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절에서는 왜 이렇게 절을 많이 하게 하는 것일까. 절은 어른이나 스승에 대한 공경과 겸양의 태도이며 , 때로는 자신을 갈구하는 “자기 낮춤”의 예절이기도 하다.
바로 얼마 전에 치른 지방 선거에서도 입후보자들은 유권자들의 한표를 얻으려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태도에서 진정한 자기 낮춤을
느낄 사람은 거의 없다. 당선을 목적으로 한 일시적인 세일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흔히 직립동물이라고 하듯이 , 자존심이 대단한 존재들이 아니던가. 필요에 의하지 않고는 좀처럼 남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빳빳한 자세가 바로 자신의 품위를 유지함을 뜻할 정도이다. 구걸하는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고 두 손을 모으는 것은 거의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자세에 가깝다. 그러나 그러던 사람도 나중에 처지가 바뀌어
힘 좀 생기고 잘 살게 되면 어깨가 금방 뒤로 젖혀지고 배가 불쑥 튀어나오는 거만한 모습을 갖추어 가는 것을 우리는 더러 본다.
절은, 다름 아니라, 자기의 권위와 지식을 모두 비우는 첫 행동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지혜와 자비를 담기 위한 일종의 통과 의례인 것이다.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바로
교만이다. 따라서 교만은 부처님 앞에서는 가장 고질적인 병이 되는 셈이다.
하심下心이 행자의 첫 수행법인 것도 바로 그런 까닭에서이다.
불교에서는 여러 가지 교만의 형태를 경계의 뜻으로 이르고 있다. 그 가운데 남을 자기와 비교하면서 우쭐해 하는 마음, 이것을 만慢이라고 한다. 남보다 더 낫지도 않으면서 더 낫다고 착각을 하는 경우는 과만過慢이라 한다. 한편, 육신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여 집착하는 것을 아만我慢 이라 한다. 그리고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면서도 깨달음을 얻은 체하는 것을 증상만增上慢이라고 한다.
\"가장 크고 가장 깊은 바다가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노자의 가르침은 절하는 마음을 가르치는 데에 가장 적절하고 좋은 비유가 될 것이다.
나에게 \"나\"가 있듯이, 나 아닌 다른 모든 \"나\"에게도 \"나\"가 있음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바다와 같은 자기 낮춤은커녕 남과 처지를 바꾸어 한번 생각해 보는, 이른바 \"역지사지易地뽑之\"에도 인색하기 이를 데 없다. 법화경에 등장하는 상불경 常不輕 보살과 같은 헤아림이 참으로 아쉽다. 그는 늘 어떤 존재에 대해서도 결코 남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 보살이다.
절에 모셔져 있는 불상이나 탑들은 거의 모두가 돌이나 나무나 흙과 같은 재료로 조성되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흔하고 많은 것이 바로 그것들이다. 물론 그것들이 재료로써 구하기에 손쉽다거나 또는 조성하기에 알맞다는 이유도 있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거기에는 그렇게 흔하디 흔한 돌이나 나무까지도 존경할 수 있는 마음을 권유하는 의미가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의 돌맹이조차 사랑할 수 없는 마음으로 사람을, 뭇 생명을 아끼는 정신을 가꾸기는 쉽지 않을 터이니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오늘의 사회는 정복의 논리가 판을 친다.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는 관계 , 나를
세우기 위해 남을 짓밟아야 한다는 의식이 보통 사람들 사이에는 물론 지식인이나 종교인들 사이에도 팽배해 있다. 이 부질없는 자존심이 사람답게 사는 인간 세상을 마구 망가뜨리고,
자연을 절망적으로 해치며 , 나아가 자기까지 파괴한다. 절하는 마음은 평화로 나아가는
반작용선이다. 사무치게 삼천배를 하여 보자. 자신의 희망을 가로막는 업장의 소멸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자기의 모습이 조금씩 바다를 닮아가는 것을 느끼리라.
지난 달의 \"업세탁\" 내용 가운데 선심仙心과 선공仙供은 불심佛心과 불공佛供의 오기였습니다. 필자와 독자의 해량 바랍니다.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