의 초입에 자리잡고 있어서 , 들손님 , 날손님 들이 인사 여쭈기 편한 스님의 방에는 좌탁 맞은편에 초록, 연두, 빨강색 선으로 그어진 ꡐ지적도ꡑ가 붙어 있었다.
사랑채 노릇을 하는 그 방 말고도, 컴퓨터를 놓고 휴식과 작업 공간을 겸하는 곁방에도 똑같은 것이 붙어있었다.
ꡐ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중 방마다 한 장씩 붙여 놓았더랬어요? 어떤 스님이 슬쩍 귀띔한 내용이다.
71년에 인천 용화사의 전강스님을 은사로 입산한 뒤로 그 동안 선방만 다니던 수좌였던 운산스님이 세운 원력은 두 가지가 있었으니 , 그 첫번째가 실상사 주지였다. 입산한 뒤 얼마 되지 않아 화두 하나 타 가지고 찾아온 곳이 실상사 위에 있는 상무주암이란 암자인데, 보조 국사가 깨우침을 얻은 그 곳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실상사에 대한 애정이 쌓이기 시작하였다.
ꡐ실상사는 논 가운데 섬처럼 불쑥 솟아난 절이 아닙니다. 이 들판이 십만 평쯤 되는데, 거의 모두가 실상사 영역이던 곳이죠. 절 옆으로 흐르는 만수천 안쪽은 물론이고, 개울 건너 마을인 중기에도 스님들이 많이 살았다는 사람들의 말이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는 만큼, 절터가 거기까지 미쳤던 게 아닌가 싶어요.
주지로서 첫 부임지라는 운산스님의 조금은 머뭇거리던 말투가 절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로 접어들면서 높아지고 급해졌다.
ꡒ한국 불교의 대표 종단인 조계종은 선종을 근본으로 삼고 있으니 이 나라 불교의 조종으로 삼아야 할 분은 순도 화상과 홍척 국사입니다ꡑ
교종이 하대 신라에 이르러 타락한 왕실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전략하여 민초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을 때 , 그 무렵 당나라에서 귀국한 유학승들이 아홉 개의 선문을 열었다. ꡐ견성하면 누구나 다 부처ꡓ 라는 이 “혁명적이고 이단적인ꡓ 생각을 종지로 하는 선종이 널리 사람들의 마음을 붙든 것이다.
억불 폐해를 피해 귀국한 유학승들과 차츰 세력이 확장되고 있던 지방 토호들의 후원 결과이기도 하였다.
ꡒ홍척 국사는 구산 선문의 최초 사찰의 개산조이자, 선법의 조종어지요. 도의 선사가 서당 지장의 심인을 받고 홍척보다 조금 먼저 귀국하기는 했지만, ꡐ때가 무르익지 못했음ꡑ 을
실토하고 설악산 진전사로 숨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홍척 국사는 신라 홍덕왕과 태자, 그리고 많은 신하들을 교화함으로써 선종이 새로운 정신 사조를 대변하게 되는 바탕을 닦은 거지요”
운산스님이 홍척 국사의 자리 매김을 새삼스러울 만큼 역설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는 불교와 실상사에 대한 기대와 남다른 포부 때문이다. 그리고 나아가 강력한 ꡒ회복의지ꡓ의 표명이기도 하리라.
ꡒ요즘 우리나라가 양풍 일색 아닙니까. 국어만 영어를 안 쓴다 뿐이지. 불교로 통일 사상이 대체되어야 하고 말고요. 불교의 중심 사상이 지혜와 자비인데, ‘지혜와 복덕을 구족한 부처님께 귀의한다’ 고 하지 않습니까. 부처의 지비심은 한량이 없어서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복덕입니다. 인과 관계지요. 자비심을 씀으로 해서 복덕이 생기고, 복덕을 완성하려면 자비심을 써야해요. 세상 가치관 가운데 가장 잘못된 것은 자리와 이타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겁니다. 자리가 곧 이타고, 이타가 곧 자리인데요. 실상사가 그 중심 도량이 될 자격도, 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해서 원력을 그렇게 세웠던 겁니다ꡑ

