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원시동학元始東學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한국고유종교 산책 - 황선명 1995년 09월 163호
현행 고등학교 국민윤리 교과서에 보면 천도교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ꡐ인내천 人乃天ꡑ 의 사상을 밝혔다고 적고있다. 그러나 사실과는 다른 서술이다. 정확히 말해서 인내천이란 개념은 천도교 창건사를 쓴 이돈화李敦化가 처음으로 정립하였다.
이돈화는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 동경에 유학가서 당시 일본에 소개되기 시작한 서양철학 사상을 연구한바 있다. 그는 동학사상의 본디 취지를 근대 서구사상의 틀에 맞추어 합리적으로 이해시키기에 힘쓴 교리 연구가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동학사상의 본디 방항과 전혀 어긋나는 쪽으로 멋대로 해석한 것은 아니다. 다만 수운 최제우가 「동경대전」이나 「용담유사」에서 밝힌 종지에 충실하면서 종교 교단으로서 면모를 갖춘 천도교의 교리를 올바르게 이해시키려는 하나의 방편이었다고 본다.
이처럼 천도교의 교리와 구별하고 최제우가 동학을 창교한 당대의 시대적 상황과 어울려서 이해하려면 ꡐ원시동학元始東學’ 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천도교가 창교할 무렵인 1910년대의 초기는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겨서 암울한 식민 통치가 시작되는 무렵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반세기 전인 1860년대 초기는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해서 서구 세력이 물밀듯이 동방으로 밀려오는 가운데 우리나라에도 태풍전야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울 무렵이었다. 그 무렵 개화파의 몇몇 선각자들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시대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런데다가 전국에서는 탐관오리가 발호해서 민중들의 생활형편이 엉망진창이었다. 철종13년(1862)의 진주민란은 이제까지 유례가 없던 민중봉기여서 그 여파가 삼남지방으로 널리 번져 가고 있었다.
특히 진주민란의 선봉에 섰던 이필제李弼濟 두령은 의적의 우두머리로 뭇 사람의 추앙을 받는 형편이었다.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는 이러한 시대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동학을 창시하기(1842)에 중국의 관동성에서 일어난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쑥대밭이 되다시피 한 사실을 크게 걱정했다.
그 무렵 나라안은 천주교가 방방곡곡에 스며들어 체제의 위협에 못지 않게 정신적인 위기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특히 최제우가 태어난 경주 일원의 영남지방은 본디 추로지향 鄒魯之鄕이라고 해서 유교의 정신문화를 높이 숭상하는 지역이었다. 추로지향이란 공자가 태어난 오늘날의 중국산동성 일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수운 최제우의 가사집인 「용담유사」에 보면 “하원갑 경신년에/전해 오는 세상말이/요망한 서양적이/중국을 침범해서/천주당 높이 세워/거소위 하는 도를..”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이 바로 영남 유림의 후예로서 천주교에 대한 위기 의식을 절실하게 표현한 내용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동학이란 명칭도 서학-최수운 당시에는 천주교를 이렇게 불렀다-에 대항하는 뜻으로 내세운 명칭임을 알 수가 있다.
실제로 최제우의 아버지 최옥은 퇴계의 문인 가운데 한사람인 것으로 일려져 있다. 수운 최제우는 출신이 서자이지만 그의 저술을 보면 아버지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동학에서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성경신誠敬信의 덕목은 조선 시대 전체를 통해서 모든 유학자들이 특별히 강조하던 터였다. 특히 성誠과 경敬은유교의 종교 의식, 그러니까 제사를 지낼 때 매우 중요시 되던 덕목 가운데 하나였다.
최제우의 저술을 보면 유교의 경전인 중용, 그 가운데에서도 ‘대학장구大學章句ꡑ 에 나오는 문구에서 보고 따온 흔적이 역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최제우의 사상에 독창성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최제우는 우리나라 전래의 기氣철학도 깊이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본디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기氣사상을 이단시 해 온 터였다. 기의 상대 개념인 이理는 매우 중요시 한 반면에 기는 물질적인 속성이 강하다 해서 조선 중기까지 별로 중요시 하지 않았다. 그것은 성리학에서 주장하는 이기귀천설理氣 貴賤說의 영향인 듯도 싶다. 기철학은 또 오늘날도 사상이라 일컬는 노장 사상과도 일맥이 상통한다.
