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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종두 소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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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대 - 호산 1995년 06월 160호
해인사 대적광적 서쪽에 있는 학사대는 신라 말의 한림학사인 고운 최치원이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에 은거할 때에 즐겨 찾아와 그의 친형인 현준 대사와 정현 화상과 담론을 즐기고 시를 지으면서 시름을 털어내기도 하던 곳0이다. 고운0이 몸소 심었다는 전나무가 가지를 아래로 내려뜨리며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운치 있는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해인사는 예불할 때 강원 학인이 오분향례와 발원문을 선창하는데 학사대는 창 대비해 목청을 가다듬는 곳이기도 하다. 모든 일에 정성을 쏟고 미래 불교의 주춧돌을 놓는 맑은 눈동자의 학인 스님들이 청량한 목소리를 내 놓는 학사대를 마련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무리 법당문을 열려고 해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마음은 급하고 바쁜데 굳게 닫힌 문은 좀체 열릴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얼마쯤의 시간이 흘렀을까?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애를 쓰고 있는데 아련히 들리는 목탁소리, 이게 웬 목탁 소리던가.
아뿔사 이미 삼십 분 전에 일어나 법당에 있어야 할 내가 대중방에서 대중스님들과 한가롭게 자고 있다니.
어젯밤 분명히 알람시계에 시간을 맞추어 놓고 갔는데 이 게 어찌 된 일인가. 세수고 뭐고 다 생략하고 지난밤에 밤에 챙겨 둔 가사 장삼과 법당열쇠 그리고 차관을 들고서 부리나케
법당계단을 올라서니, 새벽 도량석 하는 노전 스님 뒤로 주지 스님이 포행하는 모습이 보인다. 지금은 부방장 스님인 법전 주지 스님은 예나 지금이나 사중에 계실 때에는 단 하루도 어김없이 새벽 두시 사십분에 법당에서 백팔배를 한다. 얼른 문을 따고 들어가 전등을 밝히고 어간문을 여니 , 주지 스님은 예전과 다름없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들어와서 백팔배를 한다. 급한 마음에 종종걸음으로 촛불을 켜고 향을 사르고 다기에 청정수를 따르면서 슬그머니 바라보니 주지 스님의 절하는 동작이 예전보다 무척 빠르다. 아마도 시간을 맞추려고 그러나 보다. 더욱 죄스런 마음으로 아침 쇳송을 시작할 즈음 스님은 백팔배를 마치고 일어선다. 불안과 긴장감 그리고 죄스런 마음으로 지금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종鐘을 두드리고 있는데, 아 착각이었을까.
형광등 불빛 아래서 스님이 나를 보고는 빙그레 웃으며 나기는 게 아닌가 언제나 한결같이 무표정으로 생활하는 분이라 그 때 반짝인 흰 웃음이 지금도 화두처럼 신선하게 가슴속에 박혀 있다. 스님의 미소는 그만큼 보기 힘들었다. 실제 그 날 이후로 스님이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 당혹감과 불안감 속에서 맞이한 스님의 미소는 그만큼 충격이 컸다.
내가 법당 소임을 자청하고 나선 것은 신심이 돈독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처님을 한철 잘 시봉하겠다는 원력을 세운 것은 더욱 아니었다. 다만 한 달에 한번 꼴로 돌아오는 창불(선창)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대중 앞에 서면 주눅이 드는 소심한 성격 탓도 있지만 선천적으로 음악과는 거리가 먼 음치인 까닭이었다. 오죽했으면 학창시절 음악 실기 점수가 영점 처리되었겠는가.
그렇게 시작한 종두 소임은 한철 내내 실수와 사고의 연발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모든 대중은 아홉시에 잠자리에 들고 세시에 일어나는데 그래도 남아서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스님은 소임자의 허락을 얻어 밤 열시 반까지 지대방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날 열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막 선잠이 드는 찰나, 누군가 조용히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게슴츠레 잠 오는 눈으로 바라보니 윗반 스님이다. 나오라고 조용히 손짓을 하고는 먼저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나간다. 영문도 모른 채 그냥 따라 나갔더니 현당 마루 아래에 야경처사가 조금 전 그 윗반 스님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를 보고는 법당 문 한 곳에 걸고리가 채워지지 않았다고 하는 게 아닌가 이건 분명 참회감이었다. 불안감을 삭이며 조용히 두사람의 뒤를 따라 열쇠를 들고 올라가서 법당 문 걸고리를 다시 채운 뒤 한번 더 점검을 하고는 말없이 계단을 내려오는 나를 돌아보며 그 윗반 스님이 이렇게 말하였다.
