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화성사 주지 종묵스님 찻잔을 기울이는 스님 앞에 노란 산동백 두어 송이 피었다. 스님이 다소곳이 차를 한 모금 입에 넣자 산동백은 고즈넉해지고 내 마음은 온화해지는데, 그때 뒷마당에서 아이들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꽃을 좋아하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종묵 스님과의 만남은 스님이 내어준 차처럼 향긋하면서도 구수하고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으며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딱 사람 체온만큼의 은근한 따스함이 내내 느껴졌다. 헤어지고 집에 돌아와서도 손바닥이 뜨끈했던건 내가 느낀것이 사람의 체온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칠곡 화성사 도량에 서 있으면 목탁소리보다 도시의 소음이 먼저 들려온다. 버스 지나가는 소리도 들리고 클랙슨 소리도 들리고 아이들도 시끌벅적하다.‘ 절’하면 보통 떠올리는, 사미승 하나 비질을 마치고 말없이 걸어가는 고즈넉한 산사가 아니다. 누구든 길을 걷다가 문득 들어와 기도를 하고 가는, 집에 있다가도 불쑥 찾아갈 수 있는 그런 옆집 같은 사찰이다. 그것은 종묵스님의 바람에서 비롯 되었다.
“대학에서 불교사회복지를 전공하고 나서 어떻게 부처님의 법을 전할까 많이 생각해봤는데, 포교를 하려면 도심에 머물러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절을 짓던 11년전만 해도 도심에 절이 귀할때였거든요.”
지역민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칠곡도심에 터를 잡았다. 그런데 마침 불사를 끝내자마자 IMF가 왔는데, 스님은 도심에 절을 짓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여유가 있는 이들은 차를 가지고 산사를 찾아가지만 여유가 없는 이들은 언제든 걸어서 갈 수 있는 화성사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잘사는 이들 보다는 힘든 이들과 함께 하는것이 자비를 실천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현재 화성사에서 살아가는 식구는 여덟 명, 75세의 은사스님과 종묵 스님과 상좌스님과 다섯 명의 여자아이들이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은 화성사에서 한 가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주 오래전에 은사스님에게 갓난아이 둘이 맡겨졌고, 그렇게 아이를 키우기 시작했는데 인연이 닿아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지금은 다섯 아이와 함께 지낸다. 고3인 첫째부터 여섯살배기 막내까지 스님에겐 모두 딸과 같은 아이들이다.
“저 아이들이 없으면 이 절집이 얼마나 썰렁하겠어요. 애들이 있어서 집안에 생기가 돌아요.
그리고 내가 저 애들로 인해서 얻는게 얼마나 많은데요. 내가 늘 에너지가 넘친다니까.”
그때 마침 종묵 스님의 은사스님이 문을 열고 들어와 아이들을 품에 안으신다. 아이들은 할머니 품에 안긴 손녀처럼 얼굴을 비비고 가슴을 끌어 안는다. 스님은 주름이 가득한 손으로 아이들 머리도 매만져주고 과자도 집어준다. 스님이 말을 건네자 아이들은‘응’하고 대답한다. 그 모습이 여염집과 다를 바 없다. 새 가족의 탄생이다. 피가 섞였어도 한 가족처럼 살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은 이 세상에, 진정한 가족이란 무얼까 생각하게 된다. 제 피와 살을 나눈 것이 결코 중요치만은 않은 듯하다. 서로에게 버리고 버림받아져 길에서 만나도 제 어미인줄도 제 자식인줄도 모르고 스쳐가는 인간이라는 종족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어제 누가 내게 그러대요. 좋은 일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면 이 애들을 키우지 못했을 거예요. 이 애들은 그냥 식구예요. 곁에 없으면 안되는 식구.”
