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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법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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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 김태형 1995년 09월 163호
명종부터 영조까지 이백삼십여 년 동안 조선은 두 번에 걸친 외침으로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급박한 위기를 맞았다.
그 첫번째가 임진왜란이고 두번째가 병자호란이었다. 이 두 병란에서 조선의 불교가 눈부신 활약을 전개했음은 익히 알고 있지만 왜란과 호란 뒤의 조선 사회 신분 구조의 변화를 고려해 본다면 조선 불교의 지위 상승-예를들면 승과의 부활 따위-도 있을 법하지만 현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 탈환전투 등에서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눈부신 활약을 한 휴정 스님이 전쟁이 끝 난 뒤에 일본에 강제 연행된 조선 인민의 귀환을 위해 모진 고통을 참아 기며 노력한 지 이십 년이 지나고 인조가 집권을 하였다. 그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조선 불교에 대해 선의적이고 우호적인 정책을 펴기보다는 오히려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시키는 따위의 탄압을 강화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승군의 활약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활발하였다. 한때는 조선의 정규군을 제치고 의주로 피난간 임금님의 가마를 호위하여 한양까지 온 일도 있었다.
이러한 조선 승군의 활발한 활약도 조선 불교의 위상을 높이는 데는 아무런 약효를 발휘하지 못한다. 오히려 승군은 한낱 산성을 수비하는 수비대나 궁전을 짓거나 성을 쌓는 따위의 일에 일개 사병과 잡역부로 전락하고 만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휴정 스님에게 내린 벼슬명칭을 보면 조선 왕조의 불교에 대한 입장이 잘 반영되어 있으며 이러한 입장은 후대에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당시 선조가 휴정스님에게 내린 벼슬의 이름은 ‘팔도십육종선교도총섭八道十六宗禪敎都摠攝ꡑ 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간추려 말하면 ꡐ승군총사령관‘ 이라는 말인데, 이 직위의 명칭에 등장하는 16종은 선조 이전에 그 맥이 끊어진 전설 속의 한국 불교 종파를 일컫는 총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에 이미 그 맥이 끊긴 16종을 모두 부활시켜주는 듯한 선심성 직위를 휴정스님에게 내린 것을 보면 선조가 급해도 이만저만 급한 게 아니었나
싶다.
한국 불교계의 분규가 있을 때마다 일반 언론에서 흔히 쓰는 말들을 골라보면, 첫째가ꡐ잿밥 싸움‘ 이고 둘째가 ‘닭벼슬만도 못한 중벼슬’ 일 것이다. 결국 아무런 실체도 없는 벼슬, 그것도 한 나라의 왕이 직접 하사한 벼슬마저 도 그 모양일진대 양대 병란 뒤에 조선 승단의 지위 상승은 앞뒤가 맞지 않는 어불성설語不成說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왜란 당시 갖가지 전투 보교서나 상소, 장계 따위를 보면 조선 개국이래 사회, 문화, 정치적 기득권을 가진 유생들의 불교에 대한 시샘은 나라의 위기를 맞이하여 그 환란을 극복하려는 의지보다는 기득권 유지를 위하여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이기주의의 극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충남금산에서 있었던 조헌과 칠백의병들의 무공은 널리 알려진 바이지만 칠백의병과 함께 나라를 구하려다 장렬히 전사한 승군에 대해서는 제대로 일려지지 않았다.
임란이 끝나고 조헌과 칠백의병에게는 그들을 합장한 묘인 칠백의총과 순의비가 남았지만 팔백의 승군에게는 초라한 무덤도, 비석도 없이 금산의 그날 전투는 조헌과 칠백의병이 치루어 낸 전사戰史로 후대에 전해져 온다. 또 경상도와 전라도의 관문인 석주관 전투에서 왜병 일만 명을 맞아 죽기를 각오하고 항전을 벌인 화엄사 스님들의 전공은 이백여 년 동안이나 지리산 계곡에 소리 없이 묻혀 있다.
유생들은 평양성 탈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휴정스님에 대해 ‘병권을 가진 것을 기회로 조정을 욕되게 한다‘ , ꡐ방자한 마음을 품고 많은 졸개를 거느리며 말을 타고 다니며 거만하게 조정 대신을 내려다본다‘ 며 질시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승군의 활약이 눈에 띄게 돋보이자 오히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승군은 관군이 해야 될 국토방위의 의무까지 지게 된다. 조선 사회에서 조세의 의무마저 박탈당한 천민의 신분으로 전락한 승려들이 국방의 의무 마저 지게 된 것이다.
조선의 조정은 국방의 의무를 승단에 지게한 것 외에도 더욱 조직적인 군역을 위해 방번전 防番錢, 고승전 雇僧錢, 번전 番錢을 실시해 전국 방방곡곡의 사찰에 엄청난 재정 압박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폐사 廢寺 되는 사찰이 속속 늘어났다.
병자호란뒤 삼십 년이 지난 현종대에는 주자학 계열의 보수 유교 체제의 강화와 더불어 불가에 대해서는 출가금지는 물론 이미 출가한 승려를 환속시키고 도성안의 비구니 사찰을 헐어 유학 학당을 만드는 따위의 탄압을 가한다.
현종의 이러한 훼불 만행에 대해 그 당시 팔도도총섭으로 남한산성을 수비하던 처능스님은 간폐석교소課廢釋敎疏를 제출하여 헌종의 불교 탄압에 대하여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간폐석교소는 팔천여 지에 달하는 긴 문장의 상소로 당시 조정과 유생들 사이에 상당히 팽배해 있던 불교 배척 논리를 반박하는,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내용들이었다.
결국 조선 중기의 불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하여 그 지위가 상승되기는커녕 오히려 신라와 고려에서 왕사王師, 국사國師의 불교에서 군병軍兵 불교로 전락되었다. 또한 군병 불교만을 통해서 조선의 불교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