“괜찮습니다 스님. 마침 이 일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 조용히 처리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조심하십시오.” 너무 고마웠다. 윗반스님은 무조건 호랑이같이 엄하다고 믿고 있는데 너무도 고마운 말에 내 귀를 의심할 뻔했다. 그 윗반 스님은 그냥 씩 웃고는 “스님 , 힘내십시오. 처음에는 다 그렇습니다. 법당소임은 힘들지만 대신 한철 잘 시봉하고 나면 해인 강원 졸업에는 지장 없답니다.” 하고는 껑충 앞서 걸어간다. 그 때의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무작정 창불에서 해방되고싶어 시작한 종두소임은 이후에도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일로 나를 괴롭혔다.
대중스님들보다 일찍 올라가셔 법당 예불 준비를 해야 하는 관계로 언제나 가사 장삼과 열쇠, 다관을 저녁 간경 뒤에 챙겨 놓고 오죠 가사와 오조 띠는 걸이에 정확하게 정돈을 해 놓는다. 그것은 대중 스님이 아첨 예불 올라간 사이에 큰방 소임 스님이 늘 정돈상태를 점검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예불 뒤 간경 시간에는 큰방 소임스님에게 호출을 당하곤 하였다. 아마도 대중 스님이 가사 장삼을 걸치면서 옆의 내 오조를 무심코 건드리는 것 같다. 억울하지만 그렇다고 변명도 못하는 곳이 해인 강원이다. 호출을 당했을 경우 묻는 말 이외의 말대꾸는 절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번을 경책을 한 뒤에야 요령이 생겨 도반 스님에게 부탁을 하였더니 흔쾌히 내 오조를 살펴 주겠다고 했다. 그 뒤로 다시는 큰방 소임 스님께 불려 가는 일은 없어졌다.
강원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하심下心이다. 하심이 없으면 상相이 생겨 졸업 때까지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처음 강원에 방부를 드리려고 해인사에 올 때 손수 걸망을 챙겨 주며 “곧 겨울이 올테니 내복 잘 챙기고 두꺼운 옷 준비해 가거라. 해인사의 겨울은 유난히 춥니라” 하고는 그래도 못 미더웠던지 “어떤일이 있더라도 하심하여 강원은 꼭 졸업해야한다. 죽어도 그 곳에서 죽을 각오로 공부해야 한다”고 당부하던 은사스님의 그 자상함이 없던 들 나는 아마도 강원을 떠났을지 모른다.
대중생활은 힘들다. 그러나 언제나 누군가 보살펴 주고 경책해 주며 이끌어 주는 곳이 강원의 생활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대중이 공부시킨다”는 선배 스님들의 말이 하나도 틀림이 없음을 실감한다. 모난돌은 날카로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법이다. 대중생활은 이 날카로움을 갈고 닦아 둥글고 원만하게 만드는 곳이다. 궁현당第玄堂 현판 옆에 선불장辦佛場이라는 현판도 나란히 함께 걸려있다. 장래 부처님을 뽑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신심을 갈고 닦아 잘 수행하도록 하여 부처님을 길러 내는 곳아 강원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강원 생활을 돌이켜 보며 많은 생각을 해 본다. 법당소임 한철이면 강원 졸업 문제없다고 격려해 주던 윗반스님, 법당에 늦게 올라가 예불 준비하느라 우왕좌왕 바쁘게 움직이며 어쩔 줄 몰라하는 나에게 웃음으로 경책을 대신하던 큰스님, 강원 못 다니겠다고 걸망을 싸서 가려고 할 때에 극구 만류하며ꡒ졸업하면 같이 선방 가서 한철 잘 살아보자”며 토닥거려 주던 도반 스님들, 이제는 모두가 회향시켜야 할 큰 빚으로 남아있다.
세상에 나 하니는 걸림없이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두려운 건 나를 지켜보고 이끌어 주고 보살펴 주는 고마운 “눈”들이다. 이 “눈”들이 참다운 스님을 만들어 내는 밑거름이 된다.
또한 이 모두는 빚으로 남아 언젠가는 회향시켜야 한다. 언젠가 지인知人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스님, 언제나 승복이 어울리는 그런 스님이 되십시오.”
무서운 경책이다. 이 경책을 회향시킬 수 있도록 거듭나길 발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