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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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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타 - 박재은 2006년 02월 288호
홍상수 감독이 몇 년 전에 만든 영화 ‘생활의 발견’. 막대한 제작비나 신기한 컴퓨터 그래픽과는 상관이 없는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생활의 발견’을 수차례 본 것 같다. 워낙 좋아하는 감독의 작품이기도 하거니와 멋진 제목 때문에라도 자꾸 보게 되었다. ‘생활의 발견’, 이 얼마나 무 심심 하고도 경이로운 사건인가? 매일 살아가는 일상을 들여다보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반복되어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 그런 일들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어서 대개 그냥 지나치게 되는데, 자세히 뜯어보면 하나하나 각자의 매력이 있게 마련이다. ‘생활의 발견’이라는 문구는, 영화랑 상관없이 최근 몇 년간 내 라이프스타일을 조금씩 바꿔 준 기도가 되었다. 어찌된 일인가 하면 ‘생활의 발견’을 위해 하루 한 가지씩 사소한 기쁨의 순간을 꼽아보게 된 것이다. 사소한, 소소한 기쁨의 순간들은 의외로 자주 일어난다. 과묵하기로 유명한, 게다가 전화 통화를 싫어하는 내 친정 아빠가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시간 있으면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실 때, 그래서 계획에 없던 아빠와의 런치 데이트를 하게 될 때 사소한 기쁨이 넘친다. 슈퍼에서 자질구레한 장을 본 후 4천 7백 원을 지불하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더니 지폐 몇 장과 정확히 일곱 개의 백 원짜리가 있을 때 사소한 기쁨이 인다. 슈퍼 아주머니가 목욕탕에서 얻어온 샘플인데 써보라면서 샘플 사이즈의 로션을 쥐어주면 사소한 기쁨은 배가 된다.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을 폈는데 좋아했던 문구가 실린 페이지가 한 번에 펴졌을 때, 그리고 밑줄이 쳐 진 책장 한 구석에 작은 메모가 있을 때 십 년 전 나의 생각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기쁘다. 아주 오랜만에 친구와 마주쳤는데 왜 연락도 없었냐며 나무라지 않고 밥은 먹었냐고 물어봐 줄 때 나는 기쁘다. 잠 못 이루는 새벽에 ‘자니?’라고 엄마의 문자 메시지가 오면 바로 전화를 걸어 친구처럼 수다를 떨 수 있어서 기쁘고, 이제 그만 자라고 내 애칭을 불러주는 엄마의 목소리가 포근해서 스르륵 잠이 들게 된다. 단골 밥집에 갔을 때 내가 늘 앉던 자리가 비어 있으면 기쁘고, 공휴일이 평일이면 기쁘고, 하나뿐인 남동생이 나를 귀엽다 하며 어깨를 꽉 잡아줄 때 기쁘다. 조마조마하게 입어본 타이트 한 바지가 딱 맞았을 때 으쓱하면서 기쁘고, 지하철 3호선이 금호역을 지나 지상으로 내달릴 때 반짝이는 한강을 보며 다리를 건널 수 있어서 기뻐진다. 아침마다 배달되는 팩 우유를 남편이 집어서 팩 상단을 삼각으로 접어 열고, 그 첫 모금을 나더러 먼저 마시라며 쭉 내밀 때 고소한 우유보다 다정한 그의 마음이 기쁘다. 망설이다가 새로 산 샴푸의 향기가 은은하면 기쁘고, 식후에 차를 못 잡아서 어쩔 수 없이 걸었는데 덕분에 소화가 잘 되고 나면 기쁘다. 기차를 타고 가던 중 잠깐 졸다가 깨어났더니 목적지에 얼추 다다랐을 때 기쁘고, 서울보다 따뜻한 지방의 작은 역에 내렸더니 벌써 꽃망울이 오르고 있을 때 봄을 느끼게 되니 기쁘다.

봄 동 부침개
나는 사계절 가운데 봄이 제일 좋다. 짧아서 아쉽지만, 만물이 땅에서 툭툭 터져 올라오는 그 생명력은 말할 수 없이 매력적이다. 지구촌의 기온 이상으로 가뜩이나 짧은 봄은 갈수록 더욱 짧아지고 있다는 것이 걱정인데, 즉 촉각을 세우고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며 ‘생활의 발견’을 할 수 있는 이들만이 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다. ‘봄이면 어떻고 여름이면 어떠리’하며 ‘인생 대박’이 나지 않는 한 제 인생에는 기쁨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무기력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생활의 발견’들이 봄에는 더 많아진다. 가죽 옷을 뚫고 살을 찌르던 칼바람 공기가 스리슬쩍 온화해진다. 앙칼지게 화만 내던 예쁜 애인이 어느 날 쌜쭉 웃으며 품에 안기는 것처럼 기쁜 일이다. 목련이 피고 동백이 피고 개나리가 피고 철쭉과 진달래가 만발하면서 전국은 꽃밭이 된다. 하우스 딸기보다 훨씬 작고 탄탄한 봄 딸기가 시장에 나오고 이어 앵두랑 산딸기도 보이기 시작한다. 산에 오르면, 신이 난 소나무들이 산소를 마구 뿜어대 솔 향이 진동을 하고, 거기에 섞인 온갖 들꽃 냄새에 취해 사람들은 쉽게 사랑에 빠진다. 두릅, 미나리, 냉이 같은 푸릇한 먹거리가 지천으로 솟아올라 입 안을 향기롭게 해주고, 고소하고 단 맛이 일품인 봄 동 한 포기면 툭툭 잎을 따서 부쳐 먹기에 그만이다. 거창하게 준비할 것도 없이 부침 가루에 물 넣어 되직하게 풀고, 시쳐낸 봄 동을 한 잎 두 잎 얹어 지져내면 요리 끝. 쫄깃하게 부쳐진 지짐을 한 입 척 베어 물면 달달한 봄배추가 입안을 가득 메워 겨우내 움츠려 있던 감각을 깨운다. 지난 가을에 생 오미자를 재워 만든 오미자 청을 냉수에 풀어 곁들여 마시면 어떨까?

‘생활의 발견’은 거창하지 않지만 생활을 바꾸는 저력이 있다. 매일 매일 내 삶에 어떤 기쁨이 주어지는지 한번 살펴보자. 크게 불평할 것도, 유난스레 호들갑떨 것도 없이 나만의 기쁨을 은은하게 누리는 재미를 누구든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