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아무리 그리워도 엽서를 쓰지 않습니다. 아니, 미처 그리워할틈도 없습니다. 연인들은 방금 헤어졌는데 그새 또 \'안부\'를 주고 받습니다.새해 벽두, 불경한 부담浮談 하나
2006년 12월 31일, 프랑스 남부 도시 낭트에 600여명의‘극단주의자’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습니다. 시위의 명칭은“안 돼(Non), 2007년”. 목표는 분명했지요. 새해를 거부하는 것. 그들은 시위 내내“2007년은 안 돼(No to 2007)”,“ 지금이 더 좋다(Now is better)”등의 문구가 담긴 현수막을 펼쳐든 채 구호를 외쳤습니다. 한 참가자는 AFP와의 인터뷰에서“전세계와 유엔은 12월 31일이 그 다음해로 넘어가는 것을 중단시키기 위해 모라토리엄(유예)을 선언해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기도 했답니다.
올해가 아니라 2006년의 일로, 과문한 탓인지 이번에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시계와 달력 제조업체에 압력을 가하겠노라 호기를 부리기도 했는데, 시계와 달력은 여전히 넘쳐납니다. 그들이 모이지 않았거나, 모였더라도 도무지 힘이 부쳤던 모양입니다. 나로서는 은근히 그들의 건투를 빌었는데, 이렇게 또 2008년 새해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하긴 흐르는 세월을 누가 무슨 힘이 있어 막겠습니까.
답답한 세상에 이런 우스갯감이라도 있어 그나마 좀 낫다고 여길 일인가요. 때로는 나라도 나서서 시위를 조직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나이 먹는 게 겁나서가 아닙니다. 다가오는‘내일’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더불어“지금이 더 좋다”던 낭트 시위대와 달리 나는‘오늘’도 마뜩치는 않습니다. 그‘오늘’도 이미 내가 꿈꾸었던 바의 시간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내가 꿈꾸던 시간은 어떤 것이었을까.
분세질속憤世疾俗의 시절도 있기는 있었는데, 그때 내가 무엇을 꿈꾸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합니다. 나로서는 다만 싸늘하게 사윈 잿더미를 뒤져 어슴푸레한 흔적이나마 좇을 뿐인데, 애를 쓰다보면 가령 어렵사리 이런 풍경 하나 쯤 만나겠지요.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작은 우체국이 있습니다. 마침 눈이 내리시는데 고맙게도 함박눈입니다. 펄펄 날리는 그 눈발속에 바다가 먼저 사라지고, 포구에 정박한 어선들이 사라지고, 이윽고 분별의 눈(目)마저 사라집니다. 그때, 한 여자, 젊지도 늙지도 않은 여자가 우체국 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여자는 눈을 털지도 않은 채 창구로 다가가 엽서 몇 장을 삽니다. 그림엽서가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여자는 손에 들고 온 책을 무릎에 받쳐놓고 잠시 창밖 풍경에 눈 길을 돌립니다. 특별히 할 일이 없던 창구 직원이 흘깃 눈길을 줍니다. 어떤 책인가.‘ 어느 시인의 죽음’.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자서전입니다. 직원은 물론 그것까지 알아낼 만큼 시력이 좋지는 않습니다. 이윽고 여자가 첫줄이 생각난 듯 만년필을 꺼내 들고 엽서를 쓰기 시작합니다. 난로 위 주전자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창밖에 눈발은 풀솜처럼 더욱 성글어지고, 어쩌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 직원은 괜히 무안해져서 헛기침을 하고, 여자는 살포시 미소를 머금습니다. 거기, 바닷가 작은 우체국에서 시간은 꼭 그렇게 흘러갑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사연처럼, 여자의 검은 머리 사이로 희끗희끗 드러나는 새치처럼, 그렇게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바닷가 언덕에 작은 우체국 같은 것은 없습니다. 서둘러 치적을 과시하고픈 지방자치단체 우두머리나 호시탐탐 돈 되는 그 땅을 노려왔던 건설업자들이 곱게 놔두었을리 없지 않겠습니까. 콘도와 아파트와 오피스텔, 그도 아니라면 골프장이나 대형 주차장을 갖춘‘가든’이 진작 들어섰을 터. 나는 혹은 당신은 어쩌다 희미한 옛사랑을 떠올리며 엽서에 소인이 찍혔던 바닷가 우체국 그 언덕을 찾아 나서지만, 뱃전에 금을 긋고 칼을 찾는 어떤‘미욱한’시인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움 조차 쉽게 되새기지 못 합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 편지를받아 먹는 도깨비라고 /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그러다가 소년의 코 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 부치지 못한 편지들 / 가슴 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뿐 /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서러워진다 (안도현,‘ 바닷가우체국’일부)
사라진 것이 어디 바닷가 우체국뿐이겠는지요. ‘어느 시인의 죽음’을 손에 들고 우체국을 찾던 여자도 사라졌고, 빨간 우체통을 도깨비라고 생각하던 소년들도 사라졌습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아무리 그리워도 엽서를 쓰지 않습니다. 아니, 미처 그리워할 틈도 없습니다.
