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출가를 했는가? 나에겐 선택의 길이 없었다. 사느냐 죽느냐, 인생의 끝이라는 막다른 길목에 다다라 출가를 했으니까.
세상을 희망차게 보고 살아가야 할 어린 나이에 왜 세상의 모순된 모습이 눈에 들어 왔을까. 삶의 반복된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똑같이 반복되는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물었고,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이 모범이 되어야 할 텐데 행패를 부리고 권력남용이나 하는 등 올바로 살아가지 않는 것을 보면서, 과연 교육이란 것이 사람에게 무엇을 주는가 고민했다. 그리고 삶의 만나고 헤어지는 확연한 사실 앞에서 내가 살고 있는 삶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성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가’라는 물음에 깊이 심취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물음에 대한 심각한 천착은 전생의 연속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왜 사는가. 그 물음 앞에서 동서양의 성현들이 쓴 수많은 고서를 읽었고 마음에 와 닿는 부분들을 줄그어 두었다. 기억에 확연히 남는 것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초월의 삶이었다. 알렉산더왕이 햇볕을 쬐고 있는 그에게 와서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태양이 비치지 않으니 좀 비켜주시오’라는 말속에서 느껴졌던 안온함과 무심함! 지금도 그 느낌은 똑같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것은 선의 체험, 즉 무심에서 나온 소리였다.
성현들이 남겨놓은 책에서 ‘깨달음’이라는 말도 알았고 또 무언가 마음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 가운데 차츰 ‘나도 저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선방스님들을 만나게 되었다. 말로는 풀 수 없는 그분들의 과묵한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뭔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던 중, 한 조그만 암자에 들렀다가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접했다.
“깨닫는 것 그것이 부처다.”
송광사 삼일암에서 행자시절을 보냈다. 일단 큰절로 갔다가 삼일암으로 가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참선하는 몇 분 스님들의 눈빛이 살아 있었다. 말씀도 잘하고 나보다 책도 더 많이 읽은 분들이었다. 정신이 살아 있었고 탈속해 있었으며 화통한 것이 보통 사람들하고 달랐다. ‘이젠 되었다, 내가 갈 길이다’라고 결정하고는 주저 앉았는데, 행자시절 한 해 동안은 불교가 좋고 환경이 좋아서 환희심에 취해 살았다.
행자시절 동안 정말이지 아무 생각 없이 마냥 좋기만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청소를 두 시간씩 하고 풀을 뽑고 도량에 휴지가 떨어져 있으면 주웠다. 쌀을 이는 것도 좋았고, 아무튼 이런 세계가 있는가 보다 하고는 그냥 좋았다. 20년 인생 중에 그렇게 편안해 본 적은 없었다. 획기적인 일이었다.
나의 은사스님인 구산 스님은 당시 종단의 감찰원장이라는 소임을 맡고 계셔서 서울과 송광사를 오가셨는데, 노장에 대한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점심공양을 하고 대중이 전부 감자를 캐는 운력을 할 때였다. 전깃불이 없던 시절, 전날 밤에 불교신문을 철해 놓은 못을 밟아서 발에 약을 바르고 쉬고 있는데, 구산 스님께서 운력을 나가시다가 ‘게으름 피우는 놈 있나’ 조사하려고 방을 들여다보다가 나를 보시곤 물었다.
“왜, 정 행자는 운력 안 가고 있어?”
“어젯밤에 못에 발을 밟혔습니다.”
그러자 노장께서 가차없이 말씀하셨다.
“그건 네가 잘못해서인데 왜 운력을 안 나가나?
그때 참 냉정함을 느꼈는데, 그러면서도 ‘나를 자립시켜주려고 그러는가 보다’ 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어른으로서의 품위와 부지런함이 기억에 남는다. 노장에 대해, 흔히 ‘어떤 일에도 모르시는 게 없었던 분’이라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마음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깨어 있으면 생명이 살아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바로 보게 되는 것이다. 공부를 해 무심해지면 생명 자체가 작용하므로 깨어 있게 된다. 무심하기 때문에 불성 그대로 드러나 천수천안이 된다. 순간에 천 개의 손이 작용하는 것이다.
