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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에 최고의 정성을 다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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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환성/공주 영평사 주지 2007년 11월 309호
중학교2학년 때 출가를 생각했다. 실습시간에 절이 있는 뒷산으로 부엽토를 파러 갔던 날, 그곳에서 스님 세분을 보았다. 밀짚모자를 쓰고 밭을 매고 있는 모습을 보곤‘아! 이 길이다’했으니 비로소 오래 익은 길을 찾은 걸 것이다.

집에선 효자였고 학교에선 모범생이었던 나를 동네에선 애늙은이 혹은 군자로 불렀다. 조용하고 흐트러짐이 없던 나를 부모님도 형제들도 어려워했다. 나도 식구들이 어려웠다. 출가해서 지금 생각해보면 잠시 그 집에 의탁해 있었던 것 같다.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그랬는지 마음속으로 출가를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절을 찾아다니거나 불교 책을 구해서 읽진 않았다. 도의 길을 꿈꾸며 동경하는 그날부터 공부 보다는 사유하기를 즐겼다. 늘 마음이‘사유하는 이것이 무엇인가’에 머물러 있었다. 좋아하는 과목 몇 개만 열심히 공부하고 생각하는 내가 누구인가를 화두로 삼고 앉아 있는 시간들이 늘어갈 즈음, 학교에서의 별명은 이미 도인이요 목탁이었다.

출가를 생각하면서 나를 그리도 사랑했던 어머니에게 자식의 출가에 대한 충격을 어떻게 하면 줄여드릴까 노력을 많이 했다. 해서 없는 말을 지어냈다.‘ 어머니, 저는 중상이랍니다. 지나가는데 어떤 사람이 저보고 절에 들어가 살지 않으면 일찍 죽을 팔자라고 그랬어요’라고. 그 선의의 거짓말로 인해 어머닌 가슴 아프게 자식의 출가를 예견하고 준비하셨을 것이다.

고요하고 깨끗한 세계를 동경하면서 5년여의 시간이 흘러 대학시험에 낙방을 하고 집에 있을 때였다. 하루는 친구가 찾아와‘도인이 있다’고 전해주었다. 그 말을 듣자 마자 집을 떠나왔다. 책 한 권 달랑 든 채였다. 집엔 재수를 하러 간다고 했다.
5년 동안을, 아니 여러 생을 별렀던 일이어서 그랬는지 안면도 간월암으로 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당시 간월암은 배를 타고 가지 않았다. 물이 빠지면 걸어서 들어가는 길이 있었다. 진흙에 발이 빠지는 것도 모르고 걸어서 집에서 세 시간 거리인 그곳에 당도해서 보니 내가 그려오던 세계 그대로였다.

적정寂靜이 살아 숨쉬고 있는 맑고 조촐한 도량에 도인이 한 분 계셨다. 1969년 초봄, 3월이었다. 누더기 가사를 입고 있던 도인이 물었다.
“왜 출가를 하려고 하느냐?”
“절에 살면 제가 찾는것이 있을 것 같아서요.”
“찾는게 무엇이냐?”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찾는 것이 무엇인가가 궁금합니다.”
선승이셨던 은사 응담 스님은 성격이 급한 분이었다.
나의 대답에 설법을 한참 하시고 나더니 삭발을 서두르셨다.
“너는 행자생활을 할 것 없다. 부처님 당시에도‘선래비구야’하시고 나서 곧 수행자로 만들었다. 그래도 형식은 거쳐야 하니까 오늘 삭발하고 계를 주겠다.”
곧 나는 삭발을 했고 스승은 삭발한 그 자리에서 이름을 주셨다.
“네 이름은 환성幻惺이다.”
이 세상 모든 현상계는 꼭두각시 같고 아지랑이 같고 허깨비 같은 것이니, 그것을 깨달으라는 의미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환성을 못했다.‘ 하는 놈’이것을 이름 지어보려고 하는데 여전히 이름 짓지 못하고 있다. 미완으로 남아 있는 이 이름을 죽는날까지 완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출가 첫 날 삭발하고 이름을 받은 다음‘만법귀일일귀하처’라는 화두를 받았으나 내 마음은 늘 일을 하는 놈, 물을 긷는 놈, 마당을 쓰는 놈은 무엇인가에 머물러 있었다.
군대에 갈 때까지 공양주 노릇을 하고 은사스님의 시봉을 하면서 그곳에서 한 해 동안 살았다. 들어오는 날바로 계를 받았으니 행자로 불려본 적은 없으나, 그 한해 동안이 행자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밭도 일구고 물도 길어 나르고 탁발도 하면서 한 해를 보냈다. 한겨울, 1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올 때면 물이 출렁거리면서 흘러넘쳐 바지가 꽁꽁 얼어 찢어질 정도가 되기도 했다.

