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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선운산 선운사 불교유적-삼장보살을 조각상으로 갖춘 국내에서 하나뿐인 삼장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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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이태호 1995년 07월 161호
선운사는 변산반도의 아래쪽에 움푹들어간 곰소만과 직선 거리로는 불과 오 키로미터 안팎이다. 이러한 지리적인 배경으로 보아 일찍이 선운사는 곰소만의 생산 활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을 것이다. 곰소만 주변에는 선운사 외에도 내소사와 개암사라는 명찰과 변산, 격포 해수욕장과 채석강이 있다. 특히 인촌 김성수의 생가도 곰소만과 이 키로미터 안팎으로 가까워서 호남의 거부였던 부친 김경중의 축재 과정이 바로 염전과 밀접하였을 거라는 추측을
해 본다. 선운사 답사는 이 곳 곰소만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
풍천 장어집들이 즐비한 곳에 다다르면 선운사에 다 온 것이다. 노령산맥 갈재 서북쪽 물을 끌어 모아 흘러내리는 인천강二川江. 영양가가 풍부한 인천강 민물이 서해 곰소만의 바닷물과 어우려진 이 곳 풍천에서 잡히는 장어는 주로 숯불구이로 먹는데 맛이 담백하고 구수해 널리 알려졌다. 여기에 산딸기로 만든 복분자술을 곁들이면 도솔천이 저기란다.


가시다가 여사님, 오시다니 문세광
ꡐ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 했고/막걸리집 여자의/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니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읍니다” 군사정권 때 미당未堂이라는 호를 말당末堂으로 잘못 읽은 나라 덕에 더욱 유명해진 서정주의 시비가 입구 길가에 서 있으나 누구도 들어가 보지 않더라. 시는 그리 좋아도 사람이 만년에 웬만했어야제.
‘가시다니 여사님, 오시다니 문세광’ 으로 망령이 난 말당을 우리는 잊어버렸다. “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동백꽃처럼 활짝 핀 날이에요...ꡓ라는 송창식의 노랫말처럼 활짝핀 동백꽃을 보려면 4월 하순이 제철이고 동백꽃이 송두리째 떨어지는 낙화의 무정함을 맛보려면 5월 초가 좋다.

화엄종주백파대율사 대용대기지비
선운사 어귀쯤의 부도와 비 밭에는 역대 고승들의 무덤과 행적비 들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의 눈길과 발길은 백파스님의 비로 향한다. 하도 탁본들을 많이 해대니까 절에서 비를 보호하려는 요량으로 콩기름을 발라 버렸다고 한다. 눈에 좀 거슬리지만 매끈거리는 비면을 만져본다. 추사 선생이 비문을 쓴 백파 선사의 비이다. 백파스님은 화엄과 율에 조예가 깊었으며 화엄사에서 입적한 분이다. 백파비 가운데 추사의 글씨가 아닌 곳이 더 있다고 하
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것은 완당학사 김정희와 숭정기원후로 시작되는 건립 일자인데 여기까지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 맨 마지막 한 줄이 추사의 서체가 아니라는 임창순 선생의 고증이 유홍준의 답사기에 소개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줄을 다른이가 비슷한 서체로 써야 할 만한 또 다른 이유라도 있었다는 말인가 실수로 찢겨진 것인지 내용상 무슨 문제가 있어서 다시 썼는지는 백파와 추사는 모를 것이고 오직 백파스님 상좌들만이 아는 일이리라.
백파 긍선스님이 「선문수경」이라는 삼종선 등의 선문 요지에 대한 책을 펴내자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 선사가 발끈하여 왕복 토론을 벌인다. 초의의 논지는 「선문사변만어」에서 잘 나타난다.
그 논쟁의 와중에 초의의 절친한 친구인 추사가 끼어들어 이 논쟁은 점입가경에 이른다. 추사가 백파의 오류를 적어 보낸 편지에 대하여, 백파는 열세 가지로 요약한 논증을 답신으로 보낸다.
이에 추사는 다시 백파의 논지가 잘못되었음을 열다섯 가지로 일일이 논증한「백파망증 15조」를 보내면서 감정적인 용어까지 섞어가며 백파를 비난하자, 백파는 일일이 대꾸하지 않는 수미산과 같은 모습을 보임으로써 한판승을 거두고 만다. 하지만 그렇게 막말까지 써 가
며 토론을 벌이던 추사가 백파의 비문에서는 스님에 대한 공손함과 존경을 가득담고 있어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귀양 전 오만으로 가득찼던 모습과는 달리 제주도에서의 귀양살이가 인생 공부를 좀 시켜서 이렇게 백파스님을 공경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죽은 자에 대해 단순한 예의 차원에서인지 오직 추사만 알 일이다.

