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한옥학교에서의 하루
사람은 누구나 삶에 깊이 중독되어 있다. 삶이란 마약과 같다. 끊고 싶다, 끊고 싶다 입버릇처럼 되뇌면서도 결코 끊을 수 없는 마약. 중독자의 끊고 싶다는 중얼거림이 헛소리라는 걸 누구나 안다. 진정으로 죽음을 원하는 자는 죽겠다고 쉽게 떠들지 않는다. 죽음이란 결코 술이나 감상 따위에 취해 띄울 수 있는 가벼운 말 풍선이 아니다. 삶이 지루한 자들은 허무를 훈장처럼 달고 환락의 바다를 떠다니며 자살을 노래하지만, 이들이야말로 애착의 노예들이다.
허무란 죽음의 부모가 아니라 삶의 철부지 자식에 지나지 않는다.
청도 한옥학교에서의 시간도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다. 나를 비롯해 목수가 되고자 한옥학교에 온 사람들 중에는 사, 오십대가 많다. 더러 환갑이 지난 노인도 있다. 오랫동안 살아온 삶에 배신당하고 전혀 다른 삶을 살기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떠한 삶이든 사람은 삶을 살아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존재에게 삶이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즈음은 더 이상 모형 실습이 아니라 실제로 집을 짓는다.
제재소에서 실어온 러시아산 소나무 원목을 직접 목도해서 치목을 하고 대들보, 추녀, 기둥, 도리, 서까래 등을 깎는다. 통나무의 껍질을 벗긴 뒤 다림(수직)을 보고 수평을 잡아 나무의 십반(중심선)을 긋는다. 모든 나무는 십반을 잡은 다음에야 먹줄을 놓고 치목에 들어갈 수 있다. 수직, 수평이 맞지 않으면 각각의 부재가 힘을 고르게 받을 수 없고, 집이 균형을 잃어 틀어지거나 무너질 수 있다. 기둥을 깎을 때는 나무의 상하를 분별한 뒤 작업에 들어간다. 나무의 뿌리부분이 위로 서면 기둥이 힘을 받을 수 없다. 집이 거꾸로 서는 것이다.
집을 지을 때도 나무는 원래 서 있던 모습 그대로 쓰는 것이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 햇볕을 많이 받고 자란 쪽은 햇볕에 노출 시키고, 그늘에서 자란 부분은 그늘 쪽으로 돌려 세운다.
목재를 사용할때는 상, 하 뿐만 아니라 등과 배도 봐야 한다. 대들보나 도리 같이 지붕의 큰 무
게를 감당해야 할 부재들은 등이 위로 걸린다. 흙과 기와의 무게에 눌려 아래로 처질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와집의 서까래는 등이 아래로 걸린다. 위로 치켜 올라가는 한옥의 날렵한 곡선미를 얻기 위함이다. 나무의 상하와 등, 배를 구분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초보 목수들이다 보니 종종 헛갈리기도 한다. 오늘도 서까래 치목을 하면서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누구는 나무의 볼록한 쪽이 등이라 한다. 누구는 볼록한 쪽이 배라 한다.
“내 참, 당신은 당신 배가 남산처럼 둥그니까 볼록한 쪽을 배라 하는데, 원래 배가 둥근가. 평평하지. 등이 둥그스름하게 휘어졌잖아.”
모든 것이 제 눈의 안경이다. 결국 베테랑 목수가 와서 등, 배를 정리해준다. 당연히 볼록한 쪽이 등이다. 실제 집을 지으면서는 소나무를 쓰니 치목하는 도중 가시에 찔리지 않아서 좋다. 모형 실습 때는 낙엽송을 썼었다. 낙엽송은 워낙 빠르고 곧게 자라 산판에 많이들 심었었지만 좋은 목재가 아니다. 게다가 잔가시들이 많아 목수들이 진저리를 친다. 멋모르고 맨손으로 잡았다가는 고슴도치가 되기 십상이다. 나도 낙엽송 가시에 찔려 고생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낙엽송 귀신이 왔다는 소리가 들리면 죽은 목수도 벌떡 일어난다고 했을까.
작업장 옆 숲에서 포클레인 소리가 요란하다. 사람들 웅성거림도 들린다. 초상이 나서 묘자리를 파는 것일까. 하지만 상여 들어오는것을 못 봤다.
“원래 돌보지 않던 묘가 있던 곳이래요.”
나는 무심히 지나쳤는데 관찰력 있는 이 형이 알려 준다. 묘에 개사토를 하고, 비석도 크게 세우고, 묘 주변도 넓게 다져서 잔디도 새로 입힌다. 이 형이 한마디 한다.
“묘에 쓸 돈 있으면 부모 살아 계실 제 잘해 드리지. 저러면 뭐해요. 우리 어매는 그래요. 자식들 다 불러다 놓고, 야야 느그들 나 죽은 뒤 묘에다 쓸 돈 있으면 지금 다 가져오니라. 내 제주도도가고, 울릉도도 가고 여행이나 실컷 다닐 란다. 묏등에 다 쓰는 돈 하나도 쓸데 없어야.”
살아 생전 늙은 부모에게는 무심하던 자식들도 돌아가신 다음에는 개심하여 효자가 되는걸까. 묘 잘 써드리는 것이 마지막 효도라 생각하는 것일까. 거창하게 장례식도 치르고 비싼수의도 해 입히고, 대리석 비석과 관으로 묘 자리 치장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 간혹 더 좋은 명당자리 찾아 이사도 시켜드린다. 그래서 죽어 귀신이 된 다음에라도 자식들 효도를 받으니 저 무덤속의 부모는 행복할까? 아닐 것이다. 대개의 경우 자식들은 결코 개심하여 효자, 효녀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죽은 부모의 무덤을 호사스럽게 치장하는 것은 부모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 또한 자신과 자기 자식들 잘되게 해달라고 그러는 것이다. 죽어서도 부모는 호구다. 늙고 힘없는 노인일 때는 무심하다가 부모가 죽어 다시 제법 힘깨나 쓰는 귀신이 되었다 하니 다시 매달리는 것이다. 자식이란 죽어서나 살아서나 부모에게는 오로지 불효자식이다. 나 또한 그러하다.
죽었든 살았든 힘과 권능이 있다 하면 가서 매달리고 아부하여 이익을 좇는 것이 어쩔 수없는 사람의 본성인가. 저물녘, 한 쪽에서는 산 자의 집을 짓고, 한 쪽에서는 죽은 자의 집을 다시 짓는다. 삶에 대해 알아갈수록 삶에 대한 지식은 단순해진다. 누구는 단순성이야말로 참 된 지혜라 가르치지만 그것이 지혜라면 그것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혜인가. 삶이란 진정삶에 대한 환상을 깨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강제윤 님은 시인이다. 1988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하였으며, 저서로는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 사는 즐거움>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