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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관음사 이두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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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5년 07월 161호
청주의 우암산 순환 도로변에 자리한 관음사에 이르른 것은 한낮의 빛살이 꽤 강할 즈음이었다. 이두스님의 막내 상좌로서 절 살림을 도맡아 보고 있다시피한 현진스님의 방에서 잠깐 땀을 들인 다음 이두 스님을 뵈온 순간, 속으로 아, 소리를 삼켜야 했다.
어느 날 방 안에서 피우지도 않은 향냄새를 진하게 맡은 신묘한 일을 겪었을 때와도 같았다. 온후한 스님의 얼굴도 그러했거니와, 방 안에 가득한 상스러운 붉은 기운이 사람을 압도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삼배 올리고 정신을 수습하니 , 비로소 그것이 방 앞에 드리운 고운 대발사이로 비낀 저녁 햇살과 닥지로 도배한 스님의 방 뒤로, 올 가을 단청 불사를 남겨 둔 알몸의 법당이 창 속으로 되쏜 빛이 그렇게 부드럽고도 화사한 빛의 조화를 이루어 낸 것이다.
그 조화 속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스님의 얼굴은 범상치 않았다. 올해 세수 예순셋. 해방 이듬해에 열다섯 살의 몸으로 식구들과 함께 삼팔선을 넘은 스님의 개인사는 곧 이 민족의 수난사와 겹쳐지는 것이거니와, 그 신산한 세월을 겪고도 그토록 단아한 얼굴을 가꿔 오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말이다.
삼팔선 이북의 금강산 자락에 자리잡은 고향동네. “밤이면 갈잎이 바람에 쓸리는 소리가 밤비 소리와 같았던ꡓ그 곳은 스님 시의 젖줄이기도 하다. ꡐ잠깐만 피해 있으면 될 줄 알고ꡑ떠나온 곳이었다. 단신으로 월남한 백부가 서북청년단의 일원으로 대공 투쟁의 길을 걷고 있었던 만큼 정치적 탄압을 피할 길은 부모님 . 그리고 두 형과 함께 삼팔선을 몰래 넘는 일뿐이었던 것이다.

곡절 끝에 공주에 자리를 잡고 공주농업학교에 다니고 있을 당시는 조선학생동맹 등의 좌익 학생 운동과 반탁학련의 신탁통치 반대 운동의 맞부딪침이 정점에 달해 있을 무렵이었다. 한독당 당원으로서 김구선생의 비상근 정보 비서로 일하고 있던 큰형의 영향도 적잖았으리라.
이두스님은 당연히 우익 대열이었다. 그러나 곧 이어 터진 육이오 전쟁으로 피난길에 올랐다가 김해의 피난민 수용소에서 학생 의용대로 자원하여 입대했다. 당시 전황은 입대한지 이레만에 전투에 투입될 만큼 급박했으니 , ꡒ삶의 터전을 앗아간 공산당ꡑ에 대한 적개심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몸을 던져 싸웠다. 지금도 주저 없이 ꡒ판백이 우익ꡓ임을 내세워 말하는 스님의 지난 삶의 궤적이 그러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리로 드나들던 전쟁의 일선에서 돌아오니 식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큰형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집안 살림은 진학은 커녕 먹고 살길마저 막막할
지경이었다. 그가 전쟁을 치르면서 피폐해진 심신을 쉬고자 들은 곳은 갑사였다.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학문에 대한 열정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온전히 지켜 나가기 위한 유일한 선택이었던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두어 달 앞둔 시점이었다.
월남난민들이 주류를 이루웠던 패의 착실한 신도였던 그가 절을 찾은 것에는 전생의 연이 없지 않을 터였다.
수도사단 17연대 학도병이었을 때 선임하사로 있던 어른이 범어사 스님이었는데, 이두 스님올 보자마자 ꡐ자네는 스님이 될 얼굴이네ꡑ 하여 기독교 신자였던 그를 당혹하게 했다.
험한 전장에 짧은 적막이 찾아올 때면 온화한 얼굴로 나지막히 외던 염불 소리가 그대로 이어졌던 것인지 , 아침마다 그가 임시로 기숙하고 있는 땅 밖으로 들려오던 염불 소리가 싫지 않았다.
일찍부터 한의였던 선친으로부터 한학을 깨우쳤으니 , 그 무렵 통감을 볼 수준이라 갑사의 스님들이 그에게 디민 불서들을 읽는데, 힘겨울 게 없었다. 사관학교에 갈 마음은 순치황제의 출가시를 읽을 무렵 이미 쇠약해져 있었다.

