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 해 전, 온 오대산이 흰 눈으로 덮여 있던 이월 초하룻날 입산했다. 부모님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집을 나오려고 미리 준비해 놓은 도시락을 눈에 안 띄는 곳에 놓아두고 부모님께는 책을 사러간다고 하고 집을 나왔다. 책값으로 주신 5천 원을 들고 나와서는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고향 강릉 연곡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오대산 월정사로 수학여행을 왔었다. 월정사를 들러 상원사에서 비로봉으로 올라가면서 중대에서 비구니스님 두 분이 물을 드시는 걸 보았다. 아마 그 풍경이 내 출가 인연의 단초가 되었을 것이다. 그분들을 보면서 ‘아, 이곳이 비구니스님들이 계시는곳이구나!’ 오대산과의 깊은 인연 때문이었겠으나, 당시엔 몰랐다. 그리고 훗날 중대엔 비구스님들이 살고 지장암에 비구니스님이 사신다고 하여 지장암이 출가 본사가 되었다.
오대산으로 가리란 출가의 인연이 다시 싹을 틔운 것은 고등학교 때 찾아온 콜레라라는 유행병 때문이었다. 한 달 동안 맹물과 붉은 자두로 버티면서 사투를 벌일 때, 문득 ‘내가 왜 여기서 헤매고 있지? 출가할 사람인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게 출가를 향한 마음의 문이 열렸고, 무사히 병이 낫자 출가사문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출가를 하러 들어가면서 ‘스님들이 나를 언제 봤다고 받아주겠나, 일단 밖에서 사흘 정도 자면서 여기서 살겠다고 끝까지 버텨야겠다’는 각오를 했다. 허나, 이 얘기를 전해들은 지장암 스님들은 펄쩍 뛰셨다.
‘무슨 소리냐? 절집이 무슨 아가씨들 마음 뒤숭생숭하면 오는 곳 인줄 아는가?’ 하시면서 몹시 나무라시는 것 아닌가. 마침, 출가하겠다고 들어온 행자 하나가 몇 일 뒤 오빠가 와서 데려갔다는데, 그 불똥이 그만 내게로 튄 것이었다. ‘저는 정말 안 그러고 잘 있겠습니다’ 라고 스님들께 호소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큰스님 몇 분이 갑자기 방문하셨다. 점심공양 준비에 바빠하시는 스님들을 도와 공양간에 가서 불 때 주고 하다 보니, 지금까지 지장암에 있게 되었다.
지금이야 이곳 지장암엔 번듯한 선방도 있고 해서 결제 때면 대중이 수십 명이 방부를 들이고 살지만 그땐 젊은 스님들은 모두 공부하러 간다고 나가 있고 노스님 두 분과 그리고 은사스님, 행자인 나, 이렇게 네 사람이 살았다. 행자생활을 일 년 이삼 개월쯤 하면서 특별히 어려운 것은 없었다. 굳이 있다면 은사스님께서 좀 식성이 까다로운 것을 신경 써야하는 일이었다. 한 번은 월정사 큰절에 일을 도와주러 갔다가 삶아 놓은 국수를 얻어오게 되었다. 가지고 돌아오니 그간 국수가 퉁퉁 불어버리고 말았다. 은사스님의 나무람을 듣고 감정처리를 못해 공양간 뒤 어디서 울고 나온 기억이 난다. 그래도 은사스님께서 ‘얘야, 행자야!’ 하고 부르는 소릴 듣고 쏜살같이 달려나와 울지 않은 척 하고 상에 앉아 씩씩하게 불은 국수를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렇게 나를 다스려갔으니, 그때 나의 은사스님의 음식에 대한 습관이 엄했다는 생각이 각인되었던지 ‘어른이 되면 음식 때문에 그런 일은 없어야겠다’ 라고 다짐했고 그걸 지금까지 지켰으니, 은사스님께서 내게 주신 거꾸로 배우는 가르침이다.
은사스님께선 검약하기가 이를 데 없으셨다. 밖에 볼일이 있으면 꼭 버스를 타고 나가셨는데, 어쩌다가 늦게 들어오실 일이 있어서 택시라도 타는 날이면 상좌들에게 모범을 보이시려고, 짐짓 버스를 탄 것처럼 저 월정사 입구에서 내려 걸어들어오시곤 했다. 나는 그렇게 은사스님의 근검절약을 배워 지금까지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의 노스님이신 성진 스님께는 자애로움과 아래사람 아끼는 마음을 배웠다. 노스님은 아무리 피곤하셔도 당신 다리나 어깨를 주물러 달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고, 몸이 편찮으셔서 죽을 끓여드리면 ‘죽이 맛이 없어 못 먹겠구나. 밥지은 누룽지 ??은 것을 달라 하셨으니, 어린 사람 힘들까봐 그렇게 배려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도 그랬지만, 나는 노스님의 자애로움을 닮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행자시절, 지장암을 떠나려고 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어쩐 일인지 은사이신 혜종 스님께서 어느날부터 나에게 말씀을 하시지 않는 것이었다. 몸으로 오는 피로는 빨리 풀리는데 정신적인 고통은 감내하기가 힘들었다. 내일 아침이면 다른 곳으로 가리라 마음을 정리했는데, 전날 저녁에 손님한분이 밤늦게 찾아오자 은사스님께서 무심히 부르셨다. ‘얘, 행자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부르는 소리에 서운하고 답답한 마음이 햇볕에 눈 녹듯 사라지는 것 아닌가. 그날 짐을 풀고 지금것 지장암 사람이 되었다.
