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이 지구라는 별에 태어났을까요? 우리는 왜 21세기 한반도에서 복작복작 살아갈까요? 실존주의자들은 그런 질문조차 싫어합니다. 질문 자체가 마치 존재이유가 있는 것처럼 우리를 호도하고 있다는 겁니다.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거지요. 존재에는 이유가 없다! 이것이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르트르나 까뮈 모두가 동의했던 실존주의 명제 중 하나였습니다.
열정의 무게에 짓눌려 살았던 젊은 날에는 실존주의자들을 좋아했고, 그들의 그 강렬한 명제, 존재에는 이유가 없다는 명제를 참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존재 이유가 없는 것 같지않네요. 이상하지요? 살아보니 산 게 없는데, 지나온 세월을 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들수록, 무상에 사무칠수록 조금씩조금씩 마음 속에 존재 이유가 고입니다. 이제 나는 분명히 믿습니다. 존재에는 이유가 있다고. 그리고 인생은 그 존재이유를 배우게 되는 학교라고. 그 학교에서
우리는 욕망을 배우고, 고통을 배우고, 사랑을 배우고, 증오를 배우고, 집착을 배우고, 용서를 배워야 한다고. 아무래도 그 학교가 가르치는 최상의 과목은 무상이라고.
그런데 참 학교 다니기가 쉽지 않습니다. 욕망에 시달리기는 쉬운데 욕망을 배워 다루기는 어렵고 분노하기는 쉬운데 분노를 넘어 진정 분노가 지시하는 걸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랑도 어렵고 용서도 어렵고 무상을 체화하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공부하기 어려워 헉헉 거릴 때 나는 죽겠다, 소리치며 산으로 갑니다.
자주 산에 드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수다스러워도 착하고, 말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것은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라기보다 산의 정화능력인 셈입니다. 그러니 한반도 어느 산이나 산에 기대 절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겠습니다. 여전히 고대의 햇살과 중세의 바람이 부는 곳, 영원히 회귀하는 그곳에서 잃어버린 마음의 보물창고를 열어보는 것이겠지요.
산에 들어서야 비로소 산이 주는 위로에 눈을 뜹니다. 산에 들면 모두가 착해지지요. 북두칠성이 선명한 그곳에선 사람도 착해지고 슬픔도 착해지고 기쁨도 착해집니다. 나는 거기서 그동안 내가 아귀 같고 아수라 같았음을 참회합니다.
아귀를 아시지요? 아시다시피 배는 남산만 한데, 목구멍은 바늘구멍만한 존재입니다. 당연히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픕니다. 쉬지 않고 먹어도 바늘구멍만한 목구멍으로는 남산만한 배를 채울 수 없으니까요. 우리 사는 세상이 아귀들의 세상 같습니다. 모두들 돈돈돈! 허기에 시달리니까요.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하고, 가난한 자는 가난한대로 가난합니다.
또 아수라를 아시지요? 얼마나 싸움을 좋아하는 존재입니까? 아수라가 사는 세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는 세상이 아수라장 같지 않으십니까? 왜 그렇게 미운 사람도 많고 싸울 일도 많은지, 욕망의 나라에서 태어나 탐욕이 된 채탐욕이 된 줄도 모르는 우리는 멀쩡한 얼굴을 하고 속으로 곪아 있습니다. 거친 세상, 그래도 살아볼 만하다고 선하게 눈을 뜨는 이를 사랑하면서도 모두“네 탓”이라고, “그들 탓”이라고 수군거리며 불평도 많고 불안도 많은 삶으로 스스로 거친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세상은 점점 좋아진다고 호들갑인데 피부로는 점점 더 악착같아진다고 느끼게 되는 건 팔자 좋은 자의 투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악착 같은 세상에서는 안간힘을 쓸수록 깊은 수렁을 만납니다. 그럴 땐 차라리 힘을 빼야 합니다. 욕심도 내려 놓고, 분노도 내려 놓고, 고독이 무섭지 않고 친구가 될 때까지! 그런데 희망으로 포장된 내 욕심을, 절망으로 연민을 얻고 있는 내 집착을, 내 번뇌를, 내 이기심을, 그리고 어찌하기 힘든 나의 자기사랑을 어디까지 놓아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마음이 복잡할 때 나는 절을 합니다. 아주 조금, 절의 매력을 알게 된 나는 절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운동 삼아 하지는 않습니다. 살을 빼는 데는 절이 좋다고, 고혈압, 당뇨에도 좋다고 절의 효과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앞에서 나는 차마, 나도 아침·저녁으로 108배를 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비만치료에 효과적이기 때문에, 혈압에 좋기 때문에 절을 하는 것은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을 하는 것일 테니까요. 그건 살이 찌는 것이 두려워 방어하는 행동처럼 느껴집니다.
아침·저녁으로 30분 이상씩 절하는 데 할애하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도시 생활이라는 것이 바쁘니까요. 절을 하기 전 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빠도 사랑할 시간이 있는 것처럼 바빠도 절할 시간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시간 밖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시간의 중심이 되어 주고 있는 시간인거지요.
사실 절을 하다 보면 기쁠 일도, 슬플 일도 없습니다. 이상하지요. 절을 하다 보면 느낍니다. 내 속의 느낌들이 모두모두 세례를 받으러 나오고 있음을. 당연히 자연스레 내속의 느낌들을 돌보게 됩니다. 내안의 분노를, 두려움을 살피게 되는 거지요. 내 안의 분노를 찬찬히 살피면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보이고, 내 조급증을 찬찬히 살피면 내가 욕심내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내 집착을 찬찬히 살피면 나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관념들이 보이고, 내 고뇌를 살피면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의 축이 보입니다. 그러니 알겠습니다. 욕심과 사랑이 둘이 아니고,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발원문의 이대목을 좋아합니다. 활활 타는 무쇠물은 감로수로 변해지고, 펄펄 끓는 기름가마 연꽃으로 화하여서….
2008년, 도시생활을 피할 수 없는 저의 작은 수행법은 여전히 108배일것입니다. 당신에게도 권합니다.□
법보시 하셨습니다.(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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