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 김선우/시인무자년 쥐띠 해가 밝았다. 고백하건대 나는 쥐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많다. 내게 직접적인 해를 입힌 바 없건만, 쥐를 끔찍하게 싫어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집안에 놓던 쥐덫이 생각난다. 생활이 풍족하지 못하던 시절, 쌀독을 축내고 병원균을 옮긴다는 이유로 정부 차원에서‘쥐 박멸’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였고 우리는 자주 쥐덫을 놓았다. 쥐가 옮긴다는 페스트 같은 병을 경험해 본 적도 없으면서, 쥐에 대한 막연하고도 살벌한 적대의식이 자라난건 쥐덫과 쥐약이 일상 풍경이던 시절에 각인 된 것이리라.
‘쥐를 잡자’같은 표어나 쥐약 배급, 날마다 오가는 소독차의 뿌연 연기 속에 유신독재와 5공 시절의 살벌하고 비상식적인 횡포들을 얼마간 희석시키려 한 권력의 음험함을 눈치 챈 건 어른이 된 후였다. 현실적인 폭력을 이미지의 공포로 대신하려 한 대타적 희생물로 이용된 많은 것들 속에 쥐에 대한 막연한 적대감도 있었을 거라는 얘기다. 아무튼 한번 각인된 부정적인 이미지의 힘은 크다. 내 눈에 쥐는 정말이지 징그러웠고, ‘박멸해야 하는’대상, 인간의 삶에서 퇴치되어야 하는 대상으로만 비쳤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의 덫에 걸린 동물들이 퍽 많다. 쥐, 개, 뱀, 돼지 같은 동물들을 생각해보라. 우리는 종종 이들을 빗대어 욕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이 동물들에 빗대어 말하기도 한다.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곤 하는 이런 비유는 외형의 이미지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내면적인 요소까지 포함해 상대를 격하시키는 방식이기 쉽다. 이것은 퍽 위험한 말의 감옥이다. 나는 욕에도 일정한 긍정의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건강한 해방구가 되지 못하는 욕은 말의 감옥이 된다. 인간은 자기 이외의 존재들을 격하하는 일을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행한다. 욕을 하게 되는 경우는 대부분 사람에게 분노하기 때문일 텐데, 왜 공연한 동물들을 끌어다 붙여 그들의 존재감마저 훼손하는걸까.
‘쥐를 잡자’는 표어가 집집마다 난무하던 시절, 다락에서 쥐 가족을 본 적이 있다. 갓 낳은 새끼들이 분홍빛으로 고물거리며 어미 쥐의 품안에서 짹짹거렸다. 화들짝 놀란 내가 쥐 가족 얘기를 부모님께 했다. 그런데 부모님은 쥐 가족을 해체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들의 둥지를 달랑 들어 태워버리면 여러 마리의 어린 쥐를 한번에‘박멸할’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어린 생명에 대한 근원적 경외감에서 발원한 이런 정서의 복원이 내게는 중요하게 느껴진다.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지켜지는 문화 말이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은 서로에게 얼마간 위협적이다. 다들 생존을 감당해야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약자들일수록 위협에 많이 노출된다. 인간에게 박멸의 대상으로 구분되는 존재들의 입장에선 인간이 정말 위험한 존재일 수 도 있다.
나는 십이간지를 가진 문화가 좋다. 특히 아시아권의 십이간지는 그일상적인 느낌 때문에 좋다. 우리가 가진 띠 동물들은 용맹하고 멋진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용처럼 신화적인 동물부터 소, 개, 닭, 돼지, 양 같은 우리의 생활에 아주 밀착한 동물들이 있고, 큰 동물부터 쥐처럼 아주 작은 동물까지 두루 있어서 좋다. 십이간지 동물들에게 사람의 옷을 입혀놓은 그림이나 조각들을 볼때면 유쾌해진다. 지구가 인간만을 위한 별이 아님을, 생명 가진 것들은 내남없이 모두 존중받아야 하는 것임을 십이간지의 동물들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십이간지의 맨 앞머리에 놓인 쥐야. 내가 가졌던 막연한 배척감을 용서해라. 인간과 동물의 구분과 차별, 겉모습의 허상 같은 것에 끊임없이 휘둘리는 내 분별심을 용서해라. 분별심을 내는 내 마음을 먹어라.□
김선우 시인은 1996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시집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산문집 <물 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의 사물들> <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 칼럼집 <우리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어른이 읽은 동화 <바리공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