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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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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재천/해인강원 치문 2007년 11월 309호
후회 사람은 인생을 살아감에 따라 수 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좋든 싫든 갓난아이 때부터 연필을 잡을까, 실을 잡을까, 돈을 잡을까, 이 여자를 잡을까 저 남자를 잡을까에서부터 죽기 전 어떤 관을 선택할까, 육신을 어떻게 처리할까까지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이자 업일것이다. 그러한 선택을 함에 있어서 우리가 먼 훗날 후회라는 것을 않기 위해 최상의 선택 그것이 어렵다면 최선의 선택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나 또한….

2003년 2월 24일은 마산 중리 공판장에 재입사한 날이자 앞으로 10년 동안 매일 부처님께 귀의하며 열심히 살겠다고 맹세한 날이기도 하다. 당시 나는 창녕 남지의 보덕사에 매일 다녔었는데 그 절의 비구니스님께서 평일에는 5회, 주말에는 7~10회 불보살님의 명호를 간절히 부르며 마음으로 업장소멸을 발원하면서 108참회문을 따라 절을 할 것을 권해주셨다. 그러기를 약 7개월쯤, 아내와 나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여 이혼을 하느니 마느니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비록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집사람과 나, 그리고 아이들이 별 탈 없이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었는데… 이혼이라니 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이것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모든 결정권을 아내에게 위임하고 아내의 결정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내는 결국 이혼을 택하고 말았고, 아이들은 내가 키우기로 합의를 보았다.
처음에는 나에게 대체 왜 이런 시련이 오는지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바르게 키울 수 있을까 등등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절에도 더 열심히 다녔고, 아이들에게는 더욱 신경을 써서 잘 대해주었고 내 아이들만큼은 누구보다 훌륭하게 키워내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은 전생에 지은 업에 의한 것이지 다른 사람의 탓이 아니요, 선업을 저축해 놓지 않으면 악은 그 누구에게나 가까이 온다는 것이 하늘의 이치이며,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인연이 다하면 헤어져야 한다는 회자정리의 진리를 조금씩 터득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나와 맺어진 인연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실 절에 그만큼 열심히 다니는데 왜 부처님은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할 가정에 오히려 이혼이라는 가슴 아픈 일들을 안겨주어야 했는지 말이다. 앞으로 절에 계속 다녀야 하나 그만둬야 하나를 두고 갈등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다니던 절의 비구니 스님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그랬더니 비구니 스님께서 “인연이 다해 헤어졌으니 다행이지 만약 둘 중에 누구 하나 잘못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인연
이 있으면 또 만날 수도 안 있겠습니까?”라며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 얘기들 중에“모든 것이 오직 마음에서 만들어진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스님의 말 한마디에 문득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율이 느껴졌다. 나의 사고방식이 본디 부정적인 편은 아니었지만 바로 그 말 한마디에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 후로 나는 창녕 남지 철교 건너 능가사로 절을 옮겨 다녔고 그 절에서 1,000일 회향식도 가졌다. 절에 다닌 지 3년이 지나고 이혼한지 2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불교 관련 서적을 비롯하여 각종 처세술등의 책을 약 300권 정도 읽었고 기도를 끊임없이 계속하며 공판장에서는 3년간 생수통 물을 떠 나르고 밥하고 설거지 등 잔일들을 도맡아 했지만 일이 힘들거나 동료들이 밉거나 하는 일들이 없이 마음이 항상 균일했다. 모든 것을 더욱더 열심히 최선을 다하다 보니 천하에 부러울것이 없었다. “마음이 편하면 보리밥에 시래기국도 향기롭지만, 마음이 불편하면 쌀밥에 고깃국도 소화하기 힘든다”는 말이 나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행복했던 나날들이었다. 아이들 또한 티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다.

그러나 그렇게 평안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어딘가 모르게 생사ㆍ해탈ㆍ열반 등 이제까지는 생소하기만 했던 단어들이 점차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성철 스님께서는‘집이 곧 절이고, 내가 곧 부처다’라고 하셨지만 출가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하면서 궁금증은 더욱 커지게 되었고 스님들께 질문을 던져보아 해결해 보고자 했으나 결론은 결국 내가 내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출가를 고려하는 나에게 가장 큰 고민은‘내가 출가를 하면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하는 것이었다. 지금 이 행복한 순간을 나의 출가로 또 한 번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어야한단 말인가를 놓고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갈등이 이는 한편으로는 지금 현생에서 이 길을 택하지 않는다면 나는 평생 후회할 것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비구니 스님께서 하신 말씀도 생각이 났다.‘ 이 세상에서 가장 대장부다운 대장부가 누구냐. 여자를 수십 명을 거느리고 사는 남자도 아니고 수백 수천억의 돈을 가진 사업가도 아니요 그것은 도를 구하는 수행자이다. 오로지 생사해탈, 나의 출처, 즉 본래 원주인이 누군지를 밝히는 자가 진정한 대장부다’라는 말이 도저히 잊혀지지가 않았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일단 출가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밀어붙이기로 했다. 큰 일이라고 따지면 아이들과 같이 사는 것이 큰 일이겠지만 도를 이룬다는 것에 비하면 티끌에도 못 미치는 일이 아닌가라고 생각을 하게 되니 모든 것이 사소해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예쁜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며 돈을 수십수백을 벌어 수백 평 되는 아파트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산들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죽을 때는 허망한 것을….

