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마음“대중 통알이요”
새해 첫 새벽 법당에서는 200여명 대중스님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막내스님의 통알을 알리는 소리가 우렁찹니다. 매일매일 드리던 일상의 예불과는 다르게 새해 첫날은 통알通謁로 새벽을 엽니다.
새벽이라기에도 조금은 이른 시간 새해의 시작을 절에서 기도 올리는 것으로 시작하려는 신심 깊은 불자님들 몇 분과 대중스님들은 의식문의 한 구절이 끝날 때마다 부처님전에 지극한 3배를 올립니다.
복청대중 일대교주 석가세존전세알삼배
伏請大衆 一代敎主 釋迦世尊前歲謁三拜
대중은 엎드려 청하옵나니, 일대교주이신 석가세존전에 삼배로 새해 인사 올립니다.
간단하게 해석해보면 아마 이러한 뜻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세속에서의 세배와는 달리, 삼보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함께 하기를 기원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으며 또한 한 해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며 국가와 시주단월과 어른스님께, 대중스님께 서로 인사하는 행사입니다.
세속에서도 조상들께 먼저 차례를 올리고, 부모님, 친척어른들과 형제들에게도 서로 세배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부처님전에 절할 때마다 지극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특히 새해 첫날에는 그 간절함이 더해서,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어떤 것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도를 구하고자 하면 모름지기 정성을 다하라. 정성이 서로 감응하면 능히 도과를 얻는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지극한 마음이라야 한다. 만일 지극한 마음으로 수행하면 구한 바를 반드시 얻으리라.”
《잡보장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도를 구하는 수행자라면 수행에 임하는 첫 번째의 마음자세는 정성스럽고 지극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 하나면, 그 마음 하나로 정진한다면 온 법계가 그 깊은 울림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예불 끝에 마지막 삼배를 할 때 가만히 되뇌어 봅니다.
‘부처님, 바른 수행자의 길을 가겠습니다.’
법당에서 새벽예불을 마치고 대웅전 뜰에서 고개를 들어 새벽하늘을 바라보며 깊게 호흡을 해봅니다. 어른스님들의 뒤를 이어서 여법하게 안행(雁行: 가을 밤하늘을 나는 기러기 모양)하면서 대방으로 돌아오는 길, 그러나 마음은 이미 산을 향해 있습니다.
‘오늘은 어떤 산을 탈까?’
지난 저녁, 저녁예불을 마치고 이부자리를 할 때까지 온 대중이 각방에 모여서 윷놀이를 하며 이리저리 몸과 마음을 움직였던 터라 오늘은 좀 쉬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등산을 계획합니다.
운문사는 영남의 알프스라고 할 만큼 수려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산 너머 석남사까지 이어진 가지산, 문복산, 운문산, 억산, 학산, 장군봉….
한 달에 두 번, 쉬는 날이면 스님들은 어김없이 바랑을 꾸려 혼자만의 고요한 산행을 즐기거나 혹은 둘, 셋이서 숲속을 걸으며 공부를 지어가는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 보이기도 하고, 혹은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힘들었던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며, 숲길을 걷고, 징검다리를 건너고, 비탈길을 오르며, 그렇게 산 정상에 서서 굽이굽이 펼쳐진 산들을 보며 마음을 맑히기도 합니다.
출가하고 산에 살면서도 늘 산이 그리웠습니다. 출가 전에도 쉬는 날이면 곧잘 등산을 다니기도 했는데, 출가하여 등산하는 재미는 그때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겨울 산을 가만히 바라보
고 있노라면, 생기 있는 봄 산이나, 풍요로웠던 여름의 숲, 그리고 화려했던 가을의 숲에서는 느낄 수 없는 소박하고, 솔직한 수행자의 모습을 보는 듯하여 어떤 친근감마저 느끼게 합니다.
따뜻한 물, 커피, 약간의 간식(?)을 바랑에 챙겨 넣고, 아침 공양 자리에 들어갔는데, 도반 스님이 흐뭇한 표정으로 저에게 이야기 합니다.
“스님, 오늘 아침은 떡만두국이라네요”
그제서야 그 표정의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스님들이 좋아하는 만두를 올해도 신도님들께서 어김없이 공양을 해주신 것입니다. 예전에는 대중스님들이 모두 만두 울력을 해서 직접 빚어 먹었는데, 언제인가부터 매년 공양을 해주신다고 합니다.
그 절에서는 신도분들과 함께 며칠 전, 혹은 훨씬 그 이전부터, 온갖 재료를 준비하고, 다지고, 빚어서 운문사 대중은 물론이고, 많은 선방에도 공양을 해주시는데, 그 양이 엄청나서, 만두를 만들 때면 온 도량에 만두를 쪄서 널어 놓은 풍경이 장관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지를 아는지라, 그 정성에, 그 신심에 잠시 마음 한켠이 짠해지기까지 합니다. 어른스님들께서는 항상‘시주물 무서운 줄 알라’고 하시며, 모든 물건을 아껴쓰고, 그 시주물을 헛되게 썼을 경우 어떠한 인과가 있는가를 강조하시고, 밥알 한 알, 물 한방울도 헛되이 쓰지 않기를 간절하게 말씀하십니다.
새해 첫 아침.
다시 일년을 시작하며, 아직은 어둠이 가시지 않은 길을 혼자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떠 올립니다. 살아 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그 안에서 살아왔지만, 그것도 잠시 인연 따라 오고 간 것일 뿐 홀로 새벽길을 걷는 것처럼, 내 수행의 길도 뚜벅뚜벅 홀로 걸어가야 하고, 결국에는 혼자서 당당하게 우뚝설 수 있을 때, 비로소 내 안의 참된 나와 마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겨우내 홀로 매서운 추위를 맞고, 어두운 밤에도 혼자서 몸을 떨었던 이 나무들은 혼자 있다는 것의 의미를 너무도 잘 알 것입니다.
겨울이 지나면, 그 고요의 시간을 오롯이 홀로 지내면, 또 다시 함께 존재하는 풍성한 봄이 오게 된다는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