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맞이한 새해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일은 어느 민족이든지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보내는 해와 맞이하는 새해의 태양은 다름이 없지만 우리네 인간들이 정해놓은 시작과 마무리의 기준점이기 때문에 지구촌 모든 나라가 상당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본다.
시끌시끌하게 들뜬 분위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폭죽을 터뜨리고 카운트다운을 하며 한 해를 맞이하는 것은 어느새 지구촌의 공통된 축제가 되었지만, 우리에게 설날 아침 떡국을 먹고 조상들께 제사를 올리는 풍습이 있는 것처럼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지구촌
각 나라들도 다양한 새해맞이 풍습을 지니고 있다.
죽을 끓여서 한 해 길흉을 점치는 인도, 복福자를 대문에 거꾸로 붙여서 집 안으로 복이 쏟아지기를 기원하는 중국,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에서는 꿀에 담근 사과를 먹으며 만사형통을 기원하고, 멕시코에서는 포도알 12개를 먹으며 12개월의 소원을 빈다. 이곳 미국 오하이오 지방은 새해 전날 돼지고기와 샤우크라우스(양배추를 식초에 절여서 김치처럼 시큼하게 만든 것)를 먹으며액을 물리치고 행운이 찾아들길 기원한다고 한다.
미국의 새해는 우리나라나 중국처럼 큰 명절의 의미는 아니다. 동서양의 새해 기준점이 다르긴 하지만 우리에게 설이 조상 숭배와 효 사상에 기반을 둔 성스러운 명절의 의미라면 미국 사람들에게 새해란, 해가 바뀐다는 파티적인 의미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새해맞이 행사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의 대표적 새해맞이 행사인 보신각 타종을 기점으로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미국 역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뉴욕 타임스퀘어의 공 내리기 행사로 새해의 시작을 알린다. 특히 올해 공 내리기 행사는 100주년을 맞아 특별이벤트로 9567개의 전구로 만든 크리스털 공이 내려지면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크리스털 공이
탑에 앉게 되는 12시 정각에 카운트다운을 외치던 시민과 관광객들은 화려한 불꽃놀이와 함께 주변 빌딩에서 뿌려진 오색 색종이에 파묻혔다. 타임스퀘어 관광정보센터의 방문객들과 인터넷으로 접수한 새해소망을 적은 소망 색종이가 타임스퀘어를 수 놓으며 뿌려지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호각이나 나팔을 불기도 하고“Happy New Year”를 외치며 새해를 맞는 장관을 연출했다.
타임스퀘어의 새해맞이 행사를 TV로 보던 중 너무나 선명하게 눈길을 사로잡는 로고가 자주 등장했다. 지난해 10월 뉴욕 여행 때 타임스퀘어에서 우리의 발길을 한참 동안 멈추게 했던 바로 그 LG 로고였다. 미국 이곳저곳에서 한국기업들의 광고 매체를 많이 접하긴 했지만 뉴욕의 심장인 타임스퀘어까지 우리기업들이 버티고 있을 줄이야…….
나의 눈엔 더 이상 광고판이 아니었다. 마치 서울시청 앞 태극기가 맨해튼을 차지한 느낌이었다고 할까? 미국에 와서야 Korea는 더 이상 동양의 작은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미국에 온 지 6개월, 이곳 오하이오는 사방이 지평선으로 이루어진 드넓은 평원지역이다. 때문에 한국에서 연례행사가 되었던 산이나 바다를 찾아서 새해 일출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린 새해 일출도 보고 스키도 탈 겸 세븐 스프링 스키장을 향해 이른 새벽 집을 나섰다. 한국에선 해맞이로 아주 분주한 시간이지만 미국의 새해 첫날은 무척 차분하고도 아주 조용했다.
고속도로는 뿌옇게 흐리고 눈발이 날리는 이곳의 전형적인 겨울 날씨여서 일출은 볼 수가 없었지만 우리에게‘오! 수재너’로 익숙하게 알려진 작곡가 포스터, 자선사업에 전념한 철강왕 카네기, 가까이는 슈퍼볼 MVP로 한국을 들뜨게 했던 하인즈 워드가 소속된 구단인 피츠버그를 지나면서 멀게만 생각되었던 인물들이 남긴 흔적을 이렇게 가까이서 느껴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새해 일출을 보지 못한 보상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애크런에서 4시간을 달려 도착한 스키장은 의외로 너무나 차분했고, 한국의 잘 다듬어진 스키장을 상상하며 그보다 훨씬 멋진 곳이리라 기대했던 우리는 실망감이 앞섰다. 하지만 슬로프를 자세히 보면서 자연을 인간의 취향에 인위적으로 맞추려 하지 않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 함께 공존하려는 단순하면서도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짙게 깔려 있는 미국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자연의 품에 안긴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였음이리라.
미국 사람들은 새해 전날 밤늦게까지 파티를 즐기기 때문에 새해 첫날에는 텔레비전 앞에서 풋볼경기에 열중하거나 비디오를 보면서 하루를 보낸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 안에서 하루를 보내기 때문인지 리프트를 타기 위해 줄을 설 필요는 없었다. 오후가 되면서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생후 2주일이 된 쌍둥이를 데리고 스키장에 온 부부까지 있었다. 남편은 스키를 타고 아내는 바구니에 담긴 갓난아기를 돌보고 있었다. 낳은 지 2주일 되었다며 아기들을 바구니에서 꺼내 양팔에 올려놓고 우리에게 보여주며 생글거리는 산모, 한국에선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늦게까지 스키를 즐기다가 아기가 담긴 작은 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스키장을 빠져 나갔다.
‘한 달 동안은 바람도 쐬지 말아야할 산모가……. 이 추운 겨울에 2주 된 갓난아기를……. 더구나 이불로 감싸지도 않고 바구니에 담아서……. 다른 곳도 아닌 눈발이 펄펄 날리는 스키장에…….’말이 이어지지 않았지만, 이것이 바로 미국문화구나! 기독교 나라에서 행운을 빌며 돼지고기를 먹는 것도, 죽음의 신을 달래고 망령의 갈 길을 밝혀주기 위해 집집마다 호박등을 켜는 할로윈데이도 내가 생각했던 기독교 문화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스키를 타던 중 이웃에서 떡국 먹으러 오라는 전화가 왔다. 오늘이 떡국 먹는 날? 그렇구나! 새해에도 먹긴하지… 하지만 미국에서 떡국까지 먹는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조금은 놀랐다.
미국에서는 우리의 설이 차이니스 뉴이어(Chinese New Year)로 불리고 있다. 명절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고 양력 1월 1일 아침 떡국을 먹음으로 설을 대신하는 한국인들과는 달리 음력을 기준하는 중국인들은 춘절(중국설)을 휴일로 정해서 대대적인 행사를 벌이므로 중국명절로 인식된 것이다. 메릴랜드주몽고메리 카운티가 올해부터 아시아계 최대 명절인 설날을 기념일로 지정해 공식 휴일로 만들었다고 한다. 미국 사회에서 갈수록 위상이 커지는 아시안의 존재를 지방자치 단체가 인정하고 존중한 조치로 받아들여진다. 무자년 새해에는 더욱 더 KOREA의 위상을 드높이는 한해가 되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