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가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다. 수억 겁을 닦아온 사람들일 텐데 언제 출가했고 몇년도에 계를 받았느니 하는 것은 군더더기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나는 출가를 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학교에 다니면서도 한학을 공부해서 열일곱살에 사서삼경을 떼었고 주역을 읽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세속에선 잘 살았는데도 그런 생활이 마치 남의 집에 와 식객노릇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침이면 넥타이를 매고 가방을 든 사람들이 회색빛 건물로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도‘왜 저렇게 살아야 하나, 뭔가 이게 아닌데…’하면서도 그 의문의 정확한 실체를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970년대 초반 동리산 태안사 법회에서 처음 우리 스님(청화 스님)을 뵈었는데, 법회가 끝나고 인사 드린 자리에서 출가를 권하셨다.
“부모가 검은 물감 장사를 하면 자식한테 검은 물감만 묻히지 않겠는가? 출가하시게.”
피식 웃으시면서 옆눈으로 나를 보시던 첫 인상을 잊을 수 없다. 참, 포근하고 편하게 느껴졌다. 스승의 그 말씀이 오랫동안 가슴에서 떠나질 않았다. 결국 오랜 준비 끝에 불가에 들어왔다. 누구보다 산문에 들어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으니 어쩌면 큰 공부를 시키기 위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스승은 계율에 철저했고 착이 없으신 분이었다. 부처님의 그림자에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으신 분이었다. 그래서 출가를 권하신 그 말씀을 의심해본 적도, 훗날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여쭤본적도 없다.
스승은 한없이 따사롭고 자비스러운 분이셨다. 그러나상좌들의 공부하는 것이나 계율을 지키는 것에 대해선 아주 엄격하셨다. 내가 두 번째 연비를 했을 때다. 스님을 찾아 뵙고 삼배를 하고 앉으니 붕대를 감은 내 손을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또 했는가?”
그리곤 일어나 옆으로 돌아오시더니 연비한 내 손을 잡아 주셨다. 잡는 순간 시원한 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연비를 하고 나면 몇 년 동안은 간지럽고 아프다. 그러나 그날 스님께서 손을 잡아주신 후 아픈줄을 몰랐다.
은사스님께선 하루 일종식과 장좌불와를 원칙으로 하셨다. 나는 스승에 턱없이 미치지 못했으나 출가 후 누워자는 것을 경계했고 먹는 것에 조심했다. 예순 중반의 지금까지 한 번도 편하게 지내본 적이 없고 흐트러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우리 스님은 자비를 근본으로 삼으셨다. 자비가 체화된 사람에겐 자타가 없다. 그래도 상좌들에겐 얼마나 찬 바람이 나셨는지 모른다. 공양을 하다가‘청소해야겠다’하셨는데 우리가 공양 후 바로 일어서지 않으면 당신이 먼저 일어나셔서 청소를 했다. 그렇게 솔선수범하시고 강직하셨다.
언젠가 공부가 좀 되었다 하는 생각으로 스님을 찾아뵙고 경계를 말씀드렸더니‘그걸 공부라고 했다고 왔느냐? 당장 나가라’고 하셨다. 섭섭한 마음으로 스님이 계신 곳을 나와 절 누각에 앉아 있는데 보니 한쪽 양말을 신지 않은 채였다.‘ 그때 아하 내가 너무 서둘렀구나’하고 깊이 반성하고 더욱 정진했다. 스님도 그때의 일을 마음에 담아두셨던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미국에 계실 때 찾아뵈니 옛 일을 떠올리면서‘공부할 땐 그런 것도 있는 것이네’하시면서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아닐 땐 찬바람이 나다가도 그렇듯 자비로 감싸주셨던 분이다.
우리 스님처럼 겸손하셨던 분도 드물 것이다. 찾아온 사람이 삼배를 올리려고 하면 일어서 손을 잡고 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꼭 맞절을 하셨다.