그러므로 최제우의 사상을 쉽게 풀이하면 성과 경의 태도를 지니고 마음을 닦으면 우주만상의 근원인 기와 통할 수 있다는 주장과 일치하는 게 아닐까 한다.
최제우는 말하기를, 기는 허령창창虛靈蒼蒼한데 그러면서도 무사불섭無事不涉이라 하였다. 언뜻 보면 기라는 것이 한없이 빈 허공과도 같지만 실제로 이를 터득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ꡐ나의 도는 무위이화(吾道無爲以化)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남이 보면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은데도 실제로는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 무위이화 때문에 최제우의 사상이 허무주의의 운명론에 기울였다고 비판하는 견해도 없지 않다.
특히 동학은1894년에 녹두장군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혁명군에 의해 외세의 앞잡이에 불과한 세도정치의 허수아비 왕조집권층에 반기를 든 민중운동의 사상적인 연원이 되고 있다. 그렇기에 무위이화가 너무나 소극적이고 안이한 운명론적 대망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논지들이 있다. 그 때문에 최제우의 원시동학 사상에서 동학혁명 운동을 떼어서 생각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최제우 저술의 전편을 통독해 보면 이 무위이화의 사상은 일대의 우주적인 변혁을 예고하는 정신 혁명의 압권이라 할 수가 있다. 오늘날에 우리가 경험적으로 잘 알 수 있는 바와같이 사람의 지능으로 이끌어낸 과학이나, 기술은 전체의 우주적인 변혁에 견줄때는 아주 초라한 것에 불과하다. 사람이 아무리 올바르고 정당한 일을 하려고 노력해도 하늘, 곧 우주의 거대한 힘 앞에서는 속절없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모든 일은 하늘의 조화에서 우러
나온다는 말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무위이화야 말로 우주와 인간의 세상을 지배하는 궁극적인 힘, 곧 기를 터득하는 유일한 방편이다. 이것을 천인합일이라 할 수가 있고 동체귀일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보면 최제우는 도가 사장의 기철학을 지식으로만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몸소 체득한 도인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천인합일의 위대한 힘을 이끌어낼 수 있는 능력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자신이 깨우친 도를 무극대도라고 하였다. 이 세상에 ‘더할나위 없는 위대한 도ꡑ라는 뜻이기도 하다.
최제우가 이러한 무극의 대도를 깨우치게 된 데에는 그 자신의 비범한 천재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여기에 못지 않게 19세기에 들어와서 우리나라 민중들 사이에 팽배해 있던 운세 사상의 영향도 컸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운세 사상은 한마디로 말세론이나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종말론과도 일치한다. 그런데 요즈음 천박한 종말론과는 달리 동양 운세 사상은 심오한 기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데도 조선 시대에는 이러한 운세 사상이 반왕조적 사유를 담고 있는 불온사상이라 해서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운세 사상을담고 있는 예언서인 정감록은 금서로 간주되어 아무나 볼 수 없는 책이었다. 물론 최제우의 ‘무극대도’ 는 정감록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때가되면 후천개벽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던 최제우가 1864년에 사십이라는 짧은 나이에 사도난정 邪道亂正의 죄목을 뒤집어 쓰고 대구에서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가 무극대도를 깨우친 지 오 년만의 일이었으니까 동학을 널리 포교할 기회가 없었다. 최제우는 변혁의 기운을 감지 하지 못하는 조선 사회가
처한 말기적 증상을 꿰뚫어 보고 정확한 처방을 제시한 선각자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종교를 초월하는 사회 혁명론인 듯도 하지만 실제로는 천인합일 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인간중심의 종교사상을 천명한 유례가 드문 대사상가이다. 최제우가 죽은 뒤 우리나라가 겪은 지리멸렬의 혼란은 그의 사상을 제대로 받아들여 이를 정신적으로나 사회정치적으로 실천에 옮길 만한 재목이 없은 탓이기도 하다. 다만 최제우의 ‘성경신ꡑ을 골자로 하는 덕목이나 후천개벽의 사상은 오늘날 우리의 고유종교를 통해서 간신히 그 편린을 엿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