천장, 지장, 인장보살이라는 상장보살의 조각상 체계를 갖춘 국내에 하나 뿐인 삼장도량
선운사 여기저기에는 지장보살같이 생긴 분이 세 분 있는데 모두 다 지장보살이라고 함은 잘못된 것이다. 선운사 본절에 있는 분만 지장보살이고, 도솔암 내원궁에 있는분은 천장보살님이고, 참당임에 있는 분은 인장보살님이시다. 선운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흔히 백파
선사와 추사의 논쟁과 백파의 대용대기지비 글씨에 대해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장광설을 늘어 놓으면서 정작 삼장보살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삼장보살의 명칭이나 도상이 어디에서부터 유래되었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조선시대 이전의 삼장보살 신앙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전혀 없고,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삼장 신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삼장 신앙을 지장 보살의 신앙이 더욱 심화되고 확대되어 우리 민족 고유의 신앙인 숭천신앙 崇天信仰과 지지신앙地祗信仰 및 망인락지천도신앙亡人樂地薦度信仰을 수용한 소박한 삼계 우주관三界宇富觀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장보잘 가운데 천장보살은 상계교주 上界敎主로서 천상과 지상 그리고 지하의 삼계 교주로 신앙되어 왔다. 이러한 삼장보살 신앙은 불교에 뒤섞인 민족고유의 신앙인 산신, 칠성 신앙과 함께 새롭게 접근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삼장보살 신앙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있는 것은 겨우 임진왜란 전후에 등장하는 삼장보살 탱화 정도이다. 삼장탱화는 중단탱화로서 성격이 분명하였으며 임진왜란 직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건륭연간(1736~1795)까지 많이 제작되다가 그 뒤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 까닭은 망인락지천도를 뜻하는 지장 신앙이 다시 강조되어 지장 탱화로 분화됨에 따라 그 명맥을 잃게 된것으로 보인다. 다만 삼장 탱화는 신중탱화 속에 수용되어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삼장 탱화가 봉안된 절로는 파계사(1707) , 고성 옥천사(1744), 영국사(1722), 천은사(1776),용주사(1790), 통도사(1792), 동화사(18세기) 등이 알려져왔는데 모두 18
세기에 제작된 탱화들이다. 최근에 전남 담양 용구산의 반야암에서 만력 십일년(1583)에 조성된 삼장시왕탱이 일본 안국사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담양 반야암 삼장탱화를 통해 임란 직전에도 삼장 탱화가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지만 우리나라 삼장보살 탱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탱화를 일본에 약탈당했다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사실 선운사를 조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탱화로서의 삼장보살이 아니라 조각상으로서의 삼장보살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이야기를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다. 먼저 선운사의 삼장보살이 정말 제작 당시부터 삼장보살 체제를 갖추려고 의도적으로 조성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해야 한다.
보통 천장보살은 설법인을 취하고 인장(후에 지지)보살은 경책을 들며 지장보살은 왼손에 보주를 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도솔암 금동천장 보살상만 왼손에 법륜을 들고 있는 설법인으로 이와 부합되고, 선운사 본절의 금동지장보살상은 왼손에 보주가 없으며, 참당암 석조인장보살상은 경책 대신 오른손에 보주를 들고 있어 자못 혼동스럽다. 더구나 도솔암 금동천장보살상은 고려 말 14세기로, 선운사 금동지장보실상과 참당암 석조지지보살상은 조선 초 15세기로 그 제작 연대가 차이가 난다. 적어도 고려 말에서부터 조선 초기에 삼장보살 신앙이 탱화로서가 아니라 조각상으로 이미 선운사에 확립되었음은 확실한 것 같다. 그 시기는 선운사의 중창주인 극유 행호 대사가 왕실의 원찰로 사찰을 중수하는 전후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건륭연간에 유행하다만 삼장 탱화보다 1세기나 더 앞서 이미 삼장보살이 조각상으로 체계화되었다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그 유래가 없는 삼장보살이 금동이나 석조로 만든 조각상으로 신앙되어져 온 선운사에 대해 앞으로 많은
연구가 기대된다. 도솔천에 미륵이지 웬 지장 보살인가 하는 이도 있으나 이는 천장보살이기 때문에 도솔암 내원궁에 계셔도 틀리지 않다.


검단선사의 선훈사 창건 설화
선운사는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으나 모두 물증으로 검증되지 않고, 가장 빠른 연대의 유물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육층석탑과 금동지장보살이 고작이다. 고려시대 이전으로 올라 갈 만한 석축이나 다른 석재들도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선운사 초창에 대해 고증하는 일은 힘에 벅차다.
