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스님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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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성태용
1995년 07월 161호
다시 스님께 올립니다.
지난번에 불쑥 버릇없는 글 올리옵고 오랫동안 소식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옛 편지 글투 흉내를 볼까요? 요즈음 도황이 나날이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고 계신지요? “도는 무슨 놈의 도!ꡓ 하며 헌걸차게 웃으실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마는, 그래도 스님 뵈오면 꼭 그렇게 한
번 여쭙고 싶은 것이 이 중생의 마음입니다.
스님께서는 잘 모르겠지만, 이 중생은 스님들만 뵈면 늘 주눅이 들고, 또 공연히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은 마음이듭니다. 왜냐구요? 실은 대학 이학년 때인가, 출가를 결행하고픈 의지가 서서 부모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ꡐ굳이 반대는 않겠다만 네가 만일 대학을 졸업하고도 그 의지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 때 다시 이야기하거라ꡑ 하는 바람에, ꡒ그렇다면....“ 하고 결행을 미루었지요. 그리고는 대학 졸업할 무렵에는 연애 삼매경에 있는 바람에 영 걷지 못한 길이 되었고요. 지금의 상태를 후회하는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내가 못 간 길을 당당하게 가고 있는 스님들을 보면 주눅이 들고, 한편으로는 샘이 나 투정을 부리고 싶은 겝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스님네들이 그 길을 올곧게 걸어 주길 바라는 마음이 남보다는 곱절 간절하기도 하고요.
그런데요. 스님, 그렇게 스님 컴플렉스가 있고. 그러기에 스님이라면 무조건 높아 보이는 저에게 좀 죄송스런 불만이 있습니다. 바로 삼귀의에 ‘귀의승歸依僧‘을 ꡐ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ꡑ로 한글화한 것 말입니다. 그 자세한 의미를 논할 자리는 아니고, 그러한 번역이 틀렸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다만‘승僧ꡑ 에 들어 있는 좀 폭넓은 의미를 살린다면 현실의 불교에 좀더 깊은 의미를 갖게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되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어줍잖게 제 생각을 말씀 드려 보겠습니다.
저는 ‘부처님ꡑ이란 우리에게 진리를 알려 주고, 또 그 진리를 성취한 참다운 생명의 전형을 보여 준 분이라 생각합니다. ‘법法’ 은 바로 부처님이 깨달은 모임, 넓은 의미로 생각한다면 불법에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이 라고 생각하고 싶은 겁니다. 좁게 말하면 스님들의 조직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참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구현한 새로운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굳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현실에서 불교가 온통 개인의 깨달음에 의존하는 그런 가르침으로 이해되면서, 사회성을 띄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러한 것이 불교의 참모습일까요? 저는 부처님이 연 승단이라는 것은 인류 역사에 평등성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인도사회가 얼마나 철저한 계급 사회였습니까? 거기에 모든 계급을 초월한 펑등한 관계로 맺어지는 ꡐ승단‘ 을 열었다는 것은 부처님이 가르친 진리에 따르는 새로운 사회를 보여 준 것이 아닐까요? 이런 의미가 좀 살아나도록 ‘귀의승ꡑ을 해석할 길이 없을까요?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저희 같은 재가 불자도 그 언저리에 끼어서 한편으로는 부처님과 스님들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좀더 주체적으로 부처님의 삶에 따르는 삶과 그런 사람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이룩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어서지요.
“거룩하신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하는 번역에는 저희 재가 불자가 어떤 주체로 나설 자리가 없습니다. 단순한 ꡐ교화의 대상’ 에 머물러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재가 불자가 그렇게 단순한 교화의 대상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파행적인 모습을 낳은 중요한 원인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전 부처님의 장례 문제를 걱정하는 스님들에게 그것은 재가 불자의 일이니 출가자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다 하지요? 저는 이것을 부처님의 재가 불자에 대한 엄한 부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님들이 출가인답게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모시고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야말로 재가 불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일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결국 스님들이 온갖 세속적인 일에 시달려야 하고, 그래서 피치 못하게 오욕에 빠지기도 하고, 그렇다고 하여서 스님들을 위한 복지 시설이나 노후 보장같은 것이 제대로 된 것도 아니고... 이런 점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래도 이런 기회에 스님들께 말씀이라도 여쭙는 재가 불자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만든데는 스님들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재가 불자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묶어 놓고 손짓 하나로 이리 저리 움직이게 하는 것이 편하다 하고 생각한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정말 스님들께 ꡐ저희도 열심히 해 보겠으니, 저희들이 주체가 될 수 있는 자리도 좀 주십시오ꡑ 하고 매달리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스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ꡐ우리는 선우善友ꡑ 라는 재가 불자 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딱히 스님을 모시고 일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지금의 현실에서는 어떤 스님에게 의존한다는 것이 자칫하면 한 스님의 개인적 차원과 연결되기 쉽기에, 일에 따라 스님들의 가르침을 구하는 방식으로 하면서 순수한 재가 불자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정말 스님을 내세우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습니다. 재가 불자 스스로가 아무리 불교를 위하고 사회를 위하는 좋은 일이라도, 재가 불자 중심으로 한다는 데는 선뜻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아요. 그거야 물론 스님네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위신력의 덕분일 수도 있습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불교의 불사라는 것이 철저히 불교인들만의 자위행위적인 성격에 머물러 있다는 이야기도 되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 때문에 좀 힘들고 갑갑하더라도 이런 때 스님들께 매달려 버리면 영원히 재가 불자의 제자리 찾기는 물 건너 가 버리고 만다는 생각에 참고 견디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물론 이해해 주시겠지요. 저희들의 제자리 찾기가 바로 스님들의 제자리 찾기를 도와 드리는 길이라는 것을요. 그런데 모든 스님들이 그렇게 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좀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어떤 스님들은 매우 고까운 눈으로 저희의 재가 불자 운동을 보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였습니다. 그럴때는 정말 안타까운 생각에 불쑥 스님을 찾아가 하소연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래 봤자 한바탕 꾸중이나 듣거나. 아무리 운이 좋아도 ꡐ성교수가 어째 그리 좀스러워졌는고? 하는 호탕한 웃음밖에 얻을것이 없겠지만요.
이야기가 자꾸 푸념이 되어 가는 것같군요. 그러나 다시 부탁 드려야 되겠습니다. 삼귀의를 그대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로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저희 재가 불자들이 오욕에 빠진 많은 역사들이 단순한 스님들의 문제가 아니라, 재가 불자의 책임이라는 것을 일러 주십시오.
더 푸념을 늘어 놓다간 “다 아는 소리 왜 자꾸 귀찮게 하는가? 하는 꾸짖음이 떨어질 것 같군요. 제 잘못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스님 생각을 할 때마다 자꾸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는 걸 그래도 귀엽게 봐주시리라는 믿음도 있지요. 매는 뵐 때 맞기로 하고 오늘 이만 줄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