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께 알려드리러 왔어요.”『1945년 한 섬의 외딴 집에서 어느 날 갑자기 하인들이 사라진다. 아무 말도 없이. 남편은 집을 떠나 전쟁터로 간 지 1년 반이 지났으나 소식이 없고, 딸 앤과 아들 니콜라스는 빛에 알레르기가 심하다. 그래서 하루 종일 커튼을 치고 살아야 한다.
이 집에 광고도 안 냈는데, 낯선 사람들이 나타난다. 과거에 이 집에서 일한 적이 있다며 하인을 자처한다. 남편은 갑자기 돌아와 지내다 다시 전쟁터로 가야 한다며 떠나버린다. 그리고 침입자가 나타나 커튼을 떼어내버린다. 하인들의 짓일까, 아니면 유령들의 짓일까?
하인들을 내쫓아버렸지만, 마당에서 그들의 비석이 발견된다. 알고 보니 그 하인들은 이미 50여 년 전에 결핵으로 죽은 이들이었다. 지금까지 유령들과 살고 있었다니…….
어느 날 영매사가 나타난다. 영매사는 앤과 니콜라스를 찾아내어 묻는다.
“너희들 죽었으면서 왜 여기 남아 있니?”
“우린 안 죽었어요.”
“왜 여기 남아 있냐구?”
“안 죽었어요. 안 죽었다구요.”
알고 보니 침입자들은 산 자들이었다. 부인을 비롯한 아이들이 죽은 자들이었던 것이다.』
죽음에 관한 단 하나의 진실은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몸뚱이만 바꿀 뿐이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해서는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 첫째는 죽고 나면 아무 것도 없는 경우이다. 말 그대로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이라면, 아무 것도 걱정하거나 대비할 필요가 없다. 단막극으로서 막을 내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는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다.
그 두 번째는 죽고 나서도 ‘정신적인 그 무엇’이 남아 있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결국 죽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비록 육체는 소멸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남아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적 존재는 자신의 주파수에 맞는 자리를 찾아가기 마련이다. 새로운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선가禪家에서는 죽음을 ‘옷 갈아입을 뿐’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에 세 가지 경우가 있다. 더 좋은 옷을 갈아입는 경우와 더 나쁜 옷을 갈아입는 경우, 그리고 아직 갈아입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는 경우.
더 좋은 옷을 갈아입는 경우, 죽음은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다. 살아생전 복덕을 많이 지었거나 마음공부를 잘한 사람들의 경우가 이렇다. 이런 사람들의 죽음은 슬퍼할 일이 아니다. 박수 치고 기뻐할 일이다. 다만 남아 있는 사람들의 여한이 있어 슬퍼할 수는 있어도, 간 사람에게는 잘 된 일이다.
더 나쁜 옷을 갈아입는 경우, 죽음은 한탄스러운 일이다. 살아생전 박복한 업을 지었거나 마음공부를 소홀히 한 사람들이 이런 예에 해당된다. 이런 사람들의 죽음은 안타까운 점이 많다. 하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잘 된 일이다. 세상의 어두움이 덜어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아직 옷을 갈아입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급작스런 사고 등으로 스스로의 죽음을 인정치 못하거나 앞길이 불투명해 길을 못 떠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렇게 본인들이 헤매고 있는 때에 재를 올려 공양을 베풀고 경전독송과 법문을 통해 의식을 안정 및 고양시켜주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살아생전 마음공부 열심히 하고 복업을 짓는 일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이치에 입각해볼 때 결국 잘 사는 이가 잘 죽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