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불교의 부패와 조선왕조의 법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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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 김태형
1995년 07월 161호
고구려 소수림왕 때에 공인된 불교는 고려에 이르기까지 일천 년이 넘게 이 땅의 사회, 문화, 사상, 종교계의 실세를 장악하면서 황금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고려에 와서는 승단의 양적 팽창과 비례하여 부패와 타락이 가중되고 결국 역성 혁명으로 왕권을 쥔 이성계와 그의 추종 세력들이 신봉한 유교에게 일천 년 이상을 구가해 오던 모든 기득권을 넘겨 주게 된다.
특히 조선의 폐불 정책의 모텔은 중국 불교 법난사에 있어서 최악이라고 일컫는 회창법난을 그대로 본받고 있다. 중국 불교에 있어서 법난의 발생 배경에는 도교와 불교의 대립 갈등 이외에도 정치적 함수가 작용하였다. 곧 사회적 혼란기 속에서 왕권의 강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볼 때 중국 불교의 법난이 대부분 도교와 불교의 대립 갈등에서 나타난 현상이라면 조선 시대의 법난은 유교와 불교의 대립 갈등에서 빚어진 결과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그러나 이면에는 정치적, 곧 이성계의 역성 혁명과 그로 인한 새나라 건설의 합리화라는 명분도 크게 작용했다. 새시대, 새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떠오른 유교(성리학)와의 기득권 확보 투쟁에서 불교가 참패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패자에게는 굴욕과 노예로서의 삶이 강요될 뿐 어떠한 동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역성 혁명으로 기득권을 쥔 이성계와 그의 추종세력들은 유교지상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일차로 불교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한다. 그들이 불교의 숙청에 나선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불교의 타락이 제일의 이유였다.
고려의 사서史書와 유생들이 갖가지 상소나 문집을 통해 밝힌 고려 불교의 타락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ꡒ불보佛寶의 돈과 곡식은 여러 절의 승려들이 저마다 주군州郡에 사람을 보내 관리하며 해마다 이윤을 늘려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고려사 최승로전)
“개성과 지방의 승려들이 제 살 곳을 마련하느라고 다투어 절을 짓는데, 승려들이 지방관에게 부탁허여 절을 짓는 일에 백성들 징발하기를 공공의 역사役事보다 더 급하게 하니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하고 있다”(고려사 최승로전)
“지금 부역을 피하는 무리들이 승려라는 이름을 빙자하여 재산을 불려서 먹고 살아가며, 농사 짓고 짐승 기르는 일을 업으로 삼으며... 승복은 술항아리를 덮는 데 쓰이고, 설법하고 염불하던 도량은 파, 마늘 밭으로 할애되었다... 상인들과 어울려 취하도록 마시고 노니, 절간이 시끄럽고 더러운 냄새가 풍기게 되었다.ꡓ (고려사 광종 10년 9월조)
ꡒ불교는 본디 청정함을 숭상하는데, 그 무리가 죄罪와 복福의 설說로 과부나 외로운 여인을 꾀어 머리를 깎아 여승이 되게 하여 동거하며 음욕을 채우고 있다ꡑ (어사대사소, 고려사 공민왕10년조)
ꡐ일부 승려들은 토지의 수입과 노비의 노동력을 부처와 승려의 공양에 쓰지 않고 개인의 부를 축적하는 데 쓰며 과부의 집에 드나들며 풍속을 더럽히고, 권세가에게 뇌물을 써서 큰절을 차지하려고 한다.” (조인옥의 상소, 고려사 창왕 원년조)
ꡐ5교 양종이 모리배들의 소굴이 되어 승려들이 더러운 짓을 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 가운데 놀고 먹는 자가 많아져서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개탄하지 않는 자가 없다.ꡓ(이색의 상소, 고려사 공민왕 원년조)
유생들의 이러한 고려 불교의 타락상 고발과 더불어 승단 내부에서도 승단의 타락과 부패를 우려하고 반성하는 목소리가 적잖게 들려왔다.
ꡐ우리들이 아침 저녁으로 행한 행적을 돌이켜 보니, 불법을 핑계삼아 나와 남을 구별하여 구구하게 이익을 꾀하고 풍진 세상에 골몰하여 도를 닦지 않고 의복과 음식만 허비해 왔다.” (지눌스님 권수정혜결사문)
ꡐ어떤 비구들은 부처님의 계율을 어기고 이자 놀이를 하여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있다... 권세에 빌불어 약한자들을 능멸하고 다닌다... 온갖 노름과 장기, 바둑, 악기 등 승려로서 수행하는 데 좋지 않는 것들과 즐기고 있다...ꡓ (무기스님 석가여래행적송 하권)
이러한 고려조 승단의 타락은 왕조의 변천과 더불어 타율의 정화를 당하게 되고 그로 인한 대중들로부터의 격리는 돌이킬 수 없는 법난을 자초하기에 이른다.
분명 중국 불교사에 있어서 네, 다섯 차례의 법난을 한국적 승단이라고 모를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까닭에서인지 중국불교의 법난과 관련한 국내의 기록이 매우 드물다.
앞에서도 일부 밝힌 바 있지만 「삼국유사」 권3 ‘탑상 제4 전후소장 사리ꡑ 조에서 잠깐 거론된 것을 제외하고는 십세기 중엽까지 네, 다섯 차례에 걸쳐 발생한 법난이 제대로 소개된 기록이 대단히 적다. 어쩌다 조선시대의 스님들 어록 등에서 잠시 언급이 되기는 하지만 그 내용은 매우 미미한 것들이다. 따라서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던 신라 하대부터 고려조에 이르는 동안 한국 불교의 대외 교류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한편 이성계의 조선 왕조 건설과 관련한 기록들을 보면 묘하게도 몇몇 스님이 등장하고 어떤 스님의 경우는 태조 이성계로부터 봉복군奉福君으로 공신의 칭호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과 조선 초 종단 통폐합에 종파宗派가 무려 열한 종에 달했다는 사실로 볼 때 종파간의 알력이 상당히 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종단의 이런 상황에서 권력과의 밀착을 통한 교세의 확장을 꾀했을 것은 분명한 일일 것이며 실제로 최씨 무신정권이 들어섰을 때에 무신정권을 옹호하는 세력과 그에 반대하는 세력이 대두되어 최씨 무신정권과의 무력 투쟁도 불사했던 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기득권의 유지를 위해 권력과 손을 잡고 그것을 통한 세력 확장과 부의 축적을 일삼았던 고려 불교가 과연 중국의 법난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였을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중국의 법난이 타산지석이 되어 더욱 권력과의 밀착을 부추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 정부가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공권력을 투입해 놓고 두 종교의 반발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분명한 것은 불교와 천주교계 지도자의 대응방식이 많은 대조를 보이고 있다.
권력은 돌아서면 남이다. 조선의 건국에 많은 스님들이 헌신했지만 결과는 오백 년 동안의 탄압 이외에는 아무런 것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