행자시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은 부처님 생애를 읽으면서 만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글구를 보고 그만 기가 막혀 쏜살같이 큰절로 내려갔던 일이다. ‘누구보다 부처님께선 평등을 부르짖은 분이 아닌가, 그런데 하늘 위 하늘 아래 당신만이 홀로 존귀하시다고 선언을 하셨단 말인가!’ 어린 행자인 나는 나름대로 부처님 그 말씀에 분노하면서 책을 들고 단숨에 큰절로 뛰어갔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가당치도 않은 분노였으나, 큰절의 한 스님은 서슬이 시퍼래서 서 있는 나에게 조용히 일러주셨다.
“세속에서 생각하는 그런 뜻이 아니란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은 다 부처님과 똑같은 자비와 지혜와 능력을 갖추고 태어났다는 것을 부처님께서 혜안으로 밝게 보시고 말씀하신 것이야.”
나는 그때 일단 그 설명을 듣고 진정을 했으나, 사실은 서슬만 꺾였을 뿐이지 내가, 일체 존재하는 생명 낱낱이 부처인줄은 몰랐다. 그뒤로도 수많은 경전 속에서 그리고 선지식들의 가르침 속에서 ‘네가 부처다’란 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이렇게 단정짓곤 했다. ‘결코 그 무한함을 지니신 부처님과 같이 실천을 못하고 있으니
이 생에 부처님 법 익힌 인연으로 내생에 부처를 이루리라’ 라고 말이다.
그런데 삼십여 년 이상 오랜 세월이 흐르고 보니, 이젠 알겠다. 내가 부처란 것을 말이다. 예전엔 부처님을 불러 내 속에 모시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나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말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무아미타불을 불러서, 저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계시는 부처님을 모셔 내 속에 집어넣어서 부처님을 만나는 게 아니고, 우리들 속에 계신 부처을 드러내면 된다. 마음에 담아둔 마음, 질투하던 마음 화내는 마음 욕심내던 마음을 녹이고 내 속에 있던 망념이 어느 날 걷히면, 빛이 쏟아져 내리듯 그렇게 우리는 부처님과 똑 같이 갖추어 가지고 있는 부처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겨우 그 행자시절 이해할 수 없었던 ‘천상천하유아독존’이란 부처님의 빛나는 선언이 ‘우리모두가 이미 완벽하게 갖추어진 부처라’는 뜻이란 걸 알게 된 것이다.
‘복짓는다’는 말을 많이 하고 사는 우리 출가자는 행자시절에 복지은 것으로 평생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가를 해서 자기 자신을 가장 빨리 변화시키고 번뇌를 지혜로 바꾸고, 또 가장 빠르게 부처님 법에 들어서 보살로 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 기간이 행자시절인 것 같다. 그래서 행자시절은 출가자에 있어 참으로 중요한 시절이다. 행자시절 동안 요만큼만 하고 자유롭게 살아야지 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데, 먼저 출가의 길을 간 선배님들이 있는 곳에서 행자생활을 하는 예비수도자가 그곳에서 기초를 잡지 못하면 평생을 헤매기도 하고, 평생 먹물 옷을 입고 살아도 부처님 법 속에서는 살지 못하기도 한다. 부처님의 자비, 지혜, 능력의 맛을 보지 못한다. 그냥 출가자라는 껍데기 이름 속에 안주해서 살다가서야 되겠는가.
출가하는 많은 사람들이 정말 행자생활을 잘 해야 될 것 같다. 전생 악업의 프로그램을 지우고 새로운 악습들을 놓아버리고 법 속에서 살아야 겠다는 그런 절절함 속에서 출가했으면 좋겠다.
부처님의 대지혜 대자비로 살고 싶어 출가했던 저 행자시절로부터 어연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겉모습이 아니고 마음과 행이 부처님처럼 되어야 하는데, 뜨거운 자비와 냉철함을 함께 갖춘 수행자여야 하는데 아직 요원하다. 그러나 부처님의 사고와 행을 1백프로 더 늙기전에 쓰며 살고자 노력하며 부처님처럼 회향하고자 나추고 또 나추고자 오늘도 내일도 애를 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