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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희양산 봉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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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풍광과 진경 - 이호신 1995년 08월 162호
‘새들도 넘기 힘든 고개’ 라는 문경聞慶 새재(鳥嶺는 전형적인 산간 마을이다.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가르는 소백산맥에는 예로부터 큰 고개가 셋 있는데, 영주에서 단양으로 넘어가는 죽령, 김천에서 대전으로 넘어가는 추풍령, 그리고 그 가운데 자리한 문경 새재가 그것이다.
여러 해 전에 답사회원들과 함께, 일년에 한번 초파일에만 산문의 빗장을 푼다는 봉암사를 찾아 고개를 넘던 기억이 새록하다. 새재인 이화령 고개에서 현기증을 느낄 즈음에 창 밖으로 까마득하게 내려다 보이는 마을이 연풍이다. 조선 후기 불세출의 화가 단원 김홍도가 마지막 벼슬로 연풍 현감을 지낸곳이기도 하여 언제나 이 고개에서는 선인의 체취에 가슴이 뭉클하다. 이번 초파일의 봉암사 길은 하루 전날 밤 심야 버스로 서울을 출발하여 새벽 세시가 조금 넘어 희양산 길목을 밟았다. 사정인즉 불교방송 보리 모니터의 협조 덕에 수행 납자 외에 일절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 법당에서 새벽 예불을 참관하기로 되어 있었다.

오로지 앞선 이의 손전등에 의지하여 발걸음을 떼려니 벌써부터 세속의 귀를 씻으라고 계곡 물소리가 청량하고, 벼룻장을 엎어 놓은 듯한 하늘에서는 마저 두눈까지 씻으라는 듯이 쏟아지는 별빛이 푸르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연꽃 봉우리 마냥 우뚝 솟은 자태가 희양산임을 퍼뜩 알겠는데 청정한 소나무 사이로 얼비치는 봉암사의 불빛은 정녕 피안의 세계에서 흘러나오는 빛인 양 하였다.
묵언黙言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목탁소리도 나지 않는 예불 속에서, 사람이 어떤 대상을 숭배하기 이전에 자신을 낮출 수 있는 겸허의 하심下心을 지녀야 한다 했거늘, 하물며 부처님 앞에 서랴. 좌선의 마음자리와 백팔배의 예불이 붓을 든 이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지는 몰라도 지난 시간 얽혀 있던 마음의 실타래를 풀어 놓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읍하다.
여명과 함께 드러나는 희양산에 안겨있는 가람을 살피려고 경내를 둘러보고 나서 곧바로 앞산으로 올라갔다. 천 년전 지증智證 대사가 신라 문화의 정수인 선풍을 크게 일으킨 뒤로 구산선문九山輝門 가운데 희양산파의 주봉을 이룬 그 빛난 법열은 그 동안 수 차례의 소실과 중창 불사에도 불구하고 그 빛을 이어오고 있음이 무엇이던가.
근대에 이르러 왜색 불교로 만신창이가 된 한국 불교계를 바로잡기 위해, 얼마 전에 열반한 성철 큰스님을 주축으로 한 1947년의 ꡐ봉암결사ꡑ 가 결행되었고, 또 그를 통하여 불조의 정법을 발양하고 교단 정화의 기초를 내린 곳이요, 승가의 존위를 다시 세우고 한국 불교의 초석을 다진 곳이 바로 이 곳 봉암사 아니던가.
얼마 전에 해인사 백련암에서 원택스님이 비장중인, 조선 한지 위에 쓰인 봉암결사 결의문에는 성철. 청담, 우봉, 보문, 향곡, 일도. 자운. 혜암, 월산, 성수, 도우, 법전 들과 같은 대덕 스님이 총망라해 있음을 보고 가슴 뻐근한 감회를 느낀 적이 있다.
그때의 그 눈 푸른 수행 정신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봉암사는, 다시 1982년부터 특별 수도원으로서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면서 청정 수행 도량으로서 오늘에 이르고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잦은 선원의 중창으로 말미암아 애초의 가람 배치에 많은 변화가 더해지다 보니 희양산 봉암사를 화폭에 담기가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무래도, 20세기 불사와 나의 그림을 앞으로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가 내내 큰 숙제로 남으리라 싶다.

햇살이 다사로운 대웅전 뜨락엔 초파일 행사로 흰 팔각등이 가득한데 다른 절처럼 화사한 연등이 아닌 것이 더욱 선원의 마당답게 그윽하여 좋았다.
밑그림을 위한 자료를 챙기려고 분주한 한 스님의 길을 막고서 내 사정을 청하자 스님 말씀이, ꡒ청정 도량을 세상에 알리지 않는 것이 보시행이요, 등을 다는 마음일 게요.ꡓ
그럼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스님은 형形을 버리라 이르고, 붓을 든 이는 상象을 쫓고 있으니.
이것 또한 어쩌면 빛이 있어 그림자 드러남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