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에 대한 대응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로 조금 다른점이 있다면, 비록 위장일 수 있으나 생산 현장에서 발생하는 노사간의 문제를 대화와 협상으로 풀어 가도록 ‘권장’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는 기업가들이 대화를 선택하기보다는 정부의 개입을 전제로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었다. 따라서 산업 현장에서의 쟁의는 단체 협상의 결렬, 쟁의 발생, 파업 그리고
즉각적인 공권력의 투입과 노동자의 대량구속, 수배 및 노조의 어용화 시도 등의 순서가 정해진 절차였다.
하지만 현 정부의 출범 이후 몇몇 대규모 사업장이 노사화합의 실천이라는 본보기를 보이면서 전체 분위기를 대화와 협상으로 유도하고 있다. 물론 이면에는 일본엔화의 절상으로 맞이한 수출 경기가 활성화될 수 있으므로 이 때를 경제 도약의 계기로 삼자는 정부와 기업가
의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정부와 기업가의 시각이 변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태도의 변화에 불과하다.
ꡐ건전한 노동쟁의는 정부가 보호하겠으나 정치적 목적을 띤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용인하지 않겠다ꡑ는 정부의 으름장에 담긴 뜻은 결국 정부가 판단하기에 따라 합법적인 노동쟁의 자체를 불법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며 나아가 정부의 손 안에 노사 양측 모두를 묶어 놓으려는 의도가 깊게 배여 있다. 이번 한국통신의 경우나 지하철 공사의 경우를 보면 열악한 근로 조건의 개선과 아울러 치솟는 물가를 반영한 임금 현실화를 요구했고 여기에 보태 국제무역기구 체제의 출범 이후 미국과 서방 선진국의 개방압력을 받고 있는 통신 시장의 보호를 주장하였다. 이런 노동자의 요구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엉뚱하게도 ꡐ국가전복ꡑ 이라는 허울을 씌워 노조의 요구를 묵살하였다. 노조측의 설명에 따르면 쟁의 발생 이후에도 이십오 일 동안의 냉각기를 갖고 평화적인 해결을 하려고 했으나, 한국통신공사 측은 노조 간부들을 ‘징계ꡑ 하기 위한 절차만을 고집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징계위원회 출석 요구서를
노조 간부의 을 찾아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이이의 지장을 받아 전달했다고 한다.
도저히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절차를 밟고 나서는 노조 간부를 업
무 방해로 고발하고 정부는 즉각 노조 간부에 대한 수배 조치를 하였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국제 노동기구는 한국의 노동 현실을 우려하며 한국정부에 대해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곧 노조의 정치활동을 금하고 있고, 단체교섭권에 중대한 장애가 되고 있는 직권중재제도와 제삼자 개입금지, 복수노조의 금지 그리고 교원노조결성을 금지하는 등의 비민주적 조항을 철폐 개선토록 할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여전히 구태의연한 안보 논리를 내세워 ꡐ건전한 노동운동ꡑ 을 탄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문민정부의 실체라면 국민은 기만당한 것이다.
현 정부의 종교관
이미 6월 6일 공권력이 성소를 침탈하기 이전 정부와 보수 언론은 치밀하게 여론조작을 했었다. 그들 나름대로 인내를 갖고 수배된 노조간부의 무리한 체포를 자제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언론을 이용했다. 종로경찰서장과 중부서장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각각 조계사와 명동성당을 방문하기를 되풀이했다. 언론은 이들의 표정을 그럴 듯하게 잡아주었다. 그리고 신문은 사설을 통해 법 집행에 성역은 있을 수 없다ꡑ 며 공권력의 투입을 합리화 시키고자 열심이었다. 약한 노동자들이 찾아든 사찰이나 성당을 성역이라고 규정한 것은 정부와 언론
이었다. 정작 조계 종단이나 가톨릭 성당 측은 ‘사회의 실정법 적용이 차단되는 특수한 공간 을 뜻하는 ‘성역ꡑ이라고 말한 적은 없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국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유독 언론이 앞서고 공권력이 뒷받침되어 붙혀진 이름이다.
자신들의 합법적인 주장이 사용자와 정부에 의해 묵살된 노동자들이 닥쳐 오는 위협을 피해 찾아들 곳은 어디였을까. 출발하는 전철까지 강제로 세우고 유리창을 깨고 최루가스를 살포하는 이 나라의 살벌한 공권력을 피해 마지막 남은 피신처는 성스러운 종교 시설만 남아
을 뿐이다. 만일 파렴치한이 종교 시설을 찾아들었다 하더라도 그가 참회하며 스스로 자신의 발로 법정에 설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 전통적인 한국 불교의 관례였다. 또한 지난 암울한 정치상황에서 교회가 그런 역할도 했었다. 더욱이 올바른 주장을 펴다가 권력에 의해 탄압을 받는 사람을 보호하는 일은 종교가 앞장서 해야 마땅하다.
종단이나 성당 측이 무조건 노동자를 옹호하지는 않았다. 노동운동을 하려고 그들을 옹호하지도 않았다. 공사 측의 주장과 정부의 입장 그리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고루 들어보고 가능한 타협 점을 찾는 역할을 하면서 사태의 원만한 해결을 하고자 했다. 그런 일은 정부가 나서서 주관해야 할 일이건만 정부는 편협하게도 오직 강제연행만을 고집했으므로 부득이 종교가 맡게 되었다. 하여 수차례에 걸쳐 정부의 해당 기관을 찾아갔고 공사측과 노조원들과의 대화를 주선했다. 6월 5일에도 삼자가 수긍할 수 있는 중재안을 마련하여 평화적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으나, 6월 6일 성지를 침탈하여 강제연행을 하였다. 그것은 곧 현정부의 국민의 정신적 지주를 담당하는 종교의 존재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다.
현 정부가 취하는 일련의 대응방식이 문민정부로서의 자격을 잃은지는 꽤 오래 되었다. 대외적으로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는 자신감 있는 외교는 상실한 채 굴욕적인 양보로 일관하고 있으며, 대내적으로는 ꡐ개혁ꡑ의 실천보다 내실없는 구호만 난무하고 있다. 게다가 언론을 이용한 국민 여론의 호도에 급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제발 박아무개 신부와 같은 사람을 부추겨 국민을 짜증스럽게 하는 일은 이제 중지하고 겸허한 자세로 정치를 하길 바라는 마음은 지금 모두의 심정임을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