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과 아내에 대한 기대는
홍류동 계곡 좋은 것은 익히 알려진 터, 하지만 비 오는 날의 계곡을 바라보고 있자니 장마철 계곡을 보는 것처럼 두려움이 일어난다. 상류에서 하류까지, 빠른 유속을 업고 불어나기 시작한 물이 계곡을 넘을 것만 같은 날. 등을 떠미는 바람을 타고 비를 맞으며 명진교 앞에 섰다. 멀리 비구름이 가득한 가야산 정상이 보이고, 적송으로 가득한 절벽이 앞에 버티고 섰다. 바위를 굴릴 듯한 계곡물을 가로지르는 명진교를 건넌다. 과거 다리가 없었을 때에는 길상암엘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어떤 곳이길래 계곡을 넘고 직벽을 올라야 하는 것일까? 1972년 영암 대종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암자는 큰절 가는 길, 약 1킬로미터 전에 들어섰다. 암자는 큰길에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한다. 다만 미륵불과 약사여래불 그리고 석가모니부처님 진신사리탑이 큰길가에 있어서 이곳이 암자의 입구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한다. 초행인 이들은 이곳이 길상암인 줄 알고 법당을 찾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길을 따라가다 일주문을 만나고, 사천왕상을 보게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런 생각에 길들여진 이들에게 대로변의 석불과 석탑은 약간의 당황함을 안겨준다. 더구나 불상과 탑의 규모가 크게 조성된 반면, 암자는 아담하게 들어서 있으므로 초입에서 받은 첫인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 것이다. 약사여래와 미륵불을 향해 비가 내리꽂는다. 보주를 타고 흘러내리는 비도. 보관을 뚫지 못하고 불상을 비껴간다. 계단으로 이루어진 오르막길 옆으로 산 위에서 흘러내린 물이 작은 폭포처럼 떨어진다. 얼마 오르지 않아 모습을 드러낸 대웅전은 머리를 꺾어서 보아야 할 정도로 가파른 바위에 붙어 있다. 대웅전에 서니 안개에 쌓인 가야산 줄기가 펼쳐진다. 바위를 따라 층층이 들어선 전각. 관음전을 끼고 돌아 ‘보궁’으로 올라간다. 길상암에서 꼭 가보아야 하는 곳이 보궁이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와 보궁 뒤 산, 바위에 안치시켰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초입의 석탑과 함께 매우 성스러운 곳인 것이다. 가파르게 숲을 지나 뚫고 올라간 돌계단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허리를 세울 수 없는 경사길. 비를 먹은 등짐이 어깨를 더욱 무겁게 누른다. 땀과 비로 젖은 발걸음이 멈추게 된 것은 안개 속에 나타난 전각을 보고 나서다. 고개를 숙이고 걷다, 숨을 고르느라 고개를 든 순간 나타난 보궁. 그 모습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잊혀진 곳을 찾아 길을 나섰다가 우연히 도착한 곳 처럼 반갑고 신비스런 느낌이다. 한동안 찾는 이가 드물었는지 보궁으로 난 돌 계단들은 손 볼 곳이 많아 보였다. 길게 이어진 돌계단 옆으론 가로등이 늘어섰지만, 성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깨어진 상태로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짠한 마음으로 보궁에 도착해 숨을 고른다. 자그마한 전각 뒤론 바위산이 가깝게 붙어 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선 보궁. 예를 올리고 나서 문 앞에 앉는다. 안개 섞인 공기 가득한 법당. 추적한 창호에 빛이 떨어진다. 한여름의 강한 빛도, 가을날의 낮은 빛도 아닌 무겁고 차분한 빛이 맺힌다. 북새통을 이루던 과거 어느 날에도 빛은 이와 같았을 터인데…….
보궁을 뒤로 하고 올라왔던 그 길을 다시 내려온다. 물이 넘쳐흐르는 돌계단은 군데군데가 망실되어 있고, 마음은 더욱 무거워진다. 깨달음의 그늘 속으로 가까이 가려 했던 이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간 것인가?