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심이 깊으셨던 어머니는 새벽마다 향을 사르고 앉으셔서 금강경을 독송하셨다. 선잠에 졸린 눈으로도 일상과 다른 경건함이 배어나던 모습은 어머니를 떠 올리면 가장 선명하게 그려지는 기억으로 각인 되어있다. 그처럼 독경으로 하루를 시작하시던 것이 신심에서만이 아니라 이미 출가하여 수행자의 길을 가고 있던 형님을 향한 모정이기도 했었다는 것은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하루는 해인사 강원에 다니던 스님이 다니러 왔는데, 아침 일찍 경전을 펼쳐 읽다가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거두지 않던 나에게 그 내용과 뜻을 설명해주었다. 어머님에 이어 형님까지 경전을 읽고 설명해주니, 거기에 깊고 넓은 의미와 가치가 있으리라는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처럼 고귀하고 원대한 것이라면 나 스스로도 배우고 경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출가의 결심을 굳혔다.
다음 날 어머니께 허락을 구하자 눈을 지그시 감고 한참을 생각하시더니,“ 이제 우리 아들이 출가를 결심하였다니 참으로 장하고 기쁘다”라고 하시면서 밝고 환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셨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련해진다.
부산의 한 암자를 찾아가 주지스님께 행자와 부목의 허드렛일을 하는 입산 출가를 허락 받은 것이 1977년 가을이었다. 암자에서 두 해쯤 행자와 부목의 소임을 살았지만, 행자의 기본 행해습의 과정인 초발심자경문과 사미율의 등의 기본교육을 접하지 못했다. 그러자‘이렇게 세월을 보낼 것이 아니라 제대로 경전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수행자로 거듭나야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되었다.
주지스님께 나의 각오를 말씀드리고는 해인사로 다시 입산하여 행자생활을 시작하였다. 1979년 당시의 해인사 행자실은 규율이 엄격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훌륭한 가풍이라고 할 만하다.
당시 행자실의 행자반장은 해인사 강주를 역임한 종묵 스님이었고, 참선요가를 수련하여 정진에 많은 도움을준 정경 스님 역시 엄격한 행자실에서 함께 한 선배행자였다.
강원에서 경전을 독경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수계를 하면 나도 강원에 들어가 경전을 익히겠노라’하는 결심을 굳히기도 했다. 행자시절에는 공양주보조와 갱두, 찌개장 등을 하면서 직접 방앗간에서 두부를 만들기도 했다.
해인율원이라는 현판이 있는 극락전에는 노스님들의 거처와 율원이 함께 하고 있었는데, 율원에서는 계율을 공부하고 연구한다는 말을 듣고 뒷날 율원에도 가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행자시절의 어려웠던 환경과 빠듯하고 고되었던 일과들이 지금의 수행생활에 나태해지지 않는 지침과 순간의 흔들림에도 동요되지 않을 수 있는 반석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에‘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고 함축한 말씀에 갈수록 탄복을 금할 수 없다.
강원과 율원을 마치고 선방에서 몇 철을 정진하는 내내 공부에 대한 욕심과 학문에 대한 갈증이 가라앉지 않았다. 심사와 숙고를 거듭하다가, 계율에 대하여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로 받아 지키기보다는 학문적으로 심도 깊은 탐구와 분석을 통해 시대의 상황 변화에 대처할수 있는 계율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이 수행과 공부를 병행해 나가는 수행자의 도리라 여기고 계율학을 공부하고 전공하는 것에 뛰어들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상노스님이신 자운 큰스님께서 한국불교의 현대사에 열어놓으신 계율의 길을 학문적으로 정리하면서 큰스님의 족적을 더듬어보고 싶다는 열의도 숨길수 없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상노스님의 보이지 않는 경책과 인도를 여러 차례 경험하였고, 인연과 가피가 얼마나 지중하고 벅차다는 것을 수 없이 절감하기도 했다.