선운사는 신라의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577년(위덕왕24)에 백제의 고승 검단이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1707년(숙종 33)에 현익이 지은ꡐ도솔산선운사창수승적기ꡑ 와 1878년 (정조 12)에 쓴 ‘대법당중수기’ 내용을 보면 진흥왕 창건설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진흥왕은 왕위를 버린 첫날밤에 좌변굴(진흥굴)에서 자다가 꿈속에서 미륵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것올 보고 감동하여 중애사를 창건하고 다시 이를 크게 일으켰으니 이것이 이 절의 시초라고 하였다. 이 창건 설화는 진흥왕이 만년에 왕위를 버리고 출가했다고 하는 사실에 부회되어 형성되었겠지만, 당시 이 지역이 백제의 땅이기에 얼토당토 않는 말이다. 왜 이런 창건설이 18세기에 형성되었는지는 앞으로 더 연구해 보아야하겠다.
또 검단 창건설의 창건 연대는 위덕왕 24년이라 하는데 이 때는 진흥왕이 왕위에서 물러난지 이 년 뒤로 검단 선사와 진흥왕은 동시대 인물로 보인다.
진흥왕은 출가 뒤 법호가 법운이고 그 이후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만년에 왕위를 물러난 진흥왕과 검단 선사와의 관계, 당시 삼국의 정치 관계를 모두 고려해서 검단 선사의 창건설을 해석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더구나 검단스님과 관련된 무척 홍미로운 내용의 설화가 전한다. 옛날에 검단 선사가 이 일대의 도둑들을 교화하여 천일염 제조법을 가르쳤고 이들은 검단스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의미로 선운사에 보은염報恩鹽 이라는 소금을 바쳤다는 것이다. 또 선운사 절터는 본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 선사가 이 곳의 용을 몰아내고 큰 배에 꼭두각시를 태워 물에 띄우고 돌을 던져 큰못을 메웠다고 한다. 이 때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아 숯을 한 가마니씩 부으면 눈병이 낫는다고 하자 너도 나도 연못에 숯올 부어서 연못을 메웠다는 설화이다. 이는 연못을 메워 절을 세우는 매지창사 埋地創寺 설화의 한 유형으로 주목된다. 이런 까닭에서인지 영산전과 대웅보전에는 벽과 천정을 온통 용으로 단청하였다.
그 뒤 통일신라시대에 선운사가 어떠하였는지에 대한 기록과 유물은 없다. 고려 말에 효정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 육층석탑과 금동지장보살상도 이 때 제작된 듯하다. 조선시대 초기인 1472년(성종3)부터 십여 년 동안 극유 행호 선사에 의해 선운사는 크게 중창되었다. 극유는 1472년에 이 절에 이르러 뜰에 구층석탑만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중창을 발원하여 선운사는 옛 모습을 되찾았는데, 건물이 백팔십 아홉채나 될 만큼 웅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백여 년이 지난 1597년(선조30)의 정유재란 때에 어실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는 참화를 입었다. 그 뒤 1698년에 선운사를 중수(김우황, 선운사중신기)하고 이후 19세기 초기까지 두 차례에 걸쳐 중수한 사실을 ꡐ도솔산 선운사창수승적기ꡑ (1707년, 현익). ‘무장현선운사대법당사적기ꡑ (1840년, 기정진)에 기록하여 남겼다. 선운사 사적에는 17세기부터 19세기 초에 이르기 까지의 건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전각요사창건연대방명열목’ 이라는 제목 아래 남아있다.
19세기 전반까지는 이 절에 속한 산내 암자가 무려 오십여 곳 있었으나 지금은 동운암, 석상암, 참당맘, 도솔암 등 네 개의 암자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선운사의 가람 배치를 보면 일주문은 남아 있지 않고, 천황문을 통해 절 집안으로 들어서면 만세루가 앞을 막는다.
그 좌우로 돌아가면 이 절 집의 중심 법당인 대웅보전이 뒤편 동백나무 숲을 배경으로 자리한다. 대웅보전 왼쪽에 전에 요사가 있던 자리에 많은 승방을 신축해 버렸고 대웅보전의 오른쪽에는 전에 이층 누각식 장육전이었다는 영산전이 자리한다. 그 뒤편에 팔상전과 산신각이 높은 단 위에, 영산전 앞 오른쪽에 명부전을 배치하는 그런 구도이다.
선운사에는 보물 다섯 점, 천연기념물 세 개, 지방문화재 열 점을 합하면 모두 열여넓 점의 지정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고 비지정 문화재까지 포함하면 삼십 점이 넘는다. 지면 관계상 이들을 하나하나 살펴 볼 수 없고 제작 시대순으로 배열해 보는 것으로 가름하련다.
