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부부는 대학시절 사단법인 룸비니 대학부에서 만나 결혼하고 함께 불심을 키워왔다. 이미 결혼하여 독립한 자녀들도 모두 우리를 뒤따라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의 보살핌 속에 살고 있다.
3년 전 우리 부부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강원도 홍천으로 내려왔다. 직장생활을 자진하여 마감하고 전원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서울 종로 토박이로 이른바 문안 사람인 까닭에 농사는 엄두도 못 내었다. 다행히 30년 동안 바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책을 가까이 해온 덕분에 약 1만 권이 넘는 책을 지니게 되었다. 한편 아내는 자녀들을 키우는 틈틈이 네, 다섯 군데의 대학을 더 졸업하고 제과제빵과 한국전통조리, 떡 등을 연구하고 가르쳐왔다.
우리 부부는 산골 허브농원 안에 있는 자리를 세내어 <Peace of Mind>라는 베이커리 북 카페 겸 아내의 이름을 딴 <이형숙 허브빵+떡 연구소>를 차렸다. 아내는 육신의 양식인 빵을, 나는 정신의 양식인 책을 맡아 빵과 책이 어우러진 공간을 산속에 만들었다.
카페를 찾는 손님들은 아름다운 공작산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의 새로운 일터를 보시고 절터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좋은 명당자리라고 하신다. 또한 찾아오시는 손님들 중에는 <마음의 평화>라는 뜻의 이름도 아주 잘 지었다고 하신다. 그리고 이름의 사연을 물어보신다.
대학시절 여름방학 때의 일이다. 우리 부부는 사하촌寺下村에 있던 평화여관에 머물면서 영주의 부석사에서 참선을 하고 예불을 올리며 휴가를 보냈다. 그때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의 모습을 우러러보며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려보았다. 이때 느꼈던 부처님의 마음에 평화여관의 추억을 더하여 카페의 이름을 <마음의 평화>라고 지었다. 우스갯소리 같이 들릴 수도 있는 사연이지만, 우리는 이렇게 부처님께서 지어주신 상호를 써가며 부처님의 숨은 공덕 속에 살고 있다.
나는 부처님께서 우리 부부의 나이인 50대 후반 이후를 어떻게 사셨을까 궁금하게 생각하였다. 나는 궁금증을 풀기 위하여 직장생활을 정리한 다음 인도로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아내는 나에 앞서 10년 전에 이미 성지순례를 다녀온 바 있다. 나는 룸비니성지순례단의 단장을 맡아 12명의 도반을 모았다. 마침 대학 졸업을 앞둔 아들 형태도 따라나서 모처럼 부자가 함께 부처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따라 여행하며 성지에서 예불을 올리는 더 없는 행운과 복을 누렸다.
나는 여덟 곳의 성지를 찾아 돌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하고 알게 되어 성지순례가 주는 커다란 법열을 보다 깊이 느끼고 감사하게 되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다음부터, 그리고 50세를 넘겨 80세에 열반에 드실 때까지 45년간 끊임없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몸소 많은 길을 찾아 맨발로 걸어다니셨다는 사실이다. 비로소 왜 일부 신자들이 부처님의 발-불성족상佛聖足相을 모시고 예경하는지를 깨우칠 수 있었다. 내가 읽은 어느 경전에서도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다음에 말이나 소가 끄는 수레나 사람이 드는 가마를 타셨다는 기록을 읽을 수 없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중생들을 위하여 거친 길을 ‘맨발로 찾아 가시고-여거如去하시고’, 이와 같이 우리를 향하여 ‘맨발로 다가오신-여래如來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시고 많은 제자들을 두신 다음에도 몸소 매일 아침 일찍 자신의 발우鉢盂를 드시고 맨발로 가까운 마을을 찾아 공양을 받아 드셨다. 요즘의 인도인들이 먹는 식사에 미루어볼 때, 아마 난이라는 납작한 화덕에 구운 원시적 형태의 단순하고 담백한 빵에 야채나 과일, 카레를 얹은 밥 등으로 매우 검소한 공양을 드셨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부처님은 열반에 드시는 순간까지도 말씀과 행동으로 모든 중생들의 제도를 위한 설법을 하시고 가르침을 주셨다. 그것도 당시 엄격한 계급사회에서 천대를 받던 바닥 층의 중생들까지도 아무런 차별을 두시지 않고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부드럽고 평이한 말로 설법을 하신 것이다.
나는 위와 같은 세 가지 행적만을 비추어볼 때에도, 어떻게 부처님이 당시 인도사회의 평균수명을 훨씬 넘어 80세까지 건강하게 사시고 장수를 누리셨는지 그 비결을 알 것 같았다. 부처님은 첫째 많이 걸으셨다. 둘째 중생구제라는 일을 쉬지 않고 즐겁게 하셨다. 셋째 위대한 스승이 되신 다음에도 소박한 밥상, 그것도 직접 탁발하여 받은 모든 음식을 가리지 않으시고 골고루 잡수셨다. 넷째 부처님께서는 찾아오는 사람 모두에게 편안함을 주시고 마음의 평화를 열어 보여주셨다.
나는 성지순례를 다녀온 다음부터 보다 철저하게 부처님을 본받아 살기로 하였다. 즉 죽는 날까지 부처님을 본받아 더 많이 걷고, 손수 일을 찾아 내 손을 움직여 일하며, 검박한 식사를 하며, 모든 손님들에게 편안함을 주며 살기로 하였다. 그래서 나는 카페에서 정성을 다하여 직접 홀 서빙을 하며, 산을 오르고 내리며 많이 걷고 있다. 비록 설법을 할 만한 자격은 없으나 홈페이지와 책을 통하여 고객과 독자들과 만나 내 나름대로의 낮고 어리석은 생각과 뜻을 열어 보이며 살고 있다. 또한 검소하고 질박한 식사와 그 동안 사두었던 헌옷을 깨끗하게 잘 다듬어 입고 살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비록 부처님 같은 큰 지혜는 없어도, 나름대로 꾸준히 공부하고 수행하며 배운 것을 바탕으로 하여 최소한 나같이 어리석은 사람도 함께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 올해에는 <추사 김정희를 뛰어넘어>라는 서예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이 책에 이어 성지순례를 다녀온 감회를 보다 자세히 풀기 위하여 부처님의 말씀과 기록을 좀더 공부하면서 또 다른 한 권의 읽기 쉬운 책을 쓸 계획으로 있다. 일단 책의 제목을 <나는 맨발의 빵 먹는 부처님이 좋다>로 정하였다. 책을 통하여 내가 배워 가지고 있는 것을 독자들과 나누어 갖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나이 50을 넘긴 다음의 우리 부부 나름의 이런 삶의 방식도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굳게 믿고-신信, 알아 깨치고-해解, 닦고 실천하며-행行, 원만한 삶을 사는-증證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