은사스님과 탁발을 나갔던 일도 생각난다. 부끄럽기만해서 은사스님의 뒤를 얼굴을 붉힌 채 따라다녔는데, 드디어 어느 날‘너 혼자 다녀봐라’명하셨다. 하심을 익히게 하기 위한 스님의 배려였다. 훗날 내가 상좌를 두었을땐 나도 그를 데리고 탁발을 나갔다. 하심을 익히는 데는 탁발을 해보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은사스님은 어려서부터 신 한 번 흐트러지게 놓는 일없고 아무리 급해도 신을 끌고 다닌 적이 없던 나를 보면서‘몸 가짐이랑 걸음걸이가 모두 그대로 수행자로구나. 하나도 다시 배울 게 없구나’하면서 흡족해 하셨으나, 몇 달이 지나자〈초발심자경문〉과〈치문〉을 배우라고 하셨다. 그러는 스님께‘글을 의지하지 않아도 스스로 살필수 있습니다’하면서 배우지 않았다. 스님은 너그럽고 생각의 틀이 큰 분이셨다. 철저하게 배워두면 더 좋다는 것을 아셨을 텐데도‘그래, 넌 배우지 않아도 되겠다’라고 하셨던 것이다.

은사스님은 선승으로 당시 8대 괴각 중 한 분이셨다. 평생을 제방선원에 다니면서 죽비 잡고 사신분이었고 유불선 모두에 대단히 밝았다. 만공 스님의 법제자이신 용흠스님의 제자로 삶 자체가 나에겐 모두 가르침이었다.
덕숭산 호랑이로 불리면서 수좌의 표본으로 사셨던 스님은 양말 하나 빠는 것도 상좌에게 맡긴 적이 없었다. 간혹 해드리려고 하면‘죽을 때까지 할 거냐’하시곤 빼앗아 당신이 손수 하시곤 해서 섭섭하게 했으나 그것이 곧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아주 검소하셨으니 양말 하나 새로 산 적 없고 남이 신다 버린 양말을 전부 주워서 빨아 신은 분이었다. 오신채 하나 안 드시고 예불에 빠지는 법이 없으셨다. 엄동설한에도 문을 확짝 열어놓고 예불하고 정진하셨으니, 그런 모든 것이 큰 가르침이었다.

오직 도만 공부해서 3년 안에 마치고 중생제도하겠다는 각오로 출발한 지 40여 년이 흘렀다. 수행자라면 누구나 그렇겠으나 지금도 금생에 해마치는 것을 원력으로 하고 있다. 얼마 전 젊은 후학 한 사람이‘한 10년 푹 공부에만 전념하고 싶다’고해서‘그렇게 하라’고했다. 공부하고 싶을 때는 앞뒤 돌아보지 않고 밀어붙여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인정이 많아(자비가 아닌) 그러지 못하고 살았다. 제방선방으로 다니다가 20여 년 전, 이곳 영평사로 들어와 살면서 걸망을 몇 번 쌌으나 매몰차게 뿌리치고 떠나질 못했다. 함께 가는 사람들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택했다. 떠날 수 없다면 함께 수행하는 쪽으로 선회하고‘수행과 일과 포교’라는 세 가지 슬로건을 내 걸고 살아가고 있다. 깨달음의 활용은 끊임없이 자비를 실천하는 데 있다. 아직 불법을 친견하지 못했으나 궁극으로는 모든 존재들이 다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을 맑혀 본성을 회복해야 불멸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불멸의 행복을 얻은 다음의 삶은 모든 생명과 조화롭게 공존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수행의 궁극인 본성을 회복하려함도 그것에있는 것 아닌가.

사람은 삶의 매 순간 현재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이 현재의 삶에 깨어 있는 것이다. 더욱이 수행자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세밀히 잘 볼 수 있어야한다. 그래서 날마다나는 자신에게 묻는다‘. 매사에 최고의 정성을 다하고 있는가’하고.

10월 말, 8년째 계속하고 있는 영평사 구절초 축제를 무사히 마쳤다. 깊어가는 가을 새벽, 하늘 아래 겸허하게 피어 있는 구절초 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행복함이 밀려오곤 했다. 구절초 꽃을 보면서 좋아했던 방문객들의 충만한 행복이 전염되어 온 탓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