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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초꽃 동산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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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경당 바람결 - 영덕 1995년 08월 162호
오래 전 일이다. 하얀 교복을 막 벗고 재수를 하던 무렵이니 참으로 옛날이다. 두 살 터울의 형제들이 오손도손 컸는데, 바로 밑의 동생과 자주 여행을 다녔다. 실은 어릴 때 추억이 깃든 곳을 찾아보는 일이었다. 태백산 주변에서 교편을 잡은 아버님 덕분에 우리는 어릴 적 산에 대한 많은 추억을 갖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한 곳이 통골이다. 그 곳에서 살던 평화로운 한때가 지금도 그립다. 언덕 위에 그림 같은 너와집이 있고 화전을 놓아 감자와 고추, 옥수수를 심으면 전부인 살림살이였다. 오 리, 십 리쯤에 집 한 채가 있어 산속의 적막이 깊어도 종일토록 심심하지 않았다. 약초 할아버지를 따라 산 속을 흩매다가 신선같이 사는 소떼를 만나기도 하고 아이들과 산도라지 더덕을 캐러 다니다 고목 나무에서 꿀을 따기도 하고, 다래 녕쿨 밑에서 포식을 하기도 했다. 다홍색 산나리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차츰 짙어지는 운무속에서 길을 잃은 두려움.
어린 나이였지만 산 속에서 내가 산의 일부이며 같이 숨을 쉬고 때로는 같이 뒤척거리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나 제 몸이 침해받기를 원하지 않듯 산 또한 어떤 이유로든 파헤쳐지기를 원하지 않음을 나는 안다. 자연에 가해지는 인위로 몸살을 앓는 산천을 보며 그를 도울 방법이 무엇일까.
또 하나의 고민을 보태고 만다. 여름 방학 때쯤이었나 보다. 동생과 나는 책 몇 권 챙겨 들고 통골로 들어갔다. 강릉에서 태백선 기차를 타고 통리재를 넘으면 네 시간쯤 걸리는 길이었다. 일 주일쯤 지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앞서 가던 동생이 걸음을 멈추고 무엇인지 주워 들었다. 게질게질 눈올 감으며 꿈쩍이는 고슴도치 새끼였다. 어디가 아픈지 바늘도 세우지 못하고 건드리는대로 내맡긴 모습이 여간 측은하지가 않았다.
“언니, 얘 좀봐. 데려갈까?”
“안돼”
“왜?”
ꡒ이 망초꽃 동산을 떠나고 싶지 않을꺼야.”
“그건 언니 생각일 뿐야.” ꡒ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가야지 이런 애들은 환경을 바꾸면 병이 더 깊어져.ꡓ
ꡒ동물병원이 왜 있는데. 죽어 가는 얘들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살려 봐야지. 보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렇게 웅크린 모습이 얼마나 외로워 보이는지.ꡓ“사람은 사람 속에서, 양은 양의 무리 속에서 살듯, 저마다 자기류 속에 섞여 있을 때가 행복한 거야. 네가 얘를 거둬도 앤 외로워. 또 긴 기차 여행과 낯선 환경이 얼마나 불안스럽겠니. 애에겐 무리야.ꡓ
“그냥 두고 갈 순 없어. 아버지한테 말씀드려 병원에 데려가 살려 볼 꺼야.” “이 애를 살리려면 지금 네 손에서 내려놓고 편안한 곳에 둡혀 파란 하늘을 보며 흙냄새를 싫컷 맡게 해 주어야해?”
ꡒ여기에 두고가면 앤 죽어. 봐, 벌써 반쯤 눈을 감아 버렸잖아.ꡓ ꡒ죽을 줄 알면서도 데려가는 일에 찬성할 수 없어. 우리도 물을 갈아 먹은 탓에 설사하고 기진해서 계획했던 공부도 다 못 마치고 가쟎니. 얘도 사람손을 타면 손독 때문에도 살 수 없어”
“촌수건에 싸서 손독 안 태우면 되잖아.ꡓ “네가 아무리 고슴도치를 사랑해도 고슴도치 엄마만큼은 못해. 지금 어디쯤에서 우리가 무서워 나오진 못해도 가슴 태우며 지켜보고 있을 꺼야 또 정다운 친구가 있을지도 모르잖니. 제발두고가자.”
