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임실 태생인 그가 직지사로 출가한 것은 1960년도, 그의 나이 열세 살일 때였다. 당사 직지사의 총무이던 녹원스님을 은사로 수계하고 해인사 강원을 졸업하였다. 군 복무를 마친 다음에도 직지사의 교무와 총무, 부주지 , 그리고 기획실장직을 잇달아 맡았다. 1982년부터는 도리사 주지를 그리고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조계사 주지를 맡기도 했지만 그 때도 직지사 일을 겸해 보았으니 출가 이후로 본사를 떠난 적은 거의 없었던 셈이다.
녹원스님께는 어떤 점을 어여삐 보여 그렇게 오래 발목이 붙잡혔냐고 다소 짖굳게 물었더니, “어릴 때는 틔미하고 우직하기만 하여 희망이 없어 보였던ꡓ데가 많았다고 법등스님은 웃으며 답하신다.
그러나 고암스님 시봉 노릇을 한해 남짓하고 녹원스님을 여섯 해쯤 모시는 동안에 그가 뒷날 탁월한 행정승으로 자라나기까지의 정신적인 바탕을 닦은 듯해 보인다. 내남없이 어렵던
그 시절에 죽으로 끼니를 에우면서도 승려로서의 자기 생활에 철저한 면모를 유지했으며, 공公을 우선하는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삼보의 정재를 무섭게 여기는 마음밭을 탄탄히 일군 것이다.
법등스님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사회의 대규모화와 다변화 현상에 걸맞는 전문적인 신문 행정의 필요성은 시급하고도 절실하다. 행정승, 곧 사판승에 대한 인식은 ‘관청과의 대화창구ꡓ 정도의 수준에서 많이 나아지기는 했으나 아직은 산문 안팎을 막론하고 사회의 변화 보폭에 크게 못 미친다.
그러나 지난해에 종회의원인 스님이 법사위원장으로 개혁 과정에 참여하면서 이룬 몇 가지 일은 그 뜻이 녹록치 않아 위안거리로 삼을 만한 것이었다. 먼저 “주지 승가 고시 시행”을 명문화하였다. 1994년 현재 법랍 십 년 미만의 승려가 주지가 되려면 시험을 치러 자격을 심사받아야 하는데, 사찰운영에 있어 종단내규인 종헌, 종법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문화재관리법 및 전통사찰보존법, 산림법, 농지법, 공원법, 건축법, 도시 계획법 등 사찰 관련 법규 전반에 대한 지식을 습득해야 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문화재의 칠십 퍼센트 이상이 불교 관련 문화재인 만큼, 여타 종교에 비해 관련 사회법 인지에 대한 필요성을 이만큼이나마 제도화한 데에는 만시지탄의 감마저 든다.
가람을 수호하고 대중을 외호하며, 삼보정재를 보호하는 일이 행정승의 의무일진대, 그에 필요한 전문지식의 부족으로 엄청난 손실을 초래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ꡒ우리 8교구의 어느 절에서 통일신라 때의 금동 자물쇠가 나온적이 있었습니다. 그 절의 주지 스님은 신고를 하고 기다렸는데 금동 자물쇠 대신 보상금을 타 가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보상금이란 게 유물의 국가 귀속을 뜻하는 것 아닙니까. 사찰에서 발견된 문화재는 사찰의 소유라는 ‘매장 문화재법ꡑ 을 대고 어렵사리 찾아온 일이 있어요. 사회 일반인이 보기에는 그것이 한갓 유물에 지나지 않겠지만 우리에게는 ꡐ신앙의 대상ꡑ 입니다.”
주지 등 행정에 뜻을 둔 스님들에게 법등스님이 당부하고 싶은 것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가람에 대한 호지 의식, 포교에 대한 외호 의식 등이다. 가람이 “스님들 편하게 지내라고 만들어 놓은 곳이 아닌 만큼”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 주지 자리를 탐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법동스님이 개혁 과정에서 법제화한 것은 또 있으니 , ꡒ사찰의 공개 운영ꡓ을 위한 “사찰운영위원회의 구성ꡓ이 그것이다. 이제는 사찰도 스님의 힘만으로 운영하기는 힘겨우니만큼, 사찰의 소임자와 대중의 공의뿐만이 아니라 “능력있는ꡓ 재가불자들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역설한 내용이 법으로 명시화되어 현재 시행되고 있다.
지금껏 사찰 운영은 주지 스님에 따라서 대중에게만 공개를 하는 곳은 더러 있었으나 원칙이 없었다. 그런데 이 법이 제정됨으로써 사찰 공개운영의 기반이 마련된 셈이다. 사찰 운영 분위기가 이처럼 폐쇄적이었던 것은 지난 날의 역사에서도 그 까닭을 찾아볼 수 있을 터였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따라 대개의 스님들이 대처를 하게 되었고 해방 뒤인 오륙십년대,
수적으로 열세인 비구승이 정화의 기치를 들 때에 재가불자들을 끌어들였지만 그들이 끼친 폐혜가 적지 않았다. 이직 그런 형편이 완전히 불식된 것이 아닌 만큼 실효성에 대해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그러나 법등스님의 생각은 그와는 다르다. 이 법이 제정됨으로써 사찰 공개 운영의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믿는 까닭이다. 실제로 법등스님이 소속된 8교구에서는 운영위가 구십 퍼센트
이상 구성이 되어 지난 2/4분기에 결산 보고회를 했다.
“밖에서 불교 재산이 엄청날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동산, 부동산을 현실화한다면 천문학적인 숫자가 되겠죠. 그러나 그것은 관념에 지나지 않으며 생산성과 연결되지는 못합니다. 그게 사원 경제의 현실입니다.
조계종의 한 해 예산이 천이백억 원을 넘지 못해요. 전국의 이천여 사찰과 중앙 총무원 운영 비용을 포함해서 그렇습니다. 그런 형편인데도 굳이 감추려고 하니까 쓸데없는 오해를 빚는 것이라고 봐요. 지난번에 우리 8교구가 살림살이를 공개하니까 신도들이 ꡐ참 어려운 살림살이를 사셨다ꡑ고 오히려 동정을 합니다.ꡓ
운영위를 구성하여 사찰 운영을 공개해야 할 필요성을 몸으로 체험한 것이다.
문제점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그것을 풀어나갈 방법을 제시하는 데 지침이 없으면서도 여법하건만, 법등스님은 동진 출가하여 ꡒ사회 공부가 모자라ꡓ 대사회 생활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는 데 아쉬운 점이 많다고 털어 놓는다.
이즈음 들어 입산하는 승려의 피교육 수준은 훨씬 높아진 반면에, 여법한 마음가짐은 예전만 못한 것 같아 내심 섭섭하다. 어른 공경하는 마음도 자신의 허욕인가 싶게 빈약하기만 하다.
노인층의 불교가 ꡒ기복 불교ꡓ라고 매도되는 것도 법등스님은 못마땅하다. 그가 보기에 그것은 자신의 안일과 행복만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ꡒ선의 추구ꡓ 행위이다. 농부가 곡식을 거두면 맏물은 으레 공양물로 살강 위에 모셔 두었는가 하면, 산길을 오르면서 아픈 다리를 쉴 때에도 땅에 내려 놓아 흙을 묻히는 법 없던, 그 순정한 마음가짐이 부처님께 제 마음을 전하는 법이었다.
그것이 이즈음의 풍요로워진 풀질로 ꡒ쉽게 올리는 기도보다 몇 곱절 더 아름다운 기도 방식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법랍 서른다섯 해, 부처님 품 안에 들어와 이만큼 성장은 했지만 ꡒ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닌가ꡑ 싶을 때도 없잖았다. 그러나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 후회를 해 본 적은 없다. 공부하는 이판 스님들의 여진을 알맞추 꾸리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온힘을 다 쏟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속 깊은 발원은 이런 것이다. ꡒ이런 생각으로 내 지금껏 살아 왔으니, 내생에는 이 인연, 아 공덕으로 공부만 할 수 있는 그런 복을 주십시오ꡓ
하늘 밑 천자락인 도리사는, 명색이 주지이나ꡒ바깥 일ꡓ로 바쁜 법등스님에게나, 웃돈 많이 준대도 택시 기사가 가기를 꺼린다니 사바의 속인들에게나 매양 하나로 이르기 힘든 곳이지 싶다. 언제 한번 두꺼운 산 안개 걷으며 올라가서 석벽에 새겨져 있다는 아도스님 얼굴 뵈옵고 싶다. 그리고 그 얼굴 주위로 복사꽃과 오얏꽃 흐드러지게 피워 놓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