고려 말 14세기에는 도솔암 금동천장보살좌상과 육층석탑이 만들어지고 조선 초기에는 금동지장보살좌상과 동불암(도솔암) 마애불 및 참당암 석조인장(지지)보살좌상이 조성된다. 정유재란의 화재 이후에 조성된 유적과 유물로는 대웅전 동종(내원궁 조성, 1788년), 창당암 대웅전(1794년), 선운사 범종(1818년), 비로자나 삼신불회도 벽화(1840년), 만세루(조선 후기), 석씨원류(조선 후기), 영산전 목조삼존불상(조선 후기) 등이다. 이밖에 천왕문 현판 글씨와 정와靜窩는 원교 이광사가 쓴 것이고 도솔산 선운사는 일중 선생의 예서체이다.

진흥굴과 장사송을 보고 도솔암에 올라
미륵불과 천장보살님을 뵙다
선운사 경내를 빠져나와 도솔암으로 가는 오솔길을 따서 접어들어 길가 왼쪽에 돌장승 한 분을 뵙고 보니 어째 이상하다. 방향이 도솔암 쪽이라 선운사와 관련 있는 장승일 것 같은데 왜 하필 사찰 입구가 아니고 뒤편 도솔암 쪽인지. 예전의 교통로가 이 길인지 의심해 본다. 신라 진흥왕이 만년에 출가하여 수도했다는 진흥굴 들어갔다 온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에게게’ 한다.
진흥굴 앞에는 육백 년 묵은 줄기 노송이 반듯한 자태를 뽑낸다. 예전 이 지방이 장사현이라서 장사송이라 하고 진흥굴 앞이라 진흥송이라 부르기도 한다.
장사송이라는 천연 기념물 노송 주변에서 다리 쉼을 하고 동불암(도솔암) 마애불을 뵈러 그냥 올라가자. 전설에 도솔암을 등불이라 했다 하여 보물로 지정할 때 동불암이라 고쳤다고 하나 동불암이라는 근거는 찾을 길 없다. 공중에 누각 같은 감실을 설치하기 위해 부처님 머리 윗 부분에 구멍이 나 있는데 이 구멍에는 아직도 목재가 박혀 있다. 칠송대 암벽에 새겨진 이 마애불은 동학비기와 얽힌 재미난 이야기가 전한다.
한말 동학의 불길이 이 근동에서 불 붙을 때 이 마애불 배꼽에서 비기를 꺼내어 미륵의 출현을 표방하였던 그 부처상이다. 마애불 배꼽에는 이 같은 전설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려는 듯 네모난 자국이 선명하다. 검단 선사 창건설 가운데 인천강의 갯벌에 묻었다는 향나무와 이를 미륵 신앙의 의식인 침향에 사용하도록 배려했다는 침향목 이야기는 침향목이 미륵이 되어 왜구의 노략질을 물리치고 대중을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는 기원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더욱이 도솔암 마애불을 미륵불 또는 검단선사의 진상이라고도 한다.
참당암에 들러 온통 다리를 드러낸 대웅전과 돌로 만든 인장(지지)보살님을 뵙자. 또 하나 법당 앞에 핀 동백 두 그루에서 핏빛으로 피어나는 선홍색의 꽃망울을 보노라니 지리산 피아골 철쭉꽃이 생각난다.

잊혀진 백제 노래 선운산가
잊혀진 백제 가사를 생각해 본다. 선운산가라는 가사인데 고려사 속악조와 증보문헌비고 악고에 각각 선운사, 선운산곡이라는 제목에 해설을 단 백제시대에 불린 곡조나 가사, 작가 및 창작연대를 알 수 없는 노래이다. ꡐ백제 때 장사 사람이 정역에 나갔는데 기한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의 아내가 남편을 사모해 선운산에 올라 이 노래를 불렸다ꡑ고 하는 잊혀진 백제 가요이다. 또 선운산 풍경가도 1910년에 이홍구가 지은 기행가사인데 잊혀진 선운산가에 대한 회상과 주변 경치를 한문투로 그리는 결사법을 지키지 않은 한문투의 변격가사이다.
이번 선운사의 답사는 줄곧 이십 리길을 그냥 걸어다녔다. 힘이 빠지기는 했으나 그야말로 삼림욕을 제대로 한 셈이다. 여기 가도 지장, 저기 가도 지장, 거기 가도 지장, 온통 지장 보살뿐인 선운사 답사길, 한번 다녀오면 신행 생활에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