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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소리는 서로 응대한다(同聲相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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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이야기 그림 이야기 - 김현정 2006년 02월 288호
천지天地가 스스로 옮겨 가는 모습은 단순하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천지는 이렇듯 움직임으로써 자연을 변화하게 한다. 만물을 생장케 하는 것(生物子)은 스스로 생장하지 않으며, 물건을 변화시키는 것은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존재할 뿐이다.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설한 바 법이 있다’고 이르지 말라. 이런 생각을 하지 말지니 무슨 까닭인가 하면 만약 사람이 말하길 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고 하면 이는 곧 부처님을 비방함이니라. 능히 내가 설한 바를 알지 못한 연고니라. 수보리야 설법이란 것은 법을 가히 설할 것이 없음을 이름하여 설법이라 하느니라.
<금강경 비설소설분 제 이십일金剛經 非說所說分 第二十一>

여래께서도 중생에게 설한 바가 없다 하셨으니 중생의 근기는 스스로 이룬 것이요, 스스로 아는 것이며, 스스로 힘을 얻고, 스스로 쉬는 것이다.
불생不生하는 것이 능히 생물을 생장케 한다 하였으니 하늘의 불생자不生者는 해와 달이요, 대지의 불화자不化者는 땅과 물이다. 하늘의 태양과 땅의 물이 서로 응대하며 바람과 구름, 비로서 서로 교감하니 수화水火의 어우러짐으로 생물은 바야흐로 소생하고, 변화하며 사라지고, 휴식한다.
물은 만물을 소생시키는 근원이다. 또한 물은 어둠과 같아 천지간 어디에고 자재自在한다. 모여서 흐르고, 흩어져 구름과 바람으로 만물을 키워내니 그 자리가 어떠하든지 마다하지 않는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찾아 흐르되 높다고 거만하지 아니하고 낮은 곳에 있다 하여 비굴하지 않은 것이 물이다. 만물과 어우러져 존재할 뿐이다. 낮은 자리에선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있으며, 모이면 그 기세로 주변을 변화시키는 미덕이 있다. 바다에 이르러서는 스스로를 깨끗이 하여 만물을 정화시키는 공덕이 있고, 태양과 화답하여 주저함이 없이 다시 자기 자리로 찾아가는 진정이 있다.
같은 소리는 서로 응대하는 것(동성상응同聲相應)이라 하였으니 지혜로운 이가 물을 사랑함이 이와 같다. 지혜와 인자함은 인간이 갖추어야 할 최대의 덕목이니 이 어느 것이 부족한들 완전함이 있겠는가.

강희안姜希顔(1417~1465)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는 군자의 지혜로움과 고요함이 담긴 그림이다. 인적이 없었음직한 깊은 산중에 맑은 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맑은 시선으로 군자의 마음은 이미 그 물과 하나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화면에서 물이 차지하는 부분은 많지 않으나 물은 이미 주인공과 하나가 되고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과 또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그림은 그 맑은 시냇물 자체가 되며 그 안에서 청명한 기운이 어느새 펼쳐 나오게 되는 것이다.
강희안이 그려낸 물의 성품은 고요하고 청명한 경지이다. 다급함도 없으며 흔들리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맑고 고요하여 자신의 성품을 비추고 성찰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었던가. 여래께서 무량수불의 세계를 관하는 법을 가르쳐주실 때 두 번째의 관상觀想이 바로 물이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변화가 무쌍한 것이 또한 물이다. 물은 바람을 만나면 함께 흔들려 파도가 되고, 머물러서는 고요하다. 또한 온기를 만나면 태양의 빛과 하나가 되어 구름이 되고, 구름이 모이면 비가 된다. 주변과 어울려 둘이 되는 법이 없이 조화롭다. 강희안이 궁극에 그리고자 했던 물을 관하는(관수觀水) 선비의 마음이 바로 그런 것이었으리라.
강희안은 조선 세종조과 세조 때 활동하던 이름 높은 문신이었다. 성리학적 가치관을 지선의 것으로 삼던 시기였지만 강희안은 불교와도 멀지 않았다. 세종이 위독하자 미타관음 경문을 써 쾌차를 기원하기도 했으며, 세조의 능침사찰인 봉선사 대종大鐘을 주조할 때 함께 동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이 조선 초기 왕실과 사대부들의 불교를 보는 태도가 아니었나 싶다.

흠산 선사가 와룡臥龍 설봉雪峰 두 선사와 함께 차를 달이는데 마침 밝은 달이 찻잔의 물에 비치자 말했다.
“물이 맑으니 달이 비치는구나!”
와룡 선사가 그 말을 받았다.
“맑은 물이 없으면 달이 비치지 않습니다.”
이에 설봉 선사가 찻잔의 물을 쏟아버리고 말했다.
“물과 달이 어디에 있는가?”

새해 첫 보름달이 하늘 높이 온 땅을 비춘다. 산도 비추고 강도 비추며 바다에도 비추고 미인의 눈 속에는 그 달이 담겨 있다. 그러니 천 개의 강에만 비출 일은 아니지만 휘영청 보름달이 천 개의 강에 비추고 다섯 큰 바다에 일일이 나투니 천 개의 강이 마르고 큰 바다가 다 할 때 밝은 달도 거기에 있을 것인가? 비추는 달도 무심하고 그 달빛을 담은 강도 무심하다. 비추겠다는 마음도 내지 않았으려니와 그 달빛을 받은 강물도 그 그림자만을 담는 일에 무심하기 짝이 없다. 그러므로 천 개의 강에 달빛이 비추었으되 정작 그 달빛이 머무는 곳은 어디가 될 것인가? 찻잔도 아니고 마음 속도 아니니 달빛은 긴 잠에서 깨어나고 중생은 달빛 묻은 깊은 밤을 재촉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