나이 스무 살만 넘으면 상대에게 말씀을 놓는 법이 없으셨고 맞절을 하시기에‘젊은 사람들에겐 앉아서 받는 게 순리 아닙니까’하고 말씀드리면‘그 말도 맞네’하시곤 다시 맞절을 하는 것이었다. 돌아가실 때까지 앉아서 절을 받는 일은 거의 없으셨다. 수행자의 근본은 자비요 겸손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던 스승이었다.
그렇다. 그 부처라는 생명체의 근본은 자비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자비롭게 사는 것인가?
간단하다. 매사 긍정할 때 자비가 파동치는 것이다. 긍정이란 모든 것을 내 몫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참회하는 것이다. 인과법을 믿고 연기법을 확실히 믿으면 긍정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자비는 긍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과법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 자비다. 자慈는 능히 즐거움과 더불어 하고 비悲는 능히 고통을 뽑아낸다고 했다. 자는 상대에게‘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잘 한다’라고 하는 것이며, 비는‘참 안 되었다’하면서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런 자비와 함께 할 때 광채가 발산하다. 고진동으로 일어나는 자비의 파동이 빛으로 화하는데 그것이 자비광이며 바로 아미타불이다. 그 아미타불을 염하고 관하는것이 염불이다.
‘정성을 다하고 공경을 다하면 그 경계가 묘하고 간절한 마음일 때 빛이 나니 이것이 바로 아미타불이다’라고 했다. 진심으로 간절하게 염불하는 것이 진정한 불공이며 불사다.
한 번은 고승들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 끝에 스승께서 물으셨다.
“자네가 아는 도는 무엇인가?”
“도는 자비스러운 것입니다. 일체 모든 것을 부처로 보는 것입니다.”
“자네가 언제 그걸 알았던가?”
그날, 스님께서는 미소를 짓고 그 자리에서‘여강如康’이라는 호를 지어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부처(여래)‘ 여如’자일세.”불법은 무엇인가? 도는 무엇인가? ‘…다운’것이다. 수행자는 수행자답게,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남편은 남편답게 아내는 아내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각기 본분사를 알고 지키는 것이다.
감사할 때 열반이 되고 참회할 때 해탈이 되는 것이다. ‘어머님 감사합니다’하고 감사할 때,‘ 제가 잘못했습니다’할 때 몸에서 고진동의 빛이 나오고 그 빛으로 인해 업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도라는 것은 일체 생명을 편하게 하는 것이다. 저해하지 않는 것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도록 그대로 두는 것이다.
《법화경》에‘이 경전을 수지독송하면 귀의 1천 2백 공덕을 받아 삼천대천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코의 8백 공덕을 받아 세상의 모든 향기를 맡으며, 혀의 1천 2백 공덕을 받아 어떤 음식도 좋은 맛으로 느끼고, 몸의 8백 공덕을 받아 청정한 몸을 받으며, 뜻의 1천 2백 공덕을 받아 한량없는 이치에 통달할 수 있다’고 했다. 경전을 독송해도 이러한데 스스로 참회하며 자비심을 낸다면 그 공덕이 어떠하겠는가. 감사할 때 열반이 되고 참회할 때 해탈이되는 것이다.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처소의 이름을 갈앙굴渴仰窟이라 했다. 갈앙은 가문 여름날 쩍쩍 갈라진 논바닥에 단비가 내리길 바라는 농부의 간절한 마음과 같은 것이다. 그러한 간절한 마음으로 불공을 하고 불사를 할 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 부산, 마산, 문경, 강릉, 주문진, 속초, 양양, 동해 등에 있는 신도회의 이름도 갈앙회라고 했다. 도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는 이‘갈앙’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이곳 성원사에 수행 위주의 한국 불교를 알리기 위해 국제선원을 지어서 개원했다. 그 선원의 이름도‘갈앙선원’이라고 했다. 이곳에선 인도·중국·미얀마·태국 등에서 선발된 사미승들이 한국 불교의 수행법과 한국문화등을 배우면서 국제 포교사로 양성되고 있다.
이곳 내가 머무는 강릉은 바람이 청량하고 맑다. 도시처럼 두툼한 바람이 아니다.
그 맑은 바람 속에서 나는 매사 그렇거니 하고 산다. 바보처럼 편하게 살고 있다.□
취재·글 /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