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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자는 초능력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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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의 부처 - 장휘옥 1995년 07월 161호
“이모, 그러면 깨달은 자는 초능력을 가진 자라 보아도 되겠네요?ꡑ
“아니, 안 되지. 초능력을 가진 자는 텔레파시나 신통력처럼 과학적으로 아직 해명하지 못하는 인간의 불가사의한 능력을 가진 자를 말하지만, 깨달은 자는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초월한자, 다시 말하면 우리들 삶의 있는 그대로의 참다운 모습을 깨달아 진정한 자유인이된 자를 말하는 것이니 본질적으로 다르지.“
지금까지 깨달은 자 부처란, 인간에 대한 자각, 다시 말해 인간존재(자아)의 실상을 올바로 파악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설명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부처란 우리와는 다른 어떤 초능력을 가진 분‘ 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인 듯하다. 물론 깨달음을 얻은 경지가 되면 신통력이 생기고 미래를 예견하는 안목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초능력이 이니라 깨달으면 저절로 갖추어지는 능력인 것이다.
앞에서 중생과 부처의 관계를 장님과 눈 뜬 자에 비유해서 설명했는데, 만일 장님과 눈뜬자가 여러 갈래의 길이 있는 산의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간다고 가정해 보자.
장님은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몇 개의 길이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지팡이로 더듬어 일단 길이 나오면 무조건 그 길로 내려갈 것이다. 우연히 제일 먼저 더듬어 찾아내려간 길이 지름길이고 평탄한 길이라면 곧바로 내려갈 수 있겠지만, 만일 그 길이 중간에서 막히거나 장애가 있어 더 이상 나아가기 힘든 길이라면 다시 되돌아와 다른 길로 가야 할 것이고, 다시 그 다음 길이 막히면 또 다른 길을 가보고 이렇게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겨우 아래로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을 뜬 자가 산정상에 서면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에게는 아래로 내려가는 길
이 한눈에 보이기 때문에 장애가 없는 지름길을 골라 단번에 그 길을 내려갈 수 있다. 이 때 장님에게는 이러한 사실이 불가능한 일로 여겨질 것이다. 장님의 입장에서 보면 눈 뜬 자가 마치 신통술을 부리는 것처럼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실은 장님과 눈뜬자의 인식하는 경지가 다르기 때문에 장님에게 그렇게 느껴질 뿐. 눈뜬자에게는 이것이 결코 신통술도 마술도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좀더 확대해 생각해 보면, 깨달은 자 부처는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일을 다 알고 있음도 이해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시간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편의상 구분지어 놓은 것이지 그 자체에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현재라는 시간을 생각했을 때 그 현재는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으므로 결코 현재라는 시각을 불잡을 수 없다. 이와 똑같은 원리로 현재라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미래는 벌써 현재의 자리에 들어와 있으므로, 결국 과거, 현재, 미래는 어떤 경계가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의 순간의 연속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어떤 존재하는 것의 직선적 시간을 추정하여 과거, 현재, 미래에 그것이 실재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러한 시간은 어디에도 없으며, 실재로 있는 것은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현재, 곧 절대 현재가 있을 뿐 과거는 기억 속에 미래는 희망이 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현재,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전생이라는 것도 현생과 결코 단절된 사간이 아니며. 단지 우리와 같이 한
계를 가진 인간의 인식으로는 감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부처님, 곧 한계를 초월한 깨달은 자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일이 한눈에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식의 한계를 초월한 진정한 자유인, 말만 들어도 멋있다고 생각되지 않니?ꡑ
‘그렇게 되면 고통도 저절로 없어지겠네요?ꡑ
‘당연하지. 불교의 출발이 바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함이고, 그래서 석가모니의 출가 이유도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았니.’
“이모, 그런데 왜 불교경전에는 석가모니가 만년에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다고 되어 있어
요? 예를 들어 석가모니가 감기가 들어 잘 낫지 않게 되자 시자인 우파바나가 바리문의 집에 가서 더운물과 꿀을 얻어 와서 석가모니의 병을 낫게 했다거나, 또는 석가모니가 허리가아파 괴로워하자 시자가 허리를 주물러 드렸다는 이야기들 말이예요”
인간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므로 이것은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석가모니가 깨달은 자라 하더라도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는 한 이 자연의 법칙을 거역할 수 없다. 깨달은 자 석가모니가 우리와 다른 것은 사물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과 같은 자연의 법칙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달은 자가 부처이다. 깨달은 자는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를 알기 때
문에 결코 그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고통이 없다. 고통이란 내 의지와 상반될 때 생기는 것이다. 예를들면 우리는 사계절의 순환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겨울이 춥고 싫더라도 결코 겨울이 오는 것을 거역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리 겨울이 싫다고 발버둥쳐 보아도 가을 다음에 겨울이 오는 것은 막을 수 없는 기정 사실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계절의 순환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겨울은 무조건 줍고 싫은 계절로 생각되기 때문에 겨울은 그들에게 최악의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겨울의 속성을 잘 알아 겨울에 대처하는 방법을 강구하고. 겨울을 철저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오히려 겨울을 즐길 수 있으므로 현명한 사람에게는 겨울이 고통의 계절이 아니라 즐거움의 계절이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생 다음에 사, 사 다음에 생이 온다는 우주 순환의 이치를 안다면
우리는 결코 사를 두려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에 대처하는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깨달은 자에게 고통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이러한 고통이 없는 상태를 우리는 해탈 혹은 열반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