이 몸이 나기 전에 그 누가 이 몸이며
이 몸이 태어난 뒤 그 누가 참 나런가
태어나 잠깐 동안 말하고 이름 터니
눈 감아 죽고 나니 말하던 자 어디 갔나

그는 맏형과 양친이 묻힌 계룡산, ꡐ생채기처럼 붉은 흙에 눈물이 떨어져 스민ꡓ 그 곳 갑사에서 금오스님을 은사로 수계했다. 학승에의 길을 탐탁잖게 여기던 금오스님 , 그 분이
희망한 대로 잘 살아오지는 못했지만, 그의 수승한 근기와 총명함으로 가장 아낌을 받은 제자 가운데 하나였다. 여덟, 아홉 안거의 선방 생활도 주로 그분을 모시고 있을 때 이루어졌으니, 그러는 동안에 선에 관한 한 분별력의 잣대를 지니게 된 것도 ꡐ게으름, 또는 문학에의 열정 때문에ꡑ 그 길로 내처 나아가지는 못했으나. 하화중생 상구보리의 길 가운데서도 선의 자리를 중심이자 으뜸으로 놓게 된 것도 그 분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여긴다.
철 없을 때 큰스님의 문자 속이 그리 싶지 않은 듯하여 다소 방자한 생각을 품어 본 적이 있었으나, 여러 해 동안 시봉을 하면서 그의 ꡐ막힘 없음ꡑ에 무릎을 꿇게 된 뒤로 그런 생각이 깨끗이 가시었다. 그 뒤로 상좌들에게 ꡐ믿어야 할 사람에게는 따지는 법이 없어야 한다ꡑ고 이르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나다 마주친 빈 절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손수 제자들과 함께 기와 가는 일 따위도 주저하지 않던 분이었다. 천 년이나 사실 것처럼 가는 데마다 일을 만들어 아낌없이 몸을 부리던 큰스님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 보니 , 참으로 ꡒ좋은 모양ꡑ그것이었다.
“이런 가르침도 있었지 ?”
이두스님이 웃으며 들려 준 이야기 한 토막은 그 분의 가르침 방식을 짐작케 해 주는 것이었다. 성균관대학 삼학년에 편입하여 동양 철학을 공부할 때였다. 조계사에 머물면서 낮에는 총무원 일을 보고 밤에는 공부를 하던 고단한 때에 아는 분 한 분이 고명딸을 둔 재력가
한 사람을 소개해 왔다. 재색을 겸비한 그 딸을 줄 터이니 속퇴할 생각이 없느냐고 넌지시 의중을 떠 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학문에 생심이 있으면 유학도 보내 주겠다는 말이 달콤하여 큰스님께 여쭈었더니 밑도 끝도 없이 화장터에 가서 한 달만 지내다 오라고 했다. 행려 병자든 고관대작이든 똑같이 한줌 재로 변하는 그 곳에서 스무 날쯤 지내고 나니 큰스님한테 여쭐 것도 없어졌다.
무릎을 꿇고 앉은 그를 내려다 보며 큰스님은 비긋이 웃기만 하셨던 것이다.