돌아보면 고비의 순간마다 분연한 의지를 다져서 결행한 것이 고치가 허물을 벗고 나비로 화생하듯이 겉치레를 떨쳐낸 것이 아닌가 싶다. 미물인 나비조차 허물을 벗는 고통을 이겨내는데, 고비와 좌절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는 것은 존재의 도리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고치를 벗어나는 고통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나비의 탈바꿈은 이어지고, 고치는 추하다면서 혐오하고 나비만을 예뻐한다고 날갯짓을 멈추지도 않는다. 어쩌면 수 없이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것 또한 고치를 벗어나는 순간의 고통보다 더 힘들고 쓰라릴 수 있을 것이다. 힘들거나 벅차다고 포기하지 말고, 입산의 순간에 다졌던 다짐과 각오를 미래의 회향 때까지 가슴에 새기면서 분발해야 할 것이다.
회향의 순간에도 달콤한 안락이 아니라, 시야의 넓혀짐으로 더 많은 가슴앓이에 주저앉고 싶어지더라도 초심을 잊지 않는다면 순간의 경계에도 여일하고 지위와 명예에도 흔들리지 않는 수행자의 분상을 확고하게 떨칠 수 있게 될 것이다.
세 해 남짓한 행자시절, 힘들고 고통스러움에 처했을때 어느 한 스님의 말씀이 많은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고통과 괴로움, 고난의 유익함을 알아야 한다며, 현재의 고통과 괴로움은 뒷날의 보람과 기쁨, 결실과 성취 등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며 불보살님의 가피가 항상 함께 함을 잊지 말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이제까지 가슴에 깊이 새기면서 되돌아 보는 좌표로 삼고 있다.
수연무작隨緣無作, 인생을 살면서 자신의 분수와 인연을 무시하고, 자신의 역량과 능력을 돌아보지 않고 참다운 이치를 등지면서 순리를 어기고 무리하게 목적만을 생각하거나 욕심만을 채우려고 한다면 초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때마다 얼른 알아차려서 자신의 수행을 챙겨야 한다. 마음알아차림, 마음챙김, 마음다스림, 마음살핌의 수행이 어디 기한을 정해 놓고 하는 수행이겠는가. 대중과 생활을 하다보면 간혹 견해의 차이로 논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아직 성글어 익지 않은 어수룩한 부분들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이타적 실천행이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행자시절에 더욱 단련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행자시절이 수행에 중요한 밑바탕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누누이 후학들에게 강조하게 된다.
현재 포교원장으로서 교화와 정진으로 바쁜 가운데서도 관심을 기울여주시는 은사이신 혜총 큰스님, 수행과 학문의 양쪽 길에서 항상 지표가 되어주시는 보광 큰스님, 든든한 의지가 되어주시는 청봉 스님 등 많은 분들의 수행이 나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출가 비구로 수행한 지도 어느새 삼십여 년의 세월이 훌쩍 넘었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씀의 의미가 새삼스럽다. 내 수행의 지표가 되어주셨던 큰스님들처럼 나의 수행 또한 누군가의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발걸음 하나, 한마디 말, 모든 위의와 거동을 무심하게 함부로 할 수 없어진다. 지난해 초여름에는 장마를 앞두고 축대 보수를 위한 작업을 살피고 지시하던 중에 생사를 넘나드는 사고가 일어났지만, 불보살님의 신통가피력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극한 상황을 경험하고 보니 초발심의 행자시절의 수행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고, 더욱 반듯하게 살면서 정진하여 모든 은혜에 보답해야겠다는 각오를 절실하게 다졌다.
행자시절 원고를 준비하며 지나간 세월을 새삼 떠올리자니 부족한 덕으로 여기까지 다다를 수 있도록 가피를 내려주신 부처님과 나반존자님의 무한한 위신력에 눈물겨워 진다.
또한 무생법인을 증득하여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소임을 마칠 때까지 정진 또 정진하리라는 각오도 더욱 새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