이 세상 어느 갑부가 죽을 때 돈을 싸들고 저승 갔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던가. 며칠 몇 달을 더 살려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사를 불러놓고 재산의 절반을 줄 테니 6개월만, 1년만 더 목숨을 연장시켜 달라고 애원해봤자 들어줄 의사가 있겠는가.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 둘 중에서 나는 영원한 것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출가! 출가! 출가! 마침 나의 출가를 도와주는 것인지, 출가 연령제한도 40에서 50세까지로 연장되는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모든 것이 마치 나를 출가시키기 위한 한편의 드라마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서 나는 절에 다니면서 알게 된 큰누나(문수행 보살님)를 찾아가 “누나, 나 출가할랍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큰누나는 그래 정말 훌륭한 판단을 했구나 하시면서 이리저리 알아봐주었고 애들은 서울에 보내기로 결정되어 아이들이 여름방학을 하면 서울로 전학을 시켜 데려다주고 나는 출가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이 모든 결정들은 나혼자 결정한 것들이다. 아이들은 전혀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어서 나는 두 딸아이와 둘러앉아 협상을 하기로 했다. 이른바1차 협상이었다. 나의 제안에 큰딸 주연이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안 된다고 했고, 이혼 후에 모든 것이 안정되어 가고있던 아이에게 더 이상 토를 달고 싶지 않았다. 또한 강제로 결정되었으니 따르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아 그저 잘 생각해보라’고만 했다. “주연이가 안 된다면 출가 안할게. 그러나 다시 한 번 냉정하게 생각해보지 않겠니?”라고 하고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1차 협상은 결렬로 끝을 맺고 말았다. 1차 협상이 결렬된 후 정확히 보름 후 2차 협상에 들어갔다. 그런데1차 협상 때 눈물만 흘리
던 큰아이의 태도가 달라졌다. 아빠의 출가를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아이의 허락에 나는 손을 꼭잡으면서 “잘 생각했다. 고맙다. 주연아, 지금은 우리가 잠시 헤어지게 되지만 영원히 헤어져 있는 게 아니란다. 서울에 유학간다고 생각해보렴. 그리고 너희들도 힘들겠지만 아빠 역시 너희들보다 수십 배는 더 독한 인내를 가지고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되는 힘든 길을 가려 하는 거란다”하며 아이들과의 협상을 결론지었다.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일이 너무나 순조롭게 진행되어 2007년 6월 30일 3년 4개월 정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들의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서울로 전학을 시키고 2006년 7월 26일 속가와의 인연을 마치고 드디어 해인사행 버스에 올라타게 되었다. 가슴 속에는 나의 본래 주인공을 기필코 찾겠다는 대원력을 품은 채 말이다.

절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행자시절이 끝나는 2007년 3월 6일까지 약4년정도 약50만배의 절을 했고, 3,000배는 약 10번 정도, 지장기도, 약사전기도, 108참회문, 자비도량참법, 만불만배, 다라니주력 등 열심히 기도한 것이 지금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그렇게도 힘들다는 해인사 행자생활을 하면서 앞으로 수행하는 데 온갖 장애는 소멸되고, 바로 보고 바
로 생각하고 바로 말하고 바른 행위로 실천할 수 있는 8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수행자가 되겠다는 원을 세우고 100일 동안 매일 천배의 오체투지를 하기로 보경당에서 결심하고 정진했던 그 행자시절이 새삼스럽다. 새벽에 졸려오는 잠을 뿌리치고 오체투지를 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지만 무사히 회향식을 마쳤다. 그 경험들이 지금 강원에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만약 내가 만약 귀의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내가 이혼했을 때 좌절했다면, 만약 딸들이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출가 연령제한이 연장되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찌출가를 할 수 있었을까. 그때 그때 나에게 맺어진 인연들이 너무나 고맙다. 그 고마움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며 겨자씨에 바늘이 꽂히는 확률만큼이나 어렵다는 불법을 만나 후회하지 않는 수행생활이 되도록
정진 정진 정진할 뿐이다.

다만 시절 인연이 깊지 못해 늦게 출가하고 말세에 태어난 것이 부끄럽고 후회스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