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로 둥근 해가 출렁 떠오르고 아침을 여는 파도 소리에 천지가 깨어나면 간밤에 쌓은 두터운 업장이 소리 없이 녹아나고 칠흑 같은 번뇌 망상은 어느새 천리물결 위로 달음질친다. 고즈넉한 늦가을 해변을 걷고 또 걷다 무료해지면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소라껍질 수집에 신이 난다. 어쩌다 운 좋게 눈에 띈 크고 잘생긴 소라. 강한 햇살에 달궈진 뜨거운 기운이 손끝으로 전해 오면 금상첨화다. 소라를 우선 가슴에 안아 마음을 달구고 귀에 바짝 대어보면 어느새 바다가 그 안에 있다. 나각은 예로부터 불교의식뿐 아니라 군대음악에서도 연주 되었다.
나각이 불교와 인연이 깊은 악기임은 고대 문헌의 곳곳에서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호랑이에게 공격을 당해 피해 입은 사람들에게 흥륜사의 간장을 바르고 절에서 연주하는 나각소리를 듣게 하여 상처를 치유했다는 설화를 전한다.
조선시대 탁월한 문장가였으며 세조가 추진했던‘불경언해’편찬사업에 큰 업적을 남긴 김시습은 나각을 주제로 한시를 짓기도 하였다. 출가하여 설잠이라는 법호를 가진 김시습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나각을 범나梵螺로 칭하여 노래하고 있다. 나각을 단순히 나각이라 부르지 않고 세속의 악기와 구분하여 범나로 칭하고 있는 것은 불교성악을 범패 또는 범음, 불교사물의 하나인 큰종을 범종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의 시에서 나각이 불교의식 악기로서의 큰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는 예전만큼 중요한 의식악기라기보다는 시련행렬이나 불교무용의 반주 악기로 밖에 연주가 되지 않아 그 명성이 퇴색된 느낌이지만 불교 의식에서의 나각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에도 불교의식에서 나각은 중요한 의식악기였다는 것은 감로탱화가 전해준다. 특히 중단에 묘사된 불교의식 장면 속에서 생생하게 연주되는 나각을 어려움 없이 만날 수 있다. 1723년에 제작된 해인사 감로탱화에서 흐릿한 모습이기는 하지만 법고, 바라, 광쇠 등과 어울려 장엄한 의식으로 대중을 이끄는 나각 소리를 듣고 볼 수 있다. 해인사 감로탱화뿐 아니라 쌍계사, 청
룡사 감로탱화에도 나각이 보인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로 접어들면서 나각이 불교의식에서 사라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아직 알 수 없다.
불교의식에 나각이 연주되는 것은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일본과 티베트의 불교의식에서도 나각이 연주된다. 일본에서는 호라(法螺), 호우라(法螺), 호라가이(法螺貝), 바이(貝), 가이(貝) 등으로 부르는데 도다이지(東大寺)와 야꾸시지(藥師寺)의 수이회라는 법요의식에 사용된다. 또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슈겐도(修驗道)에서는 불교의식의 상용악기로 사용되고 있다. 절에서 큰 북을 법고라고 하여 그 소리는 곧 해탈의 소리요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뜻으로 악기 앞에 법을 붙여 상징성을 강하게 나타내는데 혹 이와 같은 의미로 일본에서도 나각의 명칭을 호라, 즉 법나라고 칭하지 않았을까?
동대사는 나라에 있는 일본의 유명한 절로 745년 창건되었다. 절 자체는 어떤 장식도 단청도 없이 빛 바랜 목조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 그 앞에 서면 화려한 느낌을 갖게 하는 묘한 신비스러운 기운을 느낀다. 그것은 아마도 앉은키가 16미터이고 얼굴길이만 5미터나 되는 비로자나불이 계시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동대사는 내가 교또 유학시절 사슴의 맑은 눈망울이 그립거나, 동대사 비로자나부처님의 그 위엄이 필요할 때면 가곤 했던 곳이다. 열심히 다닐 때는 몰랐지만 동대사의 불교의식에 나각이 연주된다는 것을 안 것은 최근에 동대사 스님은 아니지만 동대사 옆 절의 스님으로부터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각은 불교의식에서만 연주되는 것은 아니다. 군대음악에서도 폭넓게 연주되었다. 《고려사》<악지>에는 왕이 팔관회와 같은 행사에 나갈 때 많은 수의 연주대가 나각을 불면서 수행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조선시대의 많은 병서들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나각은 나발과 함께 군대음악의 필수악기로 연주되었을 것이다.
옛날 일본에서는 스님들이 산속에서 수행할 때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 맹수들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필수품의 하나가 나각이었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산속에서 바다 소리를 듣는 것은 참으로 묘한 맛 일 것이다.
목탁을 악기라고 생각하지 않듯이 나각 또한 악기라고 생각하지 않은 이는 많을 것이다. 그저 운이 좋아 찾아낸 큰 소라일 뿐이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랜 역사속에 소리 없이 존재하여 온 것은 신통한 일이다. 소라가 다른 악기들과는 달리 자연을 담보로 한 순수성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