“언니 살려 보고 싶으니 데려가자. ꡓ“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그 얘들이 가져야 할 작별의 시간을 우리가 방해하고 있는거야.ꡓ
ꡒ언니 말대로면 사림들은 왜 의사가 되려고 몇 해씩 시간을 보내야 해. 병을 낫게 하는 역은 왜 있는거야. 이건 방관이야. 이기라구!ꡓ ꡒ자연에서 나서 자연 속에 있을 때가. 또 그 속에서 죽는 게 더 행복할꺼야.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다 참견하려고 하지 말자. 그거야말로 이기야ꡓ
ꡒ자연은 위대하지만 자연을 바탕해서 인위를 가했을 때 진정한 아름다움이 만들어진다 했어ꡓ그 말도 일리는 있어. 그러나 인간의 생각일 뿐이야.ꡓ
우리는 그렇게 망초꽃 동산에서 한 시간이나 실랑이하였다. 결국 언니인 내가 져 주었지만. 그뒤로 동생들은 더러 바빴다. 통골 고슴도치와 빨간 부리 문조와 개구리 와순이의 무덤을 찾아 화부산花浮山에 다녀와야 해서이다. 사랑하는 누이들 덕분에.
나는 지금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나간 일이나 가버린 사람을 돌이켜 생각할 때 생각하는 그 행위를 추억追憶 또는 추상追想, 추회追懷 또는 낙사진落謝塵이라고 한다. 흔히 모든 것을 마음으로 짓는다고 한다. 켜켜이 깔려 있는 기쁨과 슬픔의 미묘한 교차점인 이 마음이라는 것을 조금 이론화시켜 보면 이렇다. 제법諸法의 성질을 밝히고 진상을 체달하기 위해서 분류법을 쓰는데, 구사론에서는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 유식에서는 오위백법五位百法을 개설한다.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무위無爲의 진리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생멸변천하는 유위법有寫法을 드는데, 이 유위법을 다시 색법色法, 심법心法, 심소법心所法, 불상웅법不相應法의 넷으로 나눈다. 여기에 무위법을 합하여 칠십다섯 가지의 미세한 장으로 제법의 작용을 설명하는 것이다. 심법에 대해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심법의 주체를 심왕心王이라하고심왕에는 심心, 의意, 식識의 세 가지가 있다. 심心이란 집기葉起라는 뜻으로 심왕의 힘에 의하여 사십여섯 가지의 심소心所 및 일과 행동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의意는 사량思量 또는 의지依止의 뜻으로서 깊이 사유 고찰하고 또한 능히 다른 심심소心心所를 발상하는 소의지所依止 뜻이며 식識이란 3別의 뜻으로 반연한 바를 식별하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다시 심왕에는 현재를 직각直覺하는 자성분별自性分別과 과거를 추상하는 수념분별隨念分別 또 삼세에 걸쳐 관계하는 계탁분별計度分別로 나누는데 나는 지금 수렴분별의 어디쯤에 서성거
리고 있나 보다.
지금 그 동생은 시골 국민학교에서 풍금을 잘 치는 선생님으로 남아 있다. 내가 출가를 결심하고 조심스레 말을 내었을 때 동생이 다니는 교회 권사님을 만나 달라고 하였다. 교회 종루 밑 방에서 두 시간이나 이야기를 하였다. 그 뒤 집을 떠났고 동생이 몰래 넣어 준 성경이 아직도 내게 있다. 일 년에 한두 번쯤 통화를 하면 끝맺는 인사는 늘 이렇다. ꡒ언니를 위해 하느님께 늘 기도드려요, 건강하세요.ꡓ 그러면 나는 ꡒ부처님 전에 늘 축원 올리니 열심히 살렴.ꡓ 내가 동생에게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 종교가 소중한 만큼 남의 종교를 인정해 주는 자세이다.
인간을 위한 종교이지 종교의 노예가 되어선 안 된다는 것에 우리는 뜻을 같이 하고 있다.
새벽 예불을 올리고 백팔 참회를 마치고 나면 네시 반이다. 어슴푸레한 여명 속으로 산책을 나가면 흔들릴 듯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망초대를 만난다.
노란꽃 술에 하얀 얼굴은 영락 없이 티 없는 산골소녀이다. 순하디 순한 눈빛이지만 여름이 다가도록 지고 또 피는 정열은 누굴 닮았을까. 망초꽃을 볼 때 마다 눈이 예쁜 동생이 생각나 잔잔히 웃어 본다. 그때 동생은 그 어린 놈을 살려 보겠다고 동분서주 하였다. 야생동물에 대한 치료 연구가 거의 없는 상태여서 스스로 지칠 수밖에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