진정한 출가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집이라는 것은 번뇌망상이라는 집착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출가는 그 집을 나오는 것이다.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삶을 올바로 관찰해야 한다, 삶을 바르게 관찰하려면 이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전제되어졌을 때 진정한 출가를 하는 것이지, 삶이 귀찮아서 혹은 고통스러운 삶을 피해간다는 식으로 출가를 하면 몸만 절에 와 있는 것이지 진정한 출가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절에 와서도 별 볼일이 없다.
“깨닫는 것 그것이 부처다” 란 말에 취해 출가를 한 지 어느덧 40여 년이 되었다. 나는 그 세월 속에서 무엇을 보았고 깨달았던가. 얼마 전, 어느 젊은이 하나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해왔다.
“스님, 감히 여쭙습니다. 왜 사람은 깨달아야 합니까? 깨달음이 뭔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그렇게 좋은 것인가요? 깨달으면 정말 고통을 여윌 수 있습니까? 혹시 거짓 행복은 아닐까요? 깨달으면 무엇이 달라지나요?”
나는 그에게 내 출가동기를 잠깐 말하고 나서 이렇게 답을 했다. 이 답으로 저 환희롭기만 했던 행자시절 이야기를 마감할까 한다.
“출가 후에도 많은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런 과정에 옆에 계신 스님네들과 큰스님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삼보三寶의 중요함을 실감도 했고요. 지금도 항상 삼보께 귀의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 우리 삶이 고苦라는 것도 확실히 알게 되었고 부처님 말씀이 진리란 것도 확실해 졌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는 것이 부처가 말해 놓은 대로 되어 있는 것도 확연해 지더군요. 그렇게 되니 믿음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나는 불교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 삶이 그대로 불교라고 봅니다. 불佛이란 말은 자각自覺의 다른 말이며 돌이킴이라는 말입니다.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실수를 해 놓고 후회도 하고 다시는 똑같은 일을 안 해야겠다 다짐도 해 봅니다. 그러나 잘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런 것을 느낀 사람은 제가 처음에 고민에 빠진 것 같이 삶의 정체성을 알고 무언가 탐구하게 되겠지요. 이럴 때 깨달음에 대한 마음은 절실해집니다.
그러면 당신도 선각자들에 의하여 돌이킴을 갖게 되고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박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저절로 부처가 말해놓은 가르침에 귀 기울이겠지요. 그러면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생기면 깨달음에 대한 답은 스스로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음이 온 뒤에 정말로 좋습니까?’에 대한 질문도 스스로 알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시작이 안 되어 있으면 불교는 사람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요. 이 삶을 조금만 바로 관찰이 된 자에게는 깨달음은 절실한 것이며 다른 길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우리는 헛것에 마음을 두고 살고 있음을 알며, 삶의 맛이 전과 달라 지루함은 어디로 가버리고 모순이라고 생각되었던 것들도 다 어디로 가버리고 사람사람 속에 부처가 있음을 알게 되며, 부처가 있기에 이 삶은 무상한 것임을 알며, 알게 됨으로써 허상을 놓게 되며, 놓으니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자유 속에서는 예와 지금을 같이 보며 옛 성현들을 지금 바로 대하게 되니, 그 뜻이 얼마나 크고 귀하고 소중한가를 알아 삶이 풍요로워지며 나와 남이 둘이 아님을 알게 되며 이 삶이 무궁무진한 보배라는 것도 압니다.
그러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이며 남도 귀함 존재임을 확인할 것입니다. 당신의 질문은 다 풀어질 것입니다. 스스로 풀어질 것입니다. 깨달음의 성질이 이런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부처 말이 다이다. 그렇구나’ 하고 긍정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