스님은 아이들에게 법당에 앉을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사회에서 제 부모 밑에서 자란다면 달게 자고 있을 시간인데 아침 예불을 참석하고 뛰어놀 시간에 저녁예불에 참석한다면 아이들이 힘들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사찰에서 살고 있으니 생활 자체가 불교인데 강요를 하면 아이들이 싫증내고 멀리 도망가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그저 아이들의 몸에 서서히 불교가 익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있던 자비도량참법기도회를 하는 동안 아이들이 순순히 법당에 와서 앉았는데, 그때 경전에서 봤던 내용들이 가슴에 남았는지 잘못된 일을 하려다가 발걸음을 멈추는 모습을 스님은 보게 됐다. 그렇게 스스로 깨달아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나중에 어른이 되어 종교를 선택할 때도 좋은 기억으로 인해 사찰에 발을 들일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것이 어린이 포교의 중요성이기도 하다.
“10년 동안 매주 어린이 불교학교 법회를 했는데, 아이들이 중학교에 올라가니까 안 와요. 그렇다고 그 애들에게 강요를 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래서 과연 어떻게 어린이 포교를 할 것인가 생각해 봤어요. 그래서 지금 꾸리려고 하는게 방과 후 공부방이에요.”
직접적인 포교를 위한 공부방이 아니다. 법문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결손 가정이나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해 공부방을 꾸며 맘껏 공부할 수 있게 하고, 음악이나 미술 등 배우고 싶은 것도 배울 수 있게 하고 싶은 마음이 우선이다.
“절에 와서 공부도 하고 친구들과 놀기도 하면서 자연스레 도량을 밟게 되는 거죠. 그러다보면 절과 친밀해지지 않겠어요? 법당 한번 구경해보고 절하는 것도 배워보고 하다가…. 도심 포교는 그렇게 더불어 살아가는 일이에요.”
누구에게나 유년의 기억은 또렷하다. 어린 날 엄마나 할머니 손을 붙잡고 절에 갔던 기억은 불자들에게나 스님들에게나 화사하게 그려진다. 한발 한발 설레며 따라나섰던 절로 가는 길, 그때의 기분은 우리를 내내 부처님 곁에서 살아가게 하곤 한다. 그것이 강요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와 함께 가는 소풍 같은 것이었으니까. 아마도 그때, 마음에 불교의 씨앗이 심어졌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스님들에게 출가 동기를 물으면 어릴적에 어머니 손 붙잡고 절에 갔던 얘기들을 참 따스하게 꺼내 놓곤한다.
“방과 후 공부방 아이들도 어른이 되어 어릴때 절에 와서 공부하고 놀던 기억을 더듬어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이 다음에라도 참 된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주길 바래요.”
스님은 법문을 하다 고개를 들어보면 젊은 세대가 없어서 마음이 답답해지곤 한다. 하지만 공부방에 찾아든 아이들이 절에 와서 놀다 보면 엄마들도 하나 둘 손 붙잡고 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날을 꿈꾼다.
스님은 동진 출가했다. 열 살의 나이에 절에 찾아들어 그때부터 행자를 했으니 벌써 절집에 머문 지 40여년을 훌쩍 넘겼다. 팔공산부인사에서 출가를 하게 됐는데 절에서 생활하는게 마냥 좋았다.
“상노스님이 계셨어요. 일생선방에만 다니셨는데 그 노스님은 혼자계시면서도 아침공양 하시고 아침7시면 입선 목탁 치시고 혼자 좌선하시고 제가 법당에 가서 목탁 치고 사시마지 올린다고 하고 있으면 잠시 방선하시고 그랬어요. 그 상노스님 뒤를 제가 졸졸 따라다녔어요. 공양하고 나서 옛 조사스님들 얘기도 듣고 스님 따라서 빗자루 들고 도량의 가랑잎도 쓸고 화단도 가꾸면서 염불도 외우고 저녁 때면 노스님 방에 군불 넣어드리고…. 당신께서는 자신이 입던 내복을 줄이고 기워서 나를 따뜻하게 입혀주시고 그랬지. 용맹정진 하실 땐 당신 옆에 방석을 하나 놓고 내게 거기 앉아 참선하라고 하셨어요. 그땐 참선이 뭔지도 몰랐지만 노스님 따라 참선 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게 내 마음속에 큰 스승으로 자리 잡았어요.”
스님은 상노스님이 지금 곁에 안 계셔도 그분의 정신과 그분이 생활했던 모습이 남아 있으니 그게 재산 중 가장 값진 재산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님은 늘 그 상노스님처럼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입선, 방선, 울력, 공양시간을다지키며사시는데, 그땐왜그렇게사시는지몰랐지. 이젠 알지만….”