ꡐ시를 쓰기는 쉬워도 시처럼 살기는 어려운 법이 라요.”
「삭별하는 날」이라는 수상집을 통해 빼어난 글 솜씨와 단아한 구도 자세를 펴 보였던 현진스님이 이두스님을 두고 한 표현이었다.
입산한지 스무해 만의 첫 임지가 신문의 첫 발걸음을 떼놓은 갑사였다. 그 뒤로 충주 대원사, 법주사, 인천 보각사 등의 주지직을 맡기도 했지만, 조계 종단 서열 열번째 안에 드는 위치임에도 한때 총무원 총무부장을 지낸 것말고는 종단의 직임에는 관심이 없다. 지금 총무원장인 월주와 월탄스님이 모두 그의 사제거니와, 가끔 열리는 문중모임 말고는 따로이
이루어지는 모임 자리도 그는 애써 피한다. ꡐ스님이란 좀 둔허고 욕심이 없어야 하는데ꡑ , 그저 만나기만 하면 어느 큰 절 주지 자리 이야기나, ꡐ제 편 살라고 남의 편 죽이기 따위의 허망한 언쟁ꡓ이나, 사람을 모아서 세 불리기 따위의 일만 일삼는 듯해 보여서 전혀 탐탁치가 않기 때문이다.
어째 ꡐ버리지ꡓ는 못하고 그저 ꡐ껴입기ꡓ에만 바쁜 듯해 보여 마뜩치가 않다.
ꡐ죽고사는 것은 물소리 같다’고 읊은 어느 시인의 시구가 생각나거니와, 그렇게 ꡐ초탈ꡑ을 힘주어 말하는 이두스님의 몸 속에는 요즘도 진주 남강의 물소리가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닐지.
성균관대학을 졸업하고 진주농과대학에서 한문선생 노릇을 할 적이었다. 문학에의 열정도 그를 안돈치 못하게 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서른을 갓넘긴 청춘이었다. 서당반 다녔어도 한문 선생 노릇이 기능했던 그즈음 대학 출신의 잘생긴 그를 따르는 여학생들이 적잖았던 것이다.
남강 백사장에 자리를 깔고 누워 밤을 새워 강물 소리를 들였다. 그러기를 몇 달. 자다가도 물소리만 들릴 만해지자 그는 전라도 광주로 만행을 떠났다. 엿장수 노릇 석달, 넝마주이 노릇 석 달을 채운 다음 다리 밑에서 거지 생활을 막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애매하게 파출소로 끌려가 봉변을 당하게 된 아는 엿장수 한 사람을 구해 주려다 신분이 드러나고 말았다. 작정한 만행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으니 , 허물없이 어울릴 때와는 달리 이제까지 ꡒ동료“ 이던 그를 찾아와 깍듯이 인사를 올리는가 하면, 갖가지 감당 못할 헛소문까지 나돌아 스님이 그 곳에 머물 명분이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ꡒ그러고서 한 고비 넘겼지ꡓ 하고 이두스님은 심상하게 말했다.
이두스님은 현진스님의 말대로 탐심이 없어 보이되 아주 없기만 한 것은 아니다. 스님의 왕성한 집필력이 그런 생각이 들게 한다. 78년도에 시집 「겨울 빗소리」로 등단한 뒤로 시집 ,수필집 , 소설 등 열 한권의 책을 냈을 뿐만 아니라, 아홉해 전에 자신이 서울에 설립한 해동불교대학에서 강술하여 현재 교재로 쓰고 있는 「금강경」과 「원각경」도 책 몇 권 분량이 된다. 그리고 청탁을 받고 써 두었거나 쓰고 있는 원고만해도 책 일곱 권쯤의 분량이 된다고 하니 ꡒ어느 겨를에ꡓ 싶게 놀랍기만 하다. 스님은 충북지방에선 ꡐ알아주는ꡑ필자려니와, 청주의 일간지 네 군데뿐 아니라, 문학 전문지, 잡지 , 회보 등 원고 청탁이 오면 그 자리에서 대번 써 버리는 ꡐ전천후 문필자ꡑ이다.
시집은 물론이고 국내외 문학서적 및 역사, 민속, 불교 관련 서적 등 수많은 책을 섭렵하여 한 달에 열서너 건의 원고 청탁을 무리없이 , 물론 내용의 중복 없이 거뜬히 해결하고 있다. 그런데도 스님의 방에는 벽 한 면이 책으로 채워져 있으되, 동아원색 세계대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우리말 큰사전, 세계 예술 대백과, 인물 한국사, 한국사대계, 중국의 역사 등 거의가 사전류 뿐이고, 공간이 마련되면 옮겨 올 요량인지 , 이만여 권의 새책이 딴 곳에 보관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때마다 가서 펼쳐 볼 일은 못 되니 “전천후” 라는 별호가 걸맞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스님의 법명은 정월精月 이지만 필명인 ꡐ이두ꡑ가 그의 왕성한 문필 활동을 통해 더 널리 알려져 아예 그것으로 굳혀 쓰고 있다. 그 이름을 지어 준 작명가가 ‘이 이름을 쓰면 칠순에 이르러 이름을 크게 떨치게 될 터ꡓ 라고 했다니 , 칠순에 이르러 집필 권수가 서른쯤이 되기는 어렵잖은 일이겠다. 그러나 ꡒ혜안을 얻어ꡓ 스님이 이루고 싶은 것은 부처님의 자비 사상을 제도적으로 발현시킬 수 있는 경제 이론서를 하나 내는 일이다. ꡒ보시 사상ꡓ으로 민생 구제의 방편을 제시하여 불심으로 세상을 바꾸어 보려는 원력을 세운 것이다.


이두스님이 이 곳 관음사에 머물게 된 것은 열두 해 전의 일이다. 법주사 주지로 있을 때인 팔십년도에 계엄군에 의한 법난을 치렀는데, ꡐ두 번 갈 데는 못 되는 그 곳ꡑ에서 앰한 고초를 당하고 나와 인천 보각사로 갔다가 팔십사년에 이 곳으로 왔다. 고려 말 또는 조선조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곳은 스님이 오신 뒤로 면모를 일신했다. 밥솥인지 물솥인지 용도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철확 하나가 법당 앞 뜰에 놓여있어 그 옛날의 도량의 팩 규모를 짐작케 주지만, 조그만 법당하나와 삼성각 하나뿐이던 이 곳에 잘생긴 법당 한 채와 지금 스님이 기거하고 있는 요사채를 하나 새로 지었다. 곧 이천 명의 신도 수에 걸맞는 요사채를 또 하나지을 예정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열 개가 넘는 신행 단체가 활성화되어 있어 관음사를 청주지역 포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내고 있는 사찰로 성장시킨 것이 더욱 돋보인다.
그런데도 ꡐ초하루 보름법회만 할 따름이지 현진스님을 비롯한 스님 두 분에게 일 죄 맡겨 놓고 자신은 놀러만 다닐 뿐이라고 시치미를 땐다. 아닌 게 아니라, 집필과 절 운영 일 말고도 청주 불교 연합회 회장, 경실련청주모임 공동 대표, 공선협 대표, 충북사조협회 회장, 자유시인협회 회장 같은 대외 직함을 보면 그 말이 전혀 틀리진 않을듯도 하다.
스님의 방에서 나와 법당 앞 계단 참에 서서 환하게 웃는 모습은 또 그 바쁜 나날과는 전혀 일 없는, 정겨운 이웃집 할아버지의 풍모였다.
사위의 울창한 녹음속으로 뻐꾸기 소리가 낭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