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 차가운 어느 날 한 장의 연하장을 받았다.
선명하게 찍혀 막 물기가 가신 듯, 매끈매끈하고 반듯한 이름 석자, 물끄러미 바라보다 섭섭한 마음 한 자락이 팔랑인다.
많은 우편물 속에서 나는 왜 그 이름을 만났을 때 이런 마음이 들었을까. 그마저도 보내지 않았다면 차라리 아무 마음도 내지 않고 지났으련만.
꼬물꼬물 친필로 쓴 이름이기를, 육필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사람 대신 온 연하장에서 느끼는 의례적인 반듯한 예의가 주는 거리감이 싫었나보다. 길거나 짧게 비뚤어지고 조금 떨리며 애써 반듯하게 그으려 흔들린 글자 속에서 조금 허술하고 굽기도 하며 느리고 어눌한 뒷모습을 만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어지간한 속내를 얘기하며 늙을 수도 있었으련만 세월 속에 묻혀 지나가버린 이름에 대한 회한이었을까. 백천만겁 만나기 어려운 인신人身도 얻었고 불법도 만나 정법을 향해 부단히 나아가니 더 무엇을 바램하련만 더불어 함께한 세월 없어도 참 오래 된 인연들임을 알아보는, 그럴 때마다 다만 이만큼의 연일 뿐이라고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내 길을 가지만 깊이 묻힐수록 하늘 밖으로 고개 내밀고 싶은 풀씨처럼, 때때로 사람이 그리울 때가 있다.
강과 강, 강과 바다, 사막과 초원, 땅과 땅끝, 사람과 사람, 서로 다른 유역과 문화와 인종이 만나 얽히고 설키는 그 지점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사바세계 존재유형 그 가운데 사람이 사람에 대한 관심만큼 지대한 것이 있을까.
어느 날부터 산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유한의 시간과 변하는 인정에 대한 불변의 믿음을 산에 의지하여 회복하고 싶었음이라. 의연하여 본분사를 잊지 않고 습과 업을 끊고 속탈俗脫을 꿈꾸기에 그보다 안전하고 믿음직스런 의지처는 없다.
두려운 자보다 사랑하는 자를 더 쉽게 배신할 수 있는 이중성, 함정을 알아차리려면 여우여야 하고 늑대를 혼내주려면 사자여야 함을 구태여 군주론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내 속의 흐름을 지켜보는 오늘 나의 화두는 불청지우不請之友 불고연심不顧戀心이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청하지 않아도 늘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아 주는 벗.
돌아보고 연연해 하는 마음 없는 이구지보살離垢地菩薩의 행 그 길을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