왕명으로 세워진 실상사는 개창 당시와 2대조인 수철, 편운스님 무렵에는 크게 번창했지만
고려조 때에 몇 번의 중창을 거쳤고 조선조 초기에는 폐사되다시피 했다. 한때 침허스님대에 이르러 건물의 동 수효가 서른여섯이나 되는 큰 가람으로 모습을 바꾼 적도 있지만, 속인의 방화 등 곡절이 잇따랐다.
그러나, 산내 암자연 백장사의 삼층석탑(국보)과 석등, 경내의 삼층쌍탑, 증각(홍척스님의 시호)과 수철스님의 탑 및 탑비 , 석등, 철제 여래좌상(개산 당시 조성됨) 등 단일 사찰로서는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함으로써 천 년이 넘는 절의 역사를 웅변해 주고 있다. 그러나 옛모습 되살리기가 어디 만만한 일이겠는가. 침허스님 때에 중창한 서른여섯 채 건물의 이름은 있으나 지금 자취가 확인되는 것은 십여 채뿐이다. 먼저 그 건물의 위치를 확인한 뒤에라야 복원 불사의 종합적인 설계가 가능하겠지만, 불사 가운데 가장 역점을 두는 것은 석탑과 석등을 중심으로 한 보광전과 장육전과 미록전의 ꡒ삼각형 구도이다. 지금 현재 세 칸 규모외 보광전은 석탑 및 석등의 규모에 크게 못 미치는 것이니 그에 걸맞는 금당으로 복원하는 일이 불가피하고. 범종이 놓인 뒤쪽에는 장육전(구층 목탑)을, 그리고 그 맞은편에 미륵전(오층 목탑)을 세우려는 것이다. 장육전과 미륵전의 뒤쪽으로는 선원과 강당을 두 채씩 나란히 옹립시킨다. 경내가 정돈되면 주변의 십만 평 대지에 팔전팔방八殿八房을 비롯한 여러 건물을 지어 선원과 율원의 수행 도량과 교화 수련원을 둠으로써 상구보리 하화중생하는
산 도량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게 하려 한다.
“한국 대부분의 사찰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어서 사천왕은 입구에 네 분을 한꺼번에 모실 수밖에 없지요. 승주의 선암사나 대흥사 등 사방을 둘러싼 산봉우리로 사천왕을 삼고 있는 곳도 있고요. 이 곳은 평지 사찰인 만큼 그 옛날에는 사방에 한 분씩 제대로 모셨다고 해요. 정문도 지금은 절의 옆구리에 붙은 해탈교가 그 구실을 해 주고 있지만 금당에서 동남향으로 마주보이는 천왕봉 쪽으로 옮겨져야겠고요.”
이런 옹골찬 계획들을 가시화하는 전제 조건은 사찰의 터를 확보하는 일임은 말할 것도 없다. 운산스님이 이 곳으로 부임해서 추진하고 부분적으로 이루어 낸 첫째 일도 그것이었다.
한 평에 이만 원씩의 ꡐ땅사기 운동ꡑ을 벌여 뜻있는 사람들의 동참을 호소하는 한편으로 올 봄에 총무원에 기채 신청을 하여 승인을 받았다. 사적지로 책정되어 있는 팔만사천 평-지적도에서 빨간색으로 칠해 놓은 부분-가운데, 실상사가 매입해야 할 땅이 오만 평이나, 가장 요긴한 땅 일천칠백 평을 사들인 것이다. 어려웠던 만큼 보람된 일이었다. 나머지 땅도 차차로 사들어야겠지만, 그에 앞서 최신 기계를 써서 논 속에 묻혀 있는 유구 및 유물의 존잔을 파악하는 일은 매입 전에도 가능할 것이다. 운산스님은 곧 그 일부터 착수하려 한다.

구름은 무심히 계곡 입구에서 흘러나오고, 새는 지치면 돌아올 줄 안다.

왜 집을 떠나셨더냐고 물으니 그렇게 답하셨다. 무슨 별난 사연이나 동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둥지를 찾는 새처럼 , ꡐ인연이 성숙되어 저절로” 절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성격 따위가 도를 닦기에 가장 좋은 체질인 듯하다니 , 근기로 보자면 연각승 - 스스로 인연을 관철해서 깨달음을 찾는 사람이라, 성문승-가르침이 있어야 공부해 나가는 법을 아는 사람-보다 한 수 위다. 이런 스님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ꡒ오월 신록철, 비 온 뒤 구름 사이로 호수처럼 보이는 하늘ꡓ이다.
제 모습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지만, 그 끝은 보는 사람도 아는 사람도 없는 그런 하늘처럼 되고 싶어한다.
이런 마음은 스님이 지금 취하고 있는 수행법과 무관한 것 같지 않으나, 그가 사모하는 통현 장자가 제시한 것으로서 , 자기의 깨달음 자체, 광명체를 관조하는 것이다.
“백정보광명 白淨寶光明 , 가장희고 깨끗한 보배 빛깔의 생각을 짓는다는 겁니다. 정법 시대가 가고, 지금은 말법 시대인데, 부처님이 백 년 사실 복력을 이십 년 덜 살고 가시면서 남긴 은덕으로 살고 있는 때이지요. 간화선은 생각으로 생각을 이기자는 것이니 , 화두법은 최하근기의 이 시대에 알맞은 수행법입니다. 나는 모든 수행법 가운데 가장 근원적언 것은 법계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ꡐ칠십 이쪽 저쪽ꡑ-어느 스님이 제안한 운산스님의 별호는 마혼일곱 세가 무색한 그의 조백早白과, 칠십도쯤 늘 기울어져 있는 자세 때문에 학인 스님들의 ꡒ웃음ꡑ으로 동의되었다. 그러나 운산스님의 ꡒ기울어짐ꡓ에는 어떤 도반 스님이 지적했다는 ꡐ알 수 없는 비애감ꡑ도 엿보인다. 고추를 널어도 두 개가 겹쳐지는 법이 없이 찬찬하던 그를 두고 속향의 어머니는 ꡐ떡가루가 곱다고 해도 네 맘만 못할 것ꡓ 이라고 했다. 그 어머니의 손길을 뿌리치고 집을 나선 것에 아직도 끄달리고 있기 때문일까. 그의 속향은 전라도 함평이다.
그 곳을 ꡐ고구마 사건ꡓ 대신에, 임방울이 정하게 부르던 노래, ꡒ함평 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을 보랴허고 제주 어선을 빌려 타고 바다 남쪽으로 건너간다ꡑ로 떠올리고 싶어한다. 그리고 운산스님은 그 노래를 이렇게 푼다.

천지를 다 평화롭게 한 늙은 몸이
빛고을(自性)을 보려고
모든 중생을 피안으로 건네 줄
고깃배를 타고서
바다 남쪽으로 건너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