그렇게 상노스님과 더불어 살아가다 보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잊었다. 그 이후 스님은 열네 살에 해인사 약수암서 1년을 살고 열다섯에 운문사 강원에 갔지만 너무 어려서 사리암에서 1년을 더 보내고 다시 운문사에 내려와서 강원 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늘 사회에서 교육을 받지 못 한 것에 미련이 있어 강원을 졸업하던 스물한 살이 되던 75년도에는 중학교에 입학해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승복을 입고 아이들과 똑같이 생활했다. 지금 화성사에서 아이들과 함께 웃으며 살아가는 것처럼. 사진을 찍으며 스님의 웃는 모습이 하도 화사해 앳돼 보인다 말씀 드리니 스님은 얼른 대꾸 하신다.
“아직 애야!”
스님은 요즘 서예와 꽃꽂이에 푹 빠져 지낸다. 예전에 불교교양대학을 7년간 해왔는데 도심에 사찰이 많이 생기자 신도들이 더 크고 좋은 시설로 하나 둘 떠나갔다. 그래서 대학을 접고 그 맥을 이어 문화강좌를 열었다. 서예와 꽃꽂이를 하는데 가르치는 사람도 신도이고 수강생도 신도와 스님들이다. 스님 앞에 놓인 산동백도 스님이 직접 꽃꽂이를 한 것이다. 스님은 끊임없이 무엇이든 배우려하는듯 하다 여쭈었다.
“소임은 소임이지 내 삶이 아니거든. 우리가 선방에 가서 한 생각 챙기지 못할 바에 뭔가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그래서 시간만 나면 먹 갈고 붓들고 앉아 있어요. 그게 수행이지뭐.”
스님은 주지 소임을 맡고 있어 선방에 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현재 미련은 없다. 두 가지를 다 할 수는 없으니 염불하면서 지내고, 기도할 때도 글씨를 쓸 때도 늘‘시심마’라는 화두를 들고 있다. 그렇게 살다가 나이가 들면 대중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다. 마음 챙기는 일에 전념할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얼마 전만 해도 산속에 토굴 하나 만들고 나를 챙기면서 조용히 살까 했는데, 점점 모여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선방에 앉아야지. 여기 내가 없어도 되겠다 싶을 때…. 그런 날이조만간 오지 않겠나?”
스님에겐 양로원을 세우고자 하는 원력이 있다. 지금은 한 달에 한 번 팔공산에 있는 신안마을 노인복지시설에 가서 청소, 빨래, 목욕봉사를 하고 온다. 그러나 그러한 봉사도 중요하지만 우리 신도들 중에 갈 곳 없는 분들을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녀가 챙기지는 않으나 자녀가 있어 오히려 혜택을 받지 못하는 노인들이 많아서 그분들을 위한 양로원을 만들려고 한다.
“거창한 양로원을 짓겠다는 게 아니라, 마음도 몸도 힘든 노인들이 도량에서 목탁소리 들으면서 지내는 게 안좋겠나 싶어요. 좋은시설을 만들겠다는게 아니라 그저 나와 함께 부처님 앞에 앉아 있던 분들을 부모님처럼 모셨으면 하는 거죠. 그게 우리의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잖아요.”
스님이 올 봄부터 열 계획이라는 공부방도 언젠가는 꼭 만들거라는 양로원도 모두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스님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 일게다. 스님은 연세 많은 은사스님을 모시고 살 듯 신도들 중에 힘든 노인들을 모시고 살고자 하고, 지금 다섯아이들과 함께 살아가 듯 꿈이 있으나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고자 하니까, 스님의 그러한 원력은 그래서 아주 멀리에 있지 않다. 어쩌면 벌써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가족사진을 찍는다며 화성사 식구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마치, 할머니 엄마 이모 첫째딸 둘째딸 셋째딸 넷째딸 막내딸까지 모두 모인 듯 하다. 한밥솥의 밥을 먹으며 얼굴 맞대고 살아서인지 모두 닮았다. 한 가지에서 난 꽃들도 다 다른 모양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