연인들은 방금 헤어졌는데 그새 또‘안부’를 주고받습니다. 어디야? 응, 지하철. 어디야? 응, 방금 내렸어. 어디야? 응, 아파트 입구. 어디야? 응, 엘리베이터 안. 어디야? 응, 화장실. 그것
도 모자라 화장실에서 나온 연인은 컴퓨터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메신저를 시작합니다. 알러뷰, 자기야 ♡♡해.
이렇게 보면 사람들이 전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을 하는 것 같은데, 넘쳐나는 그 사랑들이 미덥지만은 않은 것은 왜일까요.‘ 틈’이 없는 것도 한 까닭이겠습니다. 무엇인가 빈 듯한 틈. 그러나 그 빈틈에 항하사恒河沙처럼 많은 사연이 담길 수 있다는 걸 잊고 삽니다. 편지를 안 쓴지 언제던가. 원고지를 구경한지 언제던가. 만년필을 잡아본지 언제던가. 언 손등을 호호 불며 서점앞에서 벗을 기다리던때 언제던가. 좀처럼 오지않는 막차, 톱밥 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불을 쬐던 승객들, 그 가슴과 가슴에 젖어 있던 아련한 사연들… 명색이 작가인데, 나 역시 이제 그런 풍경에 대해서는 차마 쓸 엄두조차 나지 않습니다. 대신 나는 망설이지 않고 컴퓨터 안에 가득 저장된‘DB’를 뒤집니다.
- 경상대와 순천대 공동 연구팀은 고양이의 피부 세포에 붉은 빛 형광 단백질(RFP) 유전자를 삽입한 체세포 복제 고양이를 생산했다고 밝혔다. 이 고양이들은 보통의 가시광선 아래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자외선을 비추면 온몸에서 붉은빛을 내고, 장기에서도 붉은빛을 내는 것이 확인됐다. 연구진은“형질전환 복제기술을 이용해 질병모델 고양이를 만들 경우 사람에게 직접 실험할 수 없는 질병 치료, 신약 개발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얼마나 황홀한‘소재’입니까.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미련스럽게 엽서를 쓰는 여자 대신 밤중에도 무지개처럼 빛나는 형광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말하자면 기업국가적 정부 시책에 걸맞은 소설을 쓰리라 마음먹습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인수위에 제안도 하렵니다. 그 고양이들을 떼로 청계천에 풀어놓으면 루미날레 축제를 돈 들여서 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몇 마리쯤은 또 경부대운하를 오가는‘환타스틱 리버 코리아’호에 태워 눈요깃감으로 삼아도 될 것입니다. 어떤가요. 내남없이 다 좋은 윈윈게임(?) 아니겠는지요.
다만 생의 리듬을 천배쯤 능가하는 성장 속도에 멀미를 내는 한 시인이 있어, 아마‘희미한 옛고양이의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겠지요. 쓰든 말든, 낭트의 시위대가 붙잡아매지 못한‘내년’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런 따위 불경한 부담浮談(뜬구름 같은 이야기)이나 머리에 그리고 있을 뿐입니다. 국가 발전에 하등 도움도 못 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