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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법난의 흐름과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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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 김태형 1995년 08월 162호
전기의 법난
조선의 법난사를 총괄적으로 열거해 보면 탄압, 부흥, 탄압, 부흥, 그리고 또 탄압의 질폭의 역사를 걸어 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태종, 태조로 이어지는 탄압기를 거치고 나서 세조의 등극으로 일시적인 부흥기를 맞다가 다시 성종대에 이르러 탄압받고, 명종대에는 문정왕후익 후원으로 부흥을 누리고, 그리고 또다시 탄압이 이어지는 식으로, 왕권이 교체될 때마다 탄압과 부흥이라는 파도타기를 해야만 했던 것이 조선 불교의 숙명이었다.
조선 왕조의 불교 탄압은 전반기와 중반기 그리고 후반기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전반기는 태조대부터 중종대까지이며, 명종대에서 영조대가 중반기, 정조대부터 고종대까지가후반기로 구분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 구분과는 관계없이 조선조 전체의 분위기는 유교지상주의에 입각한 불교의 탄압시대로서, 세계 종교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오랜 세월인 오백여 년 동안 지속된다.
유교 왕조에 의한 오백여 년 동안의 불교 탄압은 우리나라 근대, 현대사에 이르러 치명적인 불교의 왜곡을 가져왔으며 그 폐해는 현대 한국 불교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 대표적인 보기가 바로 통불교 通佛敎의 전통이라 일컬어지는 것이다. 상당수의 불교도들이 통불교를 마치 한국불교의 전통인양 자랑하고 있지만 실제로 한국불교의 전통은 중국과는 상당 부분 차이가 있는 종파 불교의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었다.
통불교의 폐해는 법화경, 금강경, 열반경, 화엄경, 해밀심경 , 중론, 백론 등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현재의 종단법회나 소개서 등에서 잘 드러나 있다. 물론 시대의 사상적 흐름에 따른 특정한 종파의 기득권 장악이 한 시대의 불교를 주름잡을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결코 그 종파만이 불교의 전부였다고는 말 할 수는 없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점이다.
고려말과 조선초의 불교 종파는 조계종, 총지종. 천태소자종, 화엄종, 신인종, 남산종 들을 위시한 열한 개의 종단이 있었다고 기록에 전해진다. 그러나 태종7년에는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등의 일곱 개 종단으로 축소되며, 세종6년에는 일곱 개의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불교의 명맥만을 남겨 둔 채 축소시켰다. 그러다가 성종과 연산군 이후에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 오던 선종과 교종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통합 종파, 곧, 선교종 禪敎宗으로 전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통불교라 지칭되는 한국 불교의 역사적 자랑은 자의自意에 의한 결과라기보다는 타의他意에 의한 불행한 역사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실 새로운 왕조를 건립한 이성계의 재위 기간에는 크게 눈에 띄는 배불排佛의 움직임은 없었다. 오히려 이성계는 퇴위 뒤에 송헌거사松軒居士라 호를 짓고서 남은 여생을 염불삼매로 보냈다. 이러한 이성계의 신불言佛 성향은 2대 정종에게도 영향을 끼쳐 특별한 배불 정책을 취하지 않았으니, 당시에 민간에서는 법석法席, 반승反僧과 불교식 제사 따위가 고려조와 다름없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제3대 태종이 즉위하면서 사정은 완전히 달라져 본격적인 숭유억불 崇儒抑佛 정책이 시작되었다. 태종이 시행한 대표적인 억불 정책을 꼽자면, 사원의 수를 줄인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승려의 환속, 사원 소유 토지의 몰수, 사원 노비의 군정軍丁 충당, 도첩제 실시의
강화, 열한 개 종파를 일곱 개 종파로 축소, 왕사 및 국사 제도의 폐지, 능사陵寺 제도의 폐지 등이 있다.
태종의 훼불 정책은 불교의 교세 약화라는 측면에서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러한 훼불정책은 후대의 왕들에게도 전승되었다.
첫째가 인적 자원의 축소를 통한 불교 교세 약화이고, 둘째는 재정 기반의 박탈을 통한 교세 약화, 셋째는 권력으로부터의 소외를 통한 교세의 약화, 그리고 넷째는 불교 관련 제도 강화를 통한 교세 약화로 구분할 수 있다.
불교의 교세를 제한할 수 있는 이러한 대불교 정책은 결국 불교를 손바닥 위에 놓고 마음대로 죽이고 살리겠다는 유교 왕조와 기득권층의 계산된 정책이었다.
중국에서의 폐불 정책은 보통 한 대로 끝났지만 조선의 폐불 정책은 태종에 이어 제4대 세종에게로 이어져 억불의 차원이 아닌 훼불의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세종은 만년에 불교에 귀의하는 봉불왕奉佛王이 되지만 집권 초기에는 태종을 능가하는 배불왕排佛王이었다.
세종이 행한 폐불의 내용을 보자면, 사원 노비의 완전 귀속, 일곱 개 종파를 선교 양종으로 폐합, 사원의 대폭 철폐, 내불당 폐지, 도성내 사원의 완전 철폐(흥천사와 흥덕사는 존속). 철폐된 사원의 동불銅佛 동종鋼鐘을 녹여 병기로 만들기,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 도첩제 강화와 연소자의 출가 금지, 갖가지 불사의 축소 따위와 같은 것들이었다.
세조 때에 와서 불교는 일시적으로 흥기를 맞지만 그 뒤를 이은 성종대에는 다시 탄압이 시작되었다. 성종 당시에 성현成現과 허봉許封의 용제총화傳齊叢話와 해동야언海東野言을 보면ꡒ도첩제도를 강화시키고 도첩이 없는 자는 머리를 기르게 하여 강제로 환속시키므로 도성은 물론 주변의 사찰들이 빈 절로 남아 있는 허다했다.ꡓ고 기록에 전한다.
성종에 뒤 이은 연산군은 집권 초기까지는 인수대비의 영향으로 특별한 척불斥佛정책은 펴지 않았지만, 인수대비가 죽은 뒤에는 선교 양종을 완전히 폐지하고 연산군 이전의 선왕들마저도 손대지 않았던 흥덕사와 원각사 같은 도성 안의 사찰을 철폐하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는 폐불을 단행하였다.
그는 또 불교의 맥을 잇던 승과僧科마저 폐지시킴으로써 불교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