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색무과지시인 一色無過指示人하니앙산仰山 선사가 눈으로 만든 사자를 가리키면서 일렀습니다.
“이 흰 눈빛보다 더 뛰어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때 운문 선사가 말했습니다.
“그때 바로 밀어서 쓰러뜨려야 했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설두 선사가 말했습니다.
“다만 밀어 쓰러뜨릴 줄만 알았지, 붙들어 일으킬 줄은 모르는구나.”
천하 제일의 명산 금강산도 겨울이면 개골산으로 바뀝니다.
살점은 모두 없어지고 뼈만 남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때는 천하의 모든 산들이 그 진면목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 골산 위로 눈이 펑펑 쏟아지면 모두가 설봉산이 됩니다.
안주 대안산 숭교 능崇敎 能 선사의 회상에서 납자들간에 오고간 문답은
겨울안거의 또다른 살림살이를 보여줍니다.
“어떤 것이 겨울의 경계입니까?”
“천산千山은 증수색增秀色하고 만수萬樹에는 개은화開銀花로다.
모든 산은 우뚝함을 더하고 온갖 나무에는 눈꽃이 피었느니라.”
이런 날 앙산 선사 역시 흰눈으로 사자모양을 만들어놓고는
동안거 결제대중에게 가차없이 한마디를 내던진 것입니다.
“이 흰 눈빛보다 더 뛰어난 빛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하니 안목을 자랑하는 운문이나 설두가 한마디 거들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흰눈도 흰눈이지만 사자 역시도 그 못지 않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단하 선사나 분양 선사 역시 법거량의 수단으로 사자를 끌어오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등은봉이 단하천연 선사를 찾아가다가 산 밑에서 선사를 만났습니다.
“단하산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선사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습니다.
“저 푸르스름한 곳이오.”
이에 등은봉이 선사 앞으로 바짝 다가가더니 갑자기 멱살을 쥐고는 말했습니다.
“이것이 단하 아닌가?”
그러자 단하 선사는 말했습니다.
“진짜 사자새끼는 한번 건드리니 선뜻 움직이는구나.”
또 분양선소 선사가 정진대중들에게 말했습니다.
“분양의 문하에는 서하西河사자가 문턱에 걸터앉아 누구든지 오기만 하면 물어뜯어 죽인다.
그러하니 무슨 방편을 써야 분양의 문안에 들어와서 이 분양의 사람됨을 제대로 볼 수 있겠는가?”
분양의 사자는 매우 사납고 또 가장 무서워서 부처가 와도 물어뜯고 마구니가 와도 물어죽이니,
서천과 동토의 범부와 성인을 가리지 아니하고 온 삼천대천세계가 몸과 목숨을 잃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동안거철에 반살림을 마치고 용맹정진을 앞두고 있는 대중 속에서
앙산 선사의 ‘설사자’ 공안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는 출격장부가 있다면
그가 바로 참으로 사자새끼라고 할 것입니다.
흰빛은 뭇빛의 근본입니다. 눈빛이 지극히 희니 어찌 이 빛보다 더 뛰어난 빛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보다 더 뛰어난 빛은 오직 빛 없는 것으로서 그 어느 빛이라도
상대조차 할 수 없는 그 빛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운문은 밀쳐버려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외곬수처럼 지극히 희거나 또 흰빛마저 없는 곳에서만 알아차리려고 한다면
도리어 빛 없는 경계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설두 선사는 밀어넘긴 눈사자를 다시 일으켜 세웠던 것입니다.
운문은 한결같이 넘어뜨리고 설두는 한결같이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런데 앙산이 눈사자를 가리킨 것은 이러한 빛에 대하여
대중들의 집착이 벗어날 수 있길 원했던 것입니다.
사실 눈이 제대로 뚫린 납자가 본다면 이 세 선사의 안목은 솥의 세 발과 같아서
어느 한마디라도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앙산은 사람들이 밝고 흰 자리에 앉아 있을까를 걱정하면서
사람들이 이 빛을 뛰어넘어 가도록 해주었으며,
운문은 다시 한결같은 빛 쪽에만 앉아 있을까봐 걱정하면서
바로 밀어 쓰러뜨린 것이니 이 또한 용감하게 의리를 보인 것입니다. 설두는 이 법을 범할까 조심하면서
어질기를 생각한 것이지만, 다시 능히 붙들어 일으키니 이것도 또 용감하게 의리를 행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어쨌거나 산승이 보기에는 앙산의 이야기는 흡사 한 필의 비단 같은데
운문은 긴 것을 끊어내기에 익숙했고 설두는 짧은 것을 덧대어 이어내는 데 능숙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세 노장은 각각 장점이 있으니 여러분은 어떤 선사의 안목이라고 할지라도 스스로 골라내어
그를 모범으로 삼아 정진하면 될 것입니다.
사실 밝고 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까닭은 밝은 빛이 눈에 비치니
스스로 자기의 본래 집(宅)을 미혹한 것과 같고, 밝고 흰 곳으로 몸을 돌리긴 하였으나
도리어 경계에 떨어져버린 까닭입니다. 그러하니 다만 밀어 쓰러뜨릴 줄만 알고
붙들어 일으켜 세울 줄 모른다면 무엇에다가 어디에다가 쓸 수 있겠습니까?
본분납자라면 구슬이 소반 위를 구르듯이 같이 죽고 같이 살지만 생사에 연연해 하지 않고,
피차가 없건만 사실 방편으로 피차를 세워놓은 것일 뿐임을 압니다.
고목枯木을 따르려고 한다면 얼어버려 절로 여의게 될 것이요,
봄바람을 좇으려고 한다면 논두렁에 쥐불을 놓아야 할 것입니다.
얼음과 서리가 같은 빛이요 눈과 달이 교차로 서로 비추어 법신마저 철저하게 얼어붙게 만드니,
그때 오히려 고기 잡는 어부는 할일이 없어져 한가하기만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눈빛은 순일하여 잡됨이 없게 되고, 구족히 청백한 범행梵行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종문에서 정진하는 납자들은 바야흐로 넘어질 때에 문득 일어나고 바야흐로 일어날 때
문득 쓰러지는 시절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일어남과 쓰러짐이 동시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어나고 쓰러짐을 세우지 않게 된 뒤에 다시 짚신을 사서 신고는 30년쯤은 행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삼십년의 행각을 이번 용맹정진기간의 일주일 동안 해마쳐야 할 것입니다.
설작사자아 雪作獅子兒하니
추도몰인규 推倒沒人窺로다
춘래일우난 春來日又暖하니
갱부존호사 更不存毫絲로다
눈으로 사자를 만들었는데
밀어 쓰러뜨리니 아무도 모르는구나.
봄이 되고 날씨마저 따스하니
다시